# 501
회귀자 사용설명서 501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4)
멘탈이 나갔다는 건 대충 예상했다.
이전에 리무르아에 의해 벽에 처박혔을 때부터 제정신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으니까.
병력을 뒤로 빼 퇴각할 때도 녀석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상태였고 17거점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내내 이상한 상태였다.
혹시나 정말로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했을 정도니 다른 말이 필요할 리 없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다.
‘씨바.’
그래서 더욱더 똥줄이 탈 수밖에 없었다.
이번 계획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득 중 하나가 바로 사랑스러운 회귀자와 함께 걷는 꽃길이다.
둘이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행복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건만 화면에 보인 건 완벽하게 폐인이 된 김현성의 모습.
여러 가지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살아 있는 건 맞는지 의심스러운 몰골은 가관이다.
마음이 꺾였다거나 죽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지루한 표현이 이토록 잘 들어맞는 모습도 흔치 않을 거다.
“이젠… 지쳤어….”
누가 뭐라고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꼴은 실성한 환자를 보는 듯한 느낌.
잘 보면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혼이 완전히 빠져 버린 것 같았으니까.
무의식중에 저도 모르고 중얼거리고 있다는 표현이 가장 옳으리라.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인간이 실어증에 걸리거나 자폐증 비슷한 걸 겪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물론 이해가 되기는 한다.
김현성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명백한 것은 이미 호감도 맥스를 찍었다는 것 하나.
김현성이 표현이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김예리, 조혜진, 박연주 같은 김현성 사단에 포함된 이들보다 이쪽을 더 신경을 쓴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들고 있는 샤넬리아 에르메스 같은 명품 가방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재화를 가져다 바치는 것은 이미 린델 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죽했으면 파란 길드마스터 연봉의 절반 이상이 부길드마스터의 선물로 사용된다는 헛소리까지 나오겠는가.
어디서 구했는지 전설 등급의 피부 미용 슬라임 젤을 보내온 적도 있었고, 건강에 좋은 영약부터 남자에게 좋다는 정체불명의 산삼 뿌리 같은 것까지 구해온 적도 있었다.
아이템이나 촉매로 사용할 수 있는 물품들 역시 블랙마켓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등급의 상품이라 봐도 무방했다.
김현성의 얼굴보다 김현성이 보낸 선물을 더 많이 봐왔을 정도다.
물론 처음에는 인재를 붙잡고 싶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해가는 녀석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이후에는 녀석의 마음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친형제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을 수도 있으리라.
‘좋은 말이지. 형제.’
이 관계가 허투루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고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었다.
녀석을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고 녀석이 나를 구해주기도 했다.
함께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항상 쓰고 있던 무뚝뚝한 가면을 벗은 상태였고, 그만큼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꾸 지쳤다고 하는 걸 듣다 보니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하다.
1회 차에서 몇십 년, 그리고 2회 차에서 몇 년, 그동안 그 무거운 짐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정신적으로 망가지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녀석이라고 왜 무섭고 외롭고 힘들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도망도 치고 싶었을 것이다.
대륙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는 개인에게 부과되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무거운 짐이었으니까.
녀석으로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어주는 동료가 바로 빛기영으로 비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현성의 방식과는 다르긴 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녀석에게 부과된 짐을 함께해 주고 있었다.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사자였고, 녀석에게는 본인밖에 모르는 미래의 위협에 대해 알고 그것을 대비하려고 하는 인물로 비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유와 결과가 어쨌든 간에 빛기영은 틀림없이 김현성의 짐을 함께 들어주던 친우였다.
그런 친우, 형제, 동료, 이건 내 희망 사항이지만 목숨까지 던지며 지켜주고 싶은 소중한 사람, 아무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가면을 쓰고 타락해 등판했다.
심지어 그게 전부 자기 탓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
김현성으로서는 멘탈이 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 가면이 1회차 가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격받았을 수도 있고….
주어진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무서운 거일 수도 있고.’
가면쓰레기에게 여러 번 뒤통수를 처맞고 아끼는 사람들을 전부 잃어야 했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보니 어쩌면 이번 싸움에서 이기영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회 차에서도 녀석이 소중하게 여기는 건 전부 무너지고 없어졌으니 이번에도 똑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게 많았지만 사실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기영이 가면쓰레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멘탈이 나간 건지.
본인에게 부과된 무거운 짐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허물어져 버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이쪽을 잃는 게 무서운 건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세계보다는 이쪽을 더 우선시하지는 않을 테니, 단순히 이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게 무서워져 겁쟁이처럼 숨어버렸다는 건, 영 설득력이 없다.
솔직히 뭐가 정답인지는 이쪽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3가지 전부일 수도 있기도 하고.
중요한 건 이번 일로 인해 녀석의 정신이 거북이 등딱지 속으로 숨었다는 것 하나였다.
심지어 내가 잠시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조차 보지 못했던 것 같았으니까.
‘시바. 이유도 이유지만 이 새끼를 일으켜 세우는 것도 중요한데.’
시나리오상으로도 그리고 향후 관계를 위해서도 이렇게 쓰러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시바. 이걸 어떻게 해야 돼.’
어떻게 녀석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해도 정황상 떠오르는 게 없다.
본인 혼자 알을 깨고 튀어나와 ‘각성해쪄염, 뿌우.’ 하고 나와줬으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런 걸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 무언가 외부에서부터 자극이 와야 한다는 거다.
‘굳이 내가 해결할 필요는 없긴 한데….’
일단은 김현성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보통 클리셰에서 이런 종류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아무래도 히로인이 아닌가.
‘박연주, 조혜진, 김예리.’
김예리는 히로인으로 보기 좀 거시기하긴 하지만 녀석이 믿고 아끼는 동생이다.
박연주와 조혜진은 대놓고 녀석의 조언자 겸 안방마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조혜진은 한 번 차이기야 했다만 그래도 가까운 사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오늘 하루는 그냥 쉬게 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17거점에서 하루 정도를 보내고 나면 무언가 액션이 있을 수도 있으리라.
뭔가 감동적이고 마음속에 콕콕 틀어박힐 만한 명대사가 귓가에 내리꽂히다 보면 갑자기 ‘마! 검 들고 확 마! 우리 기영이 구해야 돼! 마!’라고 외칠 게 분명하다.
그런 각성 클리셰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대로 다음 날 아침부터 슬그머니 움직이는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게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방 안에 들어와 천천히 말을 건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마스터.
-…….
-식사는….
-…….
-일단 놓고 가겠습니다.
조혜진 1패.
-오빠….
-…….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
김예리 2패.
-파란 길드마스터. 오늘은 조금 괜찮으세요?
-…….
-상황이 조금 안 좋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주세요. 쉽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
-현성 씨 탓이 아니에요. 이번에 일어난 일에 너무 자책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박연주 3패.
-부길드마스터는 무사할 겁니다. 마지막에도 분명히….
-…….
-길드마스터의 탓이 아닙니다. 네, 길드마스터의 탓이 아니에요. 아마 이, 이러시는 걸 부길드마스터도 원치 않을 겁니다. 적어도….
-…….
-…….
-…….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혜진 4패.
-복수해야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야? 오빠? 정말로 이렇게 가만히 있을 거냐고!
-…….
-정신 차려. 제발…. 제발 정신 차려…. 나, 너무 무서워. 흐윽, 정말로 히끅, 너무 무섭단 말야.
-이젠… 지쳤어.
-흐으으윽, 제발, 정신 차려…, 제발….
-이젠… 됐어.
김예리 5패. 다시 조혜진 6패, 박연주 7패.
‘시바,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하루, 이틀, 사흘. 조혜진 11패, 박연주 12패, 김예리 17패. 다시 조혜진 22패.
내가 듣기에도 가슴을 찡 울릴 만한 대사가 몇몇 있기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김현성은 미동도 없다.
식사도 거르고 있었고 작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이쯤 되면 본인이 본인을 무의식 속에 가둬 버렸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나야 정신과에 조예가 없어 이게 뭔 상황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옛날 소년 만화에서 튀어나오던 주인공들처럼 무의식 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애초에 노리고 있었던 건 맞지만, 이 정도까지를 바란 것은 아니다.
적당한 시점에서 스스로 일어날 거로 생각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을 넘어섰다.
녀석은 벽장 속에 완전히 숨어버렸다.
‘망했다, 진짜. 씨바, 망했다고….’
김현성의 시계는 멈춰 있었지만, 당연히 현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
벨리알의 군세는 더욱더 사방으로 힘을 뻗치고 있었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던 41, 42, 43거점이 무너져 연방 놈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지에서 고통을 생중계하는 중이다.
대륙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고 그야말로 풍전등화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심지어.
-저… 이기영 외부고문님.
-네?
-도노반 님께서 41거점을 정리한 이후에 17거점으로 향하고 계시고 있다고 하십니다. 친우가 만족스러워할 만한 성과를 꼭 가져갈 거라면서….
‘이 새끼는 또 왜 여기서 난리야.’
미친 도노반이 강경파 악마들을 이끌고 그로기 상태의 본대를 막타 치러 달려가고 있단다.
혹시 몰라 몇 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개판이 된 상황에서 이 개자식이 한 번 더 개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
파란 길드원들 역시 모두 김현성에게 다가가 케어 아닌 케어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반응이 없다.
정하얀은 계속된 마력 탈진 현상으로 인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튜토리얼 4인 조 중 가장 정신을 차리고 있는 박덕구는….
-덕구 씨. 괜찮으시겠어요? 정말로….
-형님도 없고… 형씨도… 힘들어하고 있는데…. 누, 누님도 누워 있다니까.
-…….
-내가 해야 하는 거요. 이번에는… 내가…, 내가 할 거요. 형님도, 형씨도, 더 이상 힘들게 할 수는 없다니까. 이번에는 내가 할 거요. 내 차례요.
김현성의 각성을 독려하기는커녕 녀석을 내버려 둔 채로 모든 상황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