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6
회귀자 사용설명서 506화
김현성 각성(1)
-외부고문님.
‘…….’
-외부고문님.
“가즈아….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외부고문님!
“가… 가즈아!!”
-외부고문님!!
“아….”
이쪽을 부르는 목소리에 감겨 있던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꿀 같은 단잠을 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일으키는 게 불쾌해졌다.
하지만 이내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건가?’
확실히 아까와 다른 것 같은 느낌.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것도 꽤 현실감 넘치기는 했지만, 현실이 주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괜스레 주먹을 한 번 꽉 쥐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잠들던 마차 안이 맞다.
‘성공한 거 맞네.’
뒷일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무난하게 성공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조금 더 이 느낌에 취하고 싶기는 했지만, 여운을 느낄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 만큼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서둘러 바깥을 둘러보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마력홀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고개를 밖으로 내민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이미 난장판이 된 거점.
전투를 벌인 지 시간이 좀 지나 보이는 상태의 전장이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버텨!!! 버텨어어!!!!”
“발사! 발사! 마법사들은 마법 준비해라. 탈진할 때까지 마법을 퍼부어.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절대로 물러서지 마! 제기랄!”
“지지 마!!! 물러서지 마라! 베니고어 여신님이 아직 함께하신다는 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몸이 부서지라 싸워!!! 더러운 악마들에게 대륙의 빛을 빼앗길 수 없다!!”
콰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올라오지 못하게 해!! 절대로 성벽을 넘어서게 하지 마!!! 절대로!!!”
-커어어어어억!!! 더러운 인간 놈들이!! 감히!!!
‘오우야….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네.’
그제야 불안한 마음을 조금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직도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느낌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광경을 확인하니 정신이 화들짝 깨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옆을 바라보니 시야에 비친 것은 코를 막고 있는 로노베.
“로노베 님?”
-아, 그, 죄, 죄송해요. 외부고문님. 너무 자극적인 걸 봐버린 것 같아서.
‘뭔 소리 하는 거야, 얘는.’
다시 한번 힐끔 로노베를 바라보자 어째서 코를 막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줄줄 새어 나오는 코피를 최대한 막고 있는 모습은 가관.
심지어는 얼굴이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는데, 자꾸만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은 얘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러니까 연출을 강아지처럼 했지.’
당장 탓할 생각은 없다.
어찌 됐건 일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그 연출의 도움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조금 전 끔찍했던 연출을 상기하며 고개를 흔들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역시… 아쉬우세요?
‘무슨 개소리야. 뭐가 아쉬워? 그래, 씨바, 연출이 아쉬웠지.’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 짧게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아… 네, 네, 그게…. 그러니까, 네, 전투가 시작된 지는 약 4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에요. 보시는 바와 같이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은 아니고요. 생각보다 인간들이 잘 저항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현성이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겁니까?”
-네, 아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라고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어느 정도요?”
-크게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외부고문님과는 다르게 그… 그 인간 같은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무의식에 체류하고 있었던 터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늦어도 한 시간 정도면 정신을 차릴 확률이 높아요. 더 빠를 수도 있고요. 본래대로라면 하루 정도가 걸릴 수도 있겠지만, 격이 높은 인간이니….
‘한 시간….’
버틸 수 있나.
지금의 분위기라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수성전에 기초해 병력을 꾸역꾸역 밀어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류의 의지가 느껴졌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은 박덕구.
‘돼지 새끼. 제법이네.’
-최대한 버티는 거요! 최대한! 조금만 있으면 근처 거점에서 지원이 올 거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분위기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도 달라진 것이 맞다. 병력 전체를 뒤덮은 정체불명의 버프가 녀석의 주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인다.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소소한 성장을 이룩한 모양이다.
전투력 자체가 크게 성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병력의 중심에 서서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며, 악마들을 막아내는 모습은 마치 성전의 한 장면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도 성전이 맞다. 현재의 전투는 대륙과 그 대륙을 좀 먹으려고 하는 악마들의 싸움이었으니까.
차희라는 강경파 만인장 하나를 상대로 대등한 싸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외 다른 이들 역시 다르지는 않다.
똘똘 뭉친 파란 길드가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괜스레 뿌듯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전까지만 해도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몇몇 길드원들이 새로운 활력을 받은 듯 몸을 일으켜 싸우고 있었으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오히려 걱정된 것은 상황이 너무 무난하게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
‘위기가 있어야.’
“조금 더 극적일 텐데….”
극단적으로 말해 이 상태라면 굳이 김현성이 등장하지 않아도 잘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이쪽의 착각에 불과했던 모양.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밀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노반이 합류한 시점이라 볼 수 있으리라.
27군단 쪽에서도 네임드라고 불릴 만큼 거침없이 전쟁터를 헤집고 다니는 녀석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조금 질린다.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이 튕겨 나가고 몸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전장의 판도에 영향을 준다.
거점을 수비하는 입장에선 녀석이 눈엣가시일 터.
아마 곧 특임대가 꾸려질 거로 생각했지만, 병력을 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박덕구가 녀석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녀석은 버티기 위해서 자리해 있다.
커다란 방패를 든 채로 녀석을 막아선 모습은 마치 골리앗 앞에 선 다윗.
저 박덕구의 몸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녀석의 압박감이 어느 정도일지는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
도노반은 주먹을 휘둘렀고 박덕구는 그 주먹을 막아낸다.
검조차 버린 채로 방어에 집중하고 있음에도 조금 아슬아슬해 보였기 때문에 괜스레 몸을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잘 버텨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있구나! 인간! 재미있어! 쓰레기 같은 인간 놈!
-후우…. 후우….
물론 몸이 멀쩡할 리가 없다.
엘레나와 선희영의 신성력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고 한들, 온갖 버프가 녀석의 몸에 들어오고 있다고 한들, 힘의 차이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온몸이 으스러지고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도노반을 마크하는 박덕구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신성력이 들어오지 않는 타임은 꾸역꾸역 포션을 마시면서 버티고,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공격은 몸을 구르면서까지 회피한다.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끈질기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질척하게 달라붙는다.
-쿨럭! 쿨럭!
압력을 버티지 못해 내장이 상했는지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지만, 녀석은 그 피를 닦지도 않고 오롯이 막아서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박덕구로 도노반을 고립시킨 이후에 다른 지점에서 이득을 볼 생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녀석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녀석은 고통을 삼키며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녀석이 자원했을 확률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도노반, 저 새끼 빨리 치워 버려야 하는데.’
김현성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상황.
혹시라도 다시 한번 무의식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로노베를 바라봤지만, 옆에 있는 음마는 고개를 저을 뿐 다른 말을 해오지는 않았다.
심지어 다른 곳에서도 점점 더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다.
차희라는 만인장 한 명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점점 더 지력을 내리고 있었고, 병력 전체를 휘감고 있었던 엘레나의 신성력도 점점 더 바닥나고 있다.
점점 더 전선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도 박덕구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고 있었지만, 타임 아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
‘개 씨발, 여기서 등장하면 안 되는데.’
아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 보이던 수많은 마력홀로그램 중 하나가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어….’
김현성의 방 안을 지켜보기 위해 넣어뒀던 사역마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황실에 있던 악마는 당황했지만, 당연히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바라보고 있던 사역마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건 녀석이 깨어났다는 것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왔다아! 왔다아아아!!!’
“전체적인 시야 한 번 부탁드립니다.”
-네.
극적이어도 이것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김현성이 있던 방 안에서 커다란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광기에 몸을 맡기던 양측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키야아….’
-이거 돌아왔구만….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엎어져 있던 박덕구는 조용히 중얼거렸고, 도노반 역시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길드마스터….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
김예리는 여느 히로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질질 짜기 시작했고, 박연주마저 온몸에 피를 묻힌 채로 미소 짓고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희망을 잃어가던 파란 길드원들은 커다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번 전열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현재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다른 병력까지 한 발자국 나아갈 힘을 얻는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클리셰대로라면 이쯤에서 희망찬 음악이 들려오는 것이 맞다.
‘엘도라도오!!!’
-뭐야…. 뭐가 일어나고 있는 거냐.
‘전형적이고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주 좋습니다. 저런 대사 아주 어울려요. 도 배우.’
전형적인 악당 대사를 내뱉는 도노반은 당황한 모습으로 박덕구를 향해 커다란 손을 뻗었지만,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뻗었던 팔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내 팔이이!!!!!
당하는 대사마저 전형적이다.
그 모습을 본 박덕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고.
-너무 늦은 거 아니요. 형씨….
고개를 끄덕인 인형은 차분하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도노반의 앞에 자리한 것은 완전히 각성을 끝낸 회귀자.
완벽한 왕도의 클리셰 그대로.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주인공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X나, X나 멋있어…. 씨발….”
2천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