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
회귀자 사용설명서 504화
녀석이 원하는 것(2)
“그래서 부정하고 있는 거야.”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아직 모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살아 있는 인간은 없을 겁니다. 내일 함께 나가보시면 아마 직접 눈으로 확신하실 수 있을 겁니다. 린델은 물론이거니와 실리아 그리고 공화국과 왕국연합 역시…. 심지어는 이종족들도 아마 찾아보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걸 말하고 있는 게….”
“기영 씨 역시 막 정신을 차린 상태라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으시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제가 전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은 한참 전에 설명해 드려야 했던 이야기였지만…. 일단은… 네, 차근차근 전부 다 이야기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요. 일단은 조금 쉬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힘드시겠지만 일단은 마음을 편하게….”
‘마음을 편하게 먹긴 뭘 편하게 먹어, 이 현실도피 장인 새끼야.’
무슨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거라고 깨달은 건 순식간이었다.
현재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 느낌.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딸랑 둘만 떨어진 멸망한 대륙에서 진심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당황스럽다.
현세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지금 이 폐허가 돌아간 이후에 자신이 마주할 상황보다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이 새끼는….’
이렇게까지 하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 공간이 자신이 만든 무의식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다면,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자신이 만들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생쇼를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혹시라도 이쪽이 침투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로노베피셜에 의하면 눈치채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이 장소에 있는 내가 본인이 만든 환상이 아니라 진짜 이기영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이런 형태로, 이렇게 진실을 외면하는 방법으로 나를 가두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냐, 현성아.’
충분한 휴식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도 더 쉬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 이제는 쉬는 걸 넘어서 모든 걸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지금 당장 주먹이라도 휘두르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직 불안정해 보이는 정신 상태 때문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녀석에게 자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녀석이 그걸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한 번 더, 타인의 입으로 그걸 전해야만 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이곳에서의 사흘은 저곳에서의 한 시간이다.
당연히 사흘을 다 채울 생각은 없다. 흥분한 박덕구가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불안했으니까.
일단은 장단을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맛이 느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무 말 없이 술을 한잔 들이켜자, 김현성답지 않게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대부분이 쓸데없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딱, 그저 그런 추억 이야기.
하지만 즐거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현성 씨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조금 더 차갑고 냉정한 성격인 줄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웃는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금 부끄럽군요.”
“…….”
“저도 제가 이만큼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아마 무리가 아닐 겁니다. 기영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에 조금 서툴렀으니….”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정말입니까?”
‘아니, 너 의사소통 엄청 서툴렀어, 이 새끼야.’
“네. 하지만 정말 현성 씨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면 영향을 끼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파란 길드원 모두가….”
“네, 그렇죠. 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나.
“그리폰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 뭡니까.”
“아, 막 수도에서 돌아왔을 때였죠. 저도 좋아할지 걱정했었는데. 그때는 현성 씨가 그렇게 그리폰을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관련 용품이나 축제 같은 걸 즐기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솔직히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에는 혜진 씨 때문에 조금….”
“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갑자기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그리폰을 선물한 이야기, 조혜진에 관한 이야기, 원정 이후의 회식이나, 굵직한 사건들 전부.
주제는 많았다. 녀석도 나도 웃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까. 의외로 공감대가 많았다.
대략적인 상태를 파악하려 대화하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찾아왔고, 기껏 정리한 침대에는 눕지도 않은 채 하루가 시작됐다.
아마 이때 즈음부터는 나 역시 반포기 상태로 녀석을 지켜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대충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맞춰줬다는 표현이 알맞으리라.
‘그래, 어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이 새끼야.’
물고기 같은 게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함께 낚시하러 가기도 했고, 생존자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폐허가 된 린델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다. 여긴 녀석이 만든 무의식 세계였으니까.
나 역시 천천히 최후를 맞은 린델을 바라볼 수 있었는데, 확실히 처참하게 무너진 곳들이 눈에 들어왔다.
1회 차의 세계다.
정하얀이 스스로 목매달고, 카스가노 유노가 죽고, 선희영과 차희라는 물론 대륙 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생명체가 없어져 버린 세계.
궁금증이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하리라.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한참이나 걷다 보니 린델 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조금 숨을 헉헉거리기가 무섭게 김현성이 말을 걸어왔다.
“몸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조금…. 허억…. 힘이 드는 거 같은데….”
무의식 속에서도 체력이 발목을 잡는다. 슈바.
“아, 그럼 여기서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니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종료해도 되고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어쩌면 숲 쪽에 야생동물 몇 마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그리폰을 발견할 수도 있고요. 내일은 그쪽으로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야생동물은 개뿔.’
“글쎄요. 그보다는 이곳을 더 둘러보고 싶은데…. 아니면 라이오스 쪽은….”
“아마 그쪽은 여기보다 더 심각할 겁니다. 여기 물 좀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숨은 조금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덕분에.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없군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네, 고요하기도 하고요.”
“…….”
“기영 씨.”
“네?”
“인간이라는 건 참 이상한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왜.’
“모든 게 다 무너진 폐허인데 조금은 예쁘게 보이기도 합니다. 신비롭게 보이기도 하고요. 붉은 노을이….”
“확실히 운치는 있네요. 완전히 어두워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해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한 번도 뜨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본 적도 없는 것 같고요. 하지만 시간이 되면 이렇게 붉은 노을빛이 보이는 것 같더군요. 아, 그리고 일정 지역을 벗어나면 별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보지 못했으니 오늘 한번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한 3일은 걸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힘드실 테니 피곤하시면 다음에 보러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곳에서 혼자 얼마나 지내신 겁니까?”
“글쎄요.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구라 치고 있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게 있는 법이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흔적들이 곳곳에 비친다.
아마 이 흔적 역시 녀석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일 테다.
어째서 저런 흔적이 만들어졌는지도 뻔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김현성이 이 세계에 혼자 남겨진 적이 있었다는 것 하나.
회귀하기 직전인지, 아니면 한참이나 이곳에 남겨져 있었던 건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은 이곳에 있었다.
며칠인지 몇십 년인지도 알 수 없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이 장소에서 이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계속.
매일같이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 어두운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의 변화는 이 현상이 전부였을 테니까.
거의 모든 인류가 사라진 상황이었다는 건가? 현성이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가능성이 큰 가설은 알타누스가 녀석을 보호했다는 것.
지금 보이는 게 정말로 김현성이 회귀하기 전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큼.
너무 여러 가지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와 머리가 지끈거린다.
솔직히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당장 눈앞에 있는 일만 해도 산더미였고, 지금 중요한 것은 1회 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당시 느꼈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노베가 말했던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게….’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눈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뚝뚝 눈물이 쏟아져 내린다.
한참이나 붉은 노을을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내 모습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 기영 씨.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갑자기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
“제기랄! 아무것도 아니라고!”
“…….”
“…….”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로요.”
“…….”
“…….”
“기영 씨.”
“네.”
“제가 어제 해드릴 말씀이 있다고…. 그러니까 사과드리고 싶은 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그게 무슨….”
“이렇게 말하려고 한 거 아니었잖아, 제기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뭘 말하려고 하는지 당연히 알 것 같다.
본인이 회귀했다는 소리를 지껄이려고 하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엔딩을 마무리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걸로 2회 차에 짊어진 마지막 짐을 버리고 홀가분해지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게 맞다. 김현성이 원하는 건 피하는 것이다.
책임을 피하는 것, 실패로부터 도망치는 것,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 동료를 잃고 친우를 잃고 연인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부터 회피하는 것.
더 이상은 감당할 자신이 없어 놓아버렸고, 내 등장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지고 있던 짐까지 놓아버리려고 하고 있다.
머리가 지끈거려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저 어처구니없는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새끼가 키워놨더니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캐리는 하고 가야지.’
세계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걸 눈으로 확인했는데, 그렇게 쉽게 도망치게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안 나갈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고 있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을 거야? 정말로 이렇게 끝낼 거야? 이 머저리 새끼.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사실은 알고 있잖아.”
“…….”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전부 가짜라는 거.”
“…….”
“정신 차리자마자 눈치챘잖아, 이 새끼야.”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벽으로 밀려난 것.
충격으로 잠깐 비틀거렸을 때 시야에 비친 것은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었다.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