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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05화 (502/1,590)

# 505

회귀자 사용설명서 505화

녀석이 원하는 것(3)

무섭지는 않았다. 표정을 구기고는 있었지만, 위협하거나 해코지를 하려는 얼굴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조금 슬퍼 보이기까지 한 얼굴에 나 역시 녀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벽에 밀어 붙여진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숙인 것은 바로 그때.

간헐적으로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모습은 김현성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이쪽의 말에 부정하지도 않았고 긍정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분위기만 보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고통스럽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 자체는 여전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개뿔….”

“오늘은 그만하시고….”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 새끼야. 내 눈 똑바로 쳐다봐. 정말 여기서 전부 끝낼 거야?”

“아직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맛탱이가 간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묵묵히 등을 돌린 채로 차분하게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뭔가 조금이지만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말 돌리지 마.”

“…….”

“…….”

“어째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 김현성.”

“이제는 지쳤습니다.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 건에 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해 주세요.”

“너는 지친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거야. 정말로 여기에서 평생 썩고 싶어?”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너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이제… 그만해요.”

“죽게 내버려 둘 거야?”

“그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보고 싶지 않아요.”

“네가 보지 않는 곳에서 뒈질 거다.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거야, 패배자 새끼.”

“네, 저는 이미 한 번 실패한 인간입니다. 제가 이곳을 벗어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찾아올 겁니다. 그곳에서는 기영 씨도 없을 거예요. 다시 모두가 죽는 걸 보게 될 겁니다. 비난하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해 주세요.”

“이미 많은 게 달라졌어.”

“그건… 기영 씨 때문입니다.”

“네가 날 살렸기 때문에 달라진 거야. 병신 새끼, 그 누구도 너한테 무거운 짐을 혼자 들고 있으라고 한 적 없고 뒈지는 걸 지켜봐 달라고 말한 사람도 없다. 한 번 미끄러졌다고 전부 다 끝난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나는 이렇게 마무리할 생각 죽어도 없으니까.”

“인제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하긴 뭘 그만해!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제기랄!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아느냐고!”

“…….”

“제길, 제길! 흉내 내지 마. 흉내 내지 말라고. 제기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렇게까지 나타나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 한 적 없어. 다시 한번 하고 싶다고 부탁한 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만 내버려 둬. 제발 그만! 그만 내버려 둬! 더 이상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 개새끼들아! 나한테 씨발,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씨발….”

“…….”

“제발 생각하지 마…. 제발…. 제발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말라고… 이제 지긋지긋하잖아. 제발 떠올리지 마. 아무것도 떠올리지 마.”

“…….”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모습으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요.”

얼굴이 구겨진 것은 물론 완전히 멘탈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은 뭐라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갑자기 소리를 지른 녀석에게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아마 녀석이 소리를 지른 게 나를 향한 건 아닐 거로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진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테니,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에 화내는 거로 판단하는 게 맞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무의식이 자신이 만든 이기영을 통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은 기실 자기 자신에게 외치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책임에 대해 떠올리지 않으면….

‘내가 다른 말이라도 꺼낼 거로 생각하는 건가.’

몇 가지 가설이 있기는 했지만 이게 가장 가능성이 큰 가설.

잠깐 조용해진 녀석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고서는 내 생각이 반쯤 맞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개자식의 행동에 맞장구쳐 줄 수 있을 리 만무.

판단하는 건 녀석의 몫이지만 나는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책임 같은 거 강요한 적 없어.”

“…….”

“그래도 네가 엎지른 물은 네가 주워 담아야지. 안 그래?”

“…….”

“왜. 나도 네가 만든 사람인 줄 알았어?”

녀석의 표정이 달라진 것은 바로 그때.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아….”

“…….”

“아아… 아….”

‘먹힌 건지 모르겠네, 씨발.’

사실 도박이기도 했다.

조금 더 저 장단에 어울려주고 싶었지만, 어느 기점에서 끝맺음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질질 끌려다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성화를 낸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오만가지 감정이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마침표를 찍기에 지금보다 나은 타이밍이 없을 거로 생각했다. 조금은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떻게 내가 녀석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 역시 신경 쓰이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쏟아낸 발언들이 다시금 생각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었잖아’라든가, ‘이곳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잖아’라든가.

김현성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함을 느낄 수 있는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러한 것들까지 생각이 닿지 않은 모양이다.

“아… 흐… 윽….”

‘아, 이 새끼 또 우네.’

의심하기보다는 안도 하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이쪽이 무사하다는 것과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 모두에 대해 확실히 안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게 시바…. 정신 놓지 말지 그랬어.’

혹시나 했지만 잠깐 제정신을 찾았다는 것 역시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김현성 히로인 3인조의 노력이 무시당한 게 아니라 정말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한번 조혜진에게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슬그머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와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김현성은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남, 남… 아 있으셨군요. 아직… 남아 있으셨군요.”

“…….”

“찾아와 주신 겁니까.”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어지간히…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굳이 그런 건 아니야.”

“지금 기영 씨는 괜찮으신 겁니까.”

“사실은 조금 위험한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여기에 오는 것도 도박에 가까웠고.”

“추태를 보였군요.”

“이해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도 없고.”

“…….”

“아무도 네게 책임지라고 말한 적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 한 사람은 없어.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많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굳이 혼자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짐은 같이 들면 돼.”

‘키야… 멘트 오졌다.’

점점 더 감정이 고양되기 시작한다. 잠시 손발이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본인에게만 잘 먹히면 됐지, 뭐.

김현성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이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나는 녀석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는.

김현성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게 눈에 보인다.

나는 손을 잡았고 녀석은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로노베야, 지금이다. 지금이 타이밍인 것 같어! 지금 해야 돼. 지금이라고! 씨바!’

김현성과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은 더 이상 붉은 노을이 아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응.”

“저는 지금까지 제가 바라보던 풍경이 해가 지고 있는 광경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이곳에 해 같은 건 없었지만 말입니다. 계속…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현성이 감상적이네. 감상적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노을은 해가 질 때도, 해가 뜰 때도 생겨난다. 생겨나는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이미 망한 세상에 그런 법칙이 통용될 리 만무하고….

아무튼 1회 차의 김현성은 저 현상이 해가 뜰 때 생겨난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해야 간다. 누가 저걸 보고 해가 뜨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저주의 붉은 빛이라면 모를까.

‘사실 이 지경이 된 1회 차 에서는 애초에 태양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감상적인 얼굴로 빛이 비치고 있는 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현상이 로노베가 만든 주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실이 뭐가 중요하겠어.’

진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한 것.

터져 나온 빛에 눈을 찡그리자 폐허가 됐던 건물들이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

마치 김현성의 마음의 짐을 완전히 무너뜨릴 기세로 퍼져나간 빛은 녀석에게 남아 있던 1회차의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연출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김현성이 마음의 짐을 털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그 가운데 녀석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점점 더 밝아지는 곳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빛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에서 녀석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김현성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며, 내 손을 잡은 채로 가짜 빛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할 상황이라고 생각해 슬그머니 녀석의 손을 뿌리치자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기로는 못 나가.”

“아….”

“나 말고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잖아.”

‘뭐야, 이 새끼. 왜 주춤거리고 난리야. 빨리 꺼져.’

“하, 하지만….”

‘이 개새끼. 시바, 안 나가게? 빨리 나가라고.’

“하지만….”

‘빨리 나가, 이 새끼야.’

씁쓸한 척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온갖 똥줄이 다 타기 시작.

로노베 역시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급조한 인물들을 생성해 연출을 펼치는 것이 보였다.

만들어진 박덕구와 정하얀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이 녀석에게 손을 내미는 연출은 가관.

‘이건 아니지, 로노베 감독…. 아… 이건 너무 유치하지. 쌍팔년도 클리셰라고, 이건.’

“안 오고 뭐 하고 있는 거요, 형씨. 같이 싸워야지.”

씩씩하게 외치는 박덕구. 손발이 없어질 뻔했다.

“현성이 오, 오, 오빠… 빨리 오세요.”

튜토리얼 멤버 정하얀, 급조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녀석들뿐만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얼굴을 아는 놈들이 전부 녀석을 기다리고 있다.

“길드마스터.”

“오빠.”

“현성 씨.”

38패를 적립한 패배한 히로인 3인방.

안기모와 선희영과 황정연과 병아리들.

이런저런 모습으로 인연을 쌓아온 모든 인물.

교국의 인물들부터 공화국의 인물들까지.

심지어….

‘쟤는 또 왜 여기 있어.’

얼굴 본지 오래된 이기연마저 녀석을 향해 미소 짓는 중이다.

로노베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라 나조차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딴 게 먹히겠냐고.’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상황.

혹시라도 뭔가 이상함을 직감한 김현성이 눈치를 까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리라.

“현, 현성 씨는 혼자… 혼자가… 아닙니다.”

결국, 이 싸구려 연출에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조차도 대사가 꼬여버렸다.

하지만 감상적으로 변한 김현성은 이 모든 상황이 주작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 모습.

사건의 당사자인 만큼 녀석의 손발은 무사해 보였다.

심지어 주인공 같은 대사를 외치는 모습에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예.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죠.”

‘시바… 기적이다.’

지금 보이는 광경이 기적이 아니다. 저 싸구려 연출을 보고 넘어간 김현성의 감성 자체가 기적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로 녀석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린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예.”

“믿겠습니다.”

“네, 반드시, 반드시.”

제법 환한 얼굴로 빛 속으로 몸을 던지는 녀석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왔던 녀석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편해 보이는 모습.

홀로 남은 채로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약간의 하자가 있기는 했지만, 완벽에 가까운 각성 클리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푸… 흐… 푸흐헤헤헤하핫!”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즐거운 상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가즈아!!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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