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
회귀자 사용설명서 502화
주저앉기는 했지만 이내 성장하게 되는 클리셰(5)
‘뭐,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이 새끼야.’
마음은 가상하다만 박덕구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조금 슬픈 말이기는 하지만 뜬금없이 박덕구가 각성한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전설 등급 중에서도 하위 혹은 중위권에 머물러 있는 녀석이 준 신화급의 몬스터를 상대로 무언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백번 양보해 특화된 고기 방패 역할을 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무언가 해주기에는 녀석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괜히 나서지 마라, 덕구야. 원래 이런 건 안 나서는 게 답이야.’
기실 박덕구뿐만이 아니다. 사실 현 상황을 생각해 보자면 17거점에 있는 이들이 도노반의 군대와 부딪치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준 신화 등급의 악마가 도노반 하나뿐이라면 차희라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녀석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 외에도 수준 높은 강경파 악마들이 버티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건파 녀석들 몇몇을 심어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답은….
17거점을 버리고 다시 한번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
하지만 현재 17거점에 들어선 이들은 후퇴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이미 사천왕 도노반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거점은 수성전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더 이상 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하리라.
17거점은 선이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이점이 엄청나다는 것 이전에 이 거점은 마지노선이나 다름없다.
만약 17거점을 버린다면 머나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2차 연방 탈환 작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아마 이지혜도 같은 판단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전쟁을 길게 보고 설계한다면 버려도 되는 거점이지만, 전쟁을 짧게 보고 있다면 당연히 버릴 수 없는 거점.
그녀의 본래 성격이라면 조금 더 느긋한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병력을 더 뒤로 빼는 건 차희라도 원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막아내기만 하면 되는데….’
성공한다면 여러모로 많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기는 하다.
바닥까지 가라앉고 있는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가장 커다란 부분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생각처럼 되리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되었다.
정하얀도 제정신이 아니었고 김현성도 저 모양 저 꼴. 병력의 분위기는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다.
대륙 연합이 41, 42, 43 거점에서 녀석을 맞이했을 때와는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다른 악마들까지 긁어모아 거점으로 진격하고 있었으니 괜스레 손톱을 깨물게 되는 상황이라 봐도 무방했다.
‘왜 상황이 꼬이기만 하는 거야, 시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달콤한 과실을 쉽게 따먹을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걸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정도 위기가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만, 본래 인간이라는 것들은 몸이 편한 걸 가장 선호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일단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17거점 쪽으로 향해야겠습니다.”
-직접 병력을 이끌고 가실 겁니까?
“아니요. 그렇게까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해 직접 대비하고 싶은 것뿐이라. 도노반 님에게는 진군 속도를 늦추라 전해주세요. 아니, 기왕이면 군대를 돌려서 다시 이쪽으로….”
-이미 시나리오에 없는 행동에 대해 주의를 시켰지만, 막무가내로 들어가셨습니다. 통신 채널도 완전히 꺼놓으신 거로 보이고 꼭 성과를 가져가겠다는 말만 전해달라고….
‘이 트롤러 새끼, 진짜.’
여기서 17거점으로 향하는 것보다 도노반의 군대가 거점으로 향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차이는 길게 잡아도 몇 시간 정도겠지만 그 몇 시간 동안 돼지 새끼나 김현성, 정하얀이 다칠지 누가 알겠는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인물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는 했지만 그걸 그 멍청한 자식이 머릿속에 박아놨을지는 미지수였다.
‘김현성, 이 새끼 진짜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멍청한 놈. 진짜….’
그래도 녀석이 다시 일어서 준다면, 녀석이 다시 한번 검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상황이다.
혹여나 비치기연으로 잠입해 녀석에게 수정 펀치를 날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요정을 구할 방법도 없고 거점으로 잠입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금 서둘러 입을 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꼬였다는 걸 인지한 것인지 상황실에 악마 하나가 긴장한 듯 말을 이어왔다.
“지금 당장 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차 하나 준비해 주시고 마차 안에는 여기 있는 상황실을 그대로 옮겨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사역마 조종에 능한 분도 한 분 따라와 주시면….”
-제가 직접 가도록 하겠습니다. 외부고문님. 추가로 호위는….
“필요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로노베 님과 함께 가시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네. 맡겨만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황실 스태프가 로노베를 언급한 걸 보면 그녀에게 뭔가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후에 꼭 보답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얘가 로노베 소속이었나.’
로노베가 관리하는 군단 소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현재 상황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17거점으로 달려가는 일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이윽고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 주문한 것과 같은 마차가 시야에 비쳤다.
로노베는 여행이라도 떠나는 줄 알았는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의 얼굴을 보고서는 내심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이기영 님!
“아! 로노베 님. 이렇게 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인사는 안에서 드리고 일단 올라타시죠.”
-그보다 괘, 괜찮으신 건가요?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동안 상황실에 계속 틀어박혀 있으셨다는 건 들었지만, 얼굴이 반쪽이 되신 것 같네요.
“조금 문제가 생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17거점으로 향하는 것도 이번 일과 연관이 있으신 건가요?
“네. 혹시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도….”
-도노반 님. 언제 한번 사고를 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벨리알 님도 참, 그런 무식한 사람을 언제까지 데리고 있으실 건지.
“하… 하하. 남들보다 조금 의욕적인 성격을 가지고 계신 게 화근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포장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걸요. 저한테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렇게 무식하게 들이대면 벨리알 님이 자기 공을 치하라도 해주시는 줄 알고 있을 거예요. 시대가 변한 줄도 모르고. 악마가 악마다워야 악마지. 이기영 님 말씀이 딱 맞다니까요.
‘니 말이 맞다. 그래, 니 말이 옳아.’
마음 같아서는 손뼉을 치면서 호응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마차 안에 들어서자 금방 마차가 출발하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몇 시간 후면 도노반이 17거점에 들어선다는 걸 아는 만큼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거점 앞에 캠프라도 만들고 정비라도 한 이후 들어갔으면 싶었지만, 그 무식한 놈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곧바로 돌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는 와중에도 김현성의 상태를 살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녀석의 상태는 여전했다.
‘제기랄.’
김예리, 박연주, 조혜진, 심지어는 엘레나를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까지 녀석을 찾아가 심금을 울리는 대사를 쏟아냈지만, 여전히 알 속에 틀어박혀 있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짜증이 몰려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결국에는 내부적으로 김현성이라는 전력을 배재한 채로 수성전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전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는 녀석을 찾지도 않고 있었다.
당장은 내버려 두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선 것이 분명하리라.
나만큼 답답해 보이는 길드원들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거지 같은 분위기는 본대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차희라가 군대를 모아 멋들어진 연설을 하는 것이 보이기야 했지만 침체된 분위기를 살짝 고양하는 것이 전부.
싸울 준비를 마무리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몇몇 녀석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시바.’
그 와중에도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에 틀어박힌 것은 당연했다.
17거점에 코앞까지 다가온 도노반의 군대를 눈으로 확인한 이후에는 이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서 도대체 뭘 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상황을 뒤집을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해 봤지만, 머릿속에 콱 틀어박히는 게 없다.
도노반을 말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무식한 새끼들 막는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 녀석을 막을 수 있다고 쳐도 본대가 느끼기에는 무지막지하게 개연성 없는 장면으로 비칠 것이다.
타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갑작스레 한편이 돼서 싸우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관객들이 황당해하기 이전에, 직접 설계한 둠기영이 아까워 그런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다.
‘베니고어, 이 새끼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데. 아직도 회복 못 한 거야?’
이쯤에 김현성에게 개입해 퀘스트를 내려주거나 기적 같은 걸 보여주면 좀 좋겠는가.
이미 충분히 신성이 쌓였을 거로 생각했지만, 아직도 도망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쌍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차라리 내가 대륙을 맡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이번 일이 끝나거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틀림없이 회복될 거로 생각했지만, 대륙에 똥을 뿌린 이후에 회복해 봐야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다름없다.
‘진짜, 시바. 얘는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진짜로 벨리알 쪽에 붙어버릴까.’
일이 전부 다 끝난 뒤에 일어날 협상 테이블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필요도 없는 신성 따위 쓰레기통에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빛의 연금술사가 아쉬웠던 것도 어둠의 역병군주를 얻기 전의 일이다.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로노베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괘,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로노베 님.”
-아무래도 표정이 너무 안 좋으셔서… 그보다 조금 지치신 것 같은데 잠깐 잠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떠세요?
“끄응. 잠을 잘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에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신 상태에서 임하시면 잘 풀릴 일도 잘 풀리지 않는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한숨 주무세요. 아마 눈만 감으시면 금방 잠에 빠져드실 걸요? 제가 어떤 종족인지 벌써 잊으셨어요?
“그야, 악… 아!!!”
-그냥 악마가 아니라. 음마 로노베 랍니다. 서큐버스라고도 불리기도 하니까요. 어떤 꿈을 꾸고 싶으세요? 이기영 님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기분 좋은 꿈을 꾸게 해드릴 자신이 있는데. 현세에서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다 깨어나시면 사흘 내내 주무신 것처럼 몸이 개운하실 거예요. 당연하지만 정기를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되고요! 무, 물론 주신다면 감사히 받아가겠지만….
“로노베 님!”
-아? 아! 네? 그, 그렇게 갑자기 붙잡으시면…. 혹시 다른 쪽으로 휴식을 취하고 싶으신 거라면 잠깐 준비를….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마력 홀로그램을 통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차희라의 대찬 연설이 들리기는 했다.
-우리는 오늘 승리할 것이다. 눈앞에 있는 악마 놈들을 전부 처죽이고 대륙의 상징을 되찾아 올 것이다. 이번 전투는 기억될 것이다. 아직 우리가 빛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전투가 될 것이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말은 많구나. 벨리알 님의 충성스러운 사도, 이 사천왕 도노반을 상대로 말이야. 네놈들은 전부 찢어 죽여주마.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찢어 죽여. 내 친우에게 보내는 선물로 사용할 것이다.
-무서울 것이고, 두려울 것이다. 이 위협에 겁먹고 숨고 싶은 자들을 비난하고 싶을 생각은 없다. 절대로 겁먹은 자들을 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천천히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라. 평생을 숨으며 살 것인지, 아니면 영광스럽게 죽을 것인지를 떠올려 보라. 어떤 것이 그대들에게 더 명예롭게 다가올 것인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라! 인류는… 인류는 오늘 이곳에서 승리할 것이다.
-크르르르륵!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로노베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더욱더 중요했다.
“혹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꿈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까? 혹은 무의식이라든지. 로노베 님이 아니라 제가 말입니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노베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쁜 마음에 그녀를 와락 껴안았고, 이윽고 흠칫흠칫 몸을 떠는 그녀를 뒤로하고 몇 가지 절차 끝에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현성아, 씨바 형 간다!’
많은 이들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베를린 장벽을 부수는 건 역시나 히로인보다는 진심을 나눈 친우.
현재 내가 들어와 있는 장소가 녀석의 무의식이 맞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은 이후에 시야에 비친 것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녀석의 모습.
천천히 다가가자 이내 고개를 치켜드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기영… 씨?”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왈칵 눈물을 쏟는 녀석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네, 접니다. 하… 하….”
‘그래, 씨바… 형 왔다.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