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
회귀자 사용설명서 507화
김현성 각성(2)
‘뿌듯하다, 뿌듯해.’
본래 아티스트들은 본인의 작품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흥분하는 법이다.
당연하지만 이번 극의 총책임을 맡은 둠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온몸에 소름이 쭈뼛쭈뼛 돋은 것은 당연지사.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마치 정의의 아군이 새로운 힘을 얻은 후 빌런 앞에 서는 만화영화처럼 김현성이 보여주는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뭐가 달라진 거지? 새로운 직업이라도 받았나? 뭐, 어떻게 각성한 거야? 진짜 각성한 건 맞나?’
천천히 확인 작업을 거쳐봐야 했지만, 직업이 준 신화 등급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베니고어나 엘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알을 깨고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심지어 오른손에 쥐어진 검에서 계속해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신화 등급의 능력이 일부 해방된 모양.
박물관에서 쥐여 준 검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각성! 각성! 각성! 김현성 각성!’
평소와 같이 천천히 검을 든 채로 도노반을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한 표정.
원래 마음의 짐을 가지고 싸우는 히어로보다 편한 상태로 싸우는 녀석이 더욱더 강한 것이 정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주인공은 좀처럼 패배하는 일이 없다.
조용히 숨을 내쉬는 김현성을 모니터링하자 마치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배우 하나는 잘 골랐어.’
비주얼이 되니 흡입력이 있다.
물론 이 무대의 주연은 녀석뿐만이 아니다.
좋은 영화는 좋은 악역이 등장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
당초 계획과는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당하게 될 놈도 아주 제대로 골랐다.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도 배우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일품.
물론 녀석에게는 연기가 아니겠지만,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상황에는 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히, 감히!!! 인간 따위가! 인간 따위가아아아!!!
‘어우야, 그 대사 왜 안 나오나 했다.’
-감히! 내 팔을!!!
‘이것도 좋고요. 이런 대사 안 나와주면 섭섭합니다, 진짜.’
-후우….
순식간에 뛰어들어가 커다랗게 휘둘러지는 주먹.
박덕구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는 듯 태산조차 무너뜨릴 것 같은 기운이 들어가 있는 주먹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너무나도 쉽게 피해낸다.
거대한 바람 소리와 함께 풍압만으로 주변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만, 김현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하게 공격을 읽어내고 있었다.
-…….
‘예술이네.’
녀석은 붙으려고 하고 김현성은 거리를 유지한다.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자신의 몸 역시 성치 않을 거로 판단하는 것이 분명했다.
약이 올랐는지 미친개처럼 팔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4천왕 중 최약체의 주먹이 주인공에게 닿을 리 만무.
아직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미 걱정 따위는 달나라로 보내 버린 지 오래다.
김현성은 이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다.
피하는 와중에도 검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은 장관.
숙련된 검사와 전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언제나 절도 있게 느껴지지만, 검의 극에 다다른 녀석의 움직임은 일반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너무 세진 거 아니야?’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김현성은 마치 새로 얻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도노반이 더욱더 날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
-감히!!! 나를 기만해! 네가 나를 기만해!? 더러운 인간 따위가 감히!! 27군단의 만인장 도노반 님의 앞에서!! 찢어 죽여주마. 네놈은 반드시 찢어 죽여주마!!
-…….
-여기 있는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벌레 같은 인간 놈들! 벌레 같은 인간 놈드을!!! 죽어… 아아아아아악!!
-…….
한눈을 판 사이 이번에는 다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연신 욕을 쏟아내며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도노반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잘 가라, 노반아. 진짜… 잘 가라.’
-내 친우에게 바치는 산 제물로, 커헉!
-…….
-제기랄, 내가, 내가!
-…….
-이… 내가 고작 인간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어! 당할 수는 없다. 내 친우와의 약속을, 내 친우와의 약속을 어길 수는 없어.
‘아이고, 노반아.’
눈물이 찡하게 차오르는 상황.
녀석이 역소환 대신 선택한 것은 남아 있는 힘마저 끌어오는 것이었다.
라이오스에서 봤던 벨리알의 모습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대하게 몸을 키운 녀석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마 쌓여 있던 실적을 전부 박아버린 모양.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로노베마저 한심하다는 듯 녀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멍청한…. 같은 동료라고 하기에도 수치스럽군요.
마치 리미트가 풀린 것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
본디 악마들이 현세로 소환될 때는 일정한 페널티를 안고 들어온다.
모아놨던 실적을 때려 박은 녀석의 현재 모습은 아마 준 신화 등급의 힘을 그대로 낼 수 있을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시스템에 저항해서라도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조금 짠하기는 했지만, 본래 사천왕 중 최약체는 가장 빠르게 퇴장하게 되어 있다.
-내 친우여!
-그 사람은 네 친우가 아니야.
-뭐?
-그 사람은 네 친우가 아니라고.
‘그래, 현성아. 시바… 그거야.’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쓸모없는 필멸자에 불과한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개자식들.
대화는 그것으로 끝.
하지만 김현성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전부 죽여주마! 전부!!
이쪽도 흠칫할 정도로 거대한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커다란 주먹이 다시금 하늘에서 떨어진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마치 라이오스 악몽의 재현.
하지만 김현성은 당황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몸을 날린다.
‘필살기 쓰나요. 필살기 쓰나요!’
분위기만 보면 알 수 있다.
이번 일격이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마지막 일격일 것이다.
집채만 한 주먹이 떨어져 내리고 김현성의 검에서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헤어지기 전에 본 붉은 노을 같았던 빛은 어느새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의 어둠을 모두 몰아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우야….’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 속에서 본 것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사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본인 안에 있는 모든 마력과 힘을 집중시킨 이후에 약속된 우정의 검을 휘두르는 장면은 마치 그림 같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빛은 어둠을 밝히는 것으로 모자라 도노반의 몸을 완전히 갈라낸다.
-하아아!!!
-제기이이이이일!!!!
기합 같은 걸 잘 내지르지 않는 녀석이 저항하는 도노반의 마력을 완전히 뚫어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내가, 내가 고작…. 고작 인간 따위에게….
-하아, 하아, 하아….
-미안… 하다. 내 친우…. 죄송… 니다. 벨리알….
-하아, 하아….
27군단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도노반의 충격적인 최후.
같은 곳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재빠르게 튀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1막이 끝났으니, 2막이 시작되어야 한다. 중간 계단을 밟았으니, 최종 장의 끄트머리를 확인해야 한다.
“나갑시다. 로노베 님.”
-네? 설마 지금….
“아뇨. 잠깐 얼굴 좀 비춰주고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숙제가 뭔지는 알려줘야죠.”
-다음 숙제는 뭔가요?
“글쎄요. 대륙이 마지막 희망의 등불을 등에 업고, 하나둘 희망을 되찾을 타이밍이니…. 적당히 물러나고 이후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깐 쉬는 시간도 주고요. 적당히 회포를 풀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아….
“17거점을 지켜냈으니, 다시 한번 기회가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후 들어올 병력과의 최종 결전을 준비하면 된다.
물론 그 싸움은 지금보다는 더 처절할 거라고 잠정 확정되어 있다.
지금 상황에서 왕도라 할 수 있는 클리셰는 타락한 역병군주와 그의 친우인 천재검사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절한 싸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김현성을 상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금 기대하기는 했지만, 방금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각성할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욱더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
천재가 괜히 천재겠는가. 악마 만인장 정도는 갈라 버려야 천재지.
‘몸이라도 좀 만들어야 하나….’
“…….”
‘팔굽혀 펴기라도 좀 해야 돼?’
제대로 한판 뜨기에는 아무래도 스펙이 너무 딸린다.
다른 방법을 천천히 고민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만마의 지배자이신 벨리알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몸을 부딪쳐 보는 게 아름답게 비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검을 나누며 ‘돌아오세요! 기영 씨!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따위의 대사는 타락한 입장에서 한 번쯤 듣고 싶은 대사가 아니던가.
‘뭔 방법이 있겠지, 뭐.’
일단은 멀리서나마 얼굴을 비치는 게 먼저다.
오랜만의 등장에 로노베가 살짝 긴장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 곳에서나마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다.
물론 둠기영이 쓰고 다니던 가면은 옛날 옛적에 장착한 상태다.
아직 전투 중인 전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악마들이 썰물처럼 거점을 빠져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로노베 역시 언제 긴장했냐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찰싹 달라붙어 오고 있었고.
아마 모두 안심하고 있을 것이다.
전투는 끝났다. 인류의 첫 번째 승리로 그렇게 전투는 마무리됐다.
하지만 아마 지금 보이는 모습을 보고 환호할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들이 상대한 것은 겨우 사천왕 중 최약체.
더러운 인간 놈들은 이후 벨리알 님의 선택을 받은 둠기영을 감당해 내야만 한다.
‘그래, 얘들아. 그렇게 강해지는 거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무척이나 먼 거리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선이 쏠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관심은 없지만 제법 흥미로운 척, 어떻게 한낱 인간 따위가 도노반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척했다.
별거 아닐 거라고, 녀석이 방심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최종 보스의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똑바로 내 눈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뭔가 다짐했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고서는 손을 가슴 위에 올리는 모습에는 반드시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꼭 구해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무의식 세계에서 두드려준 가슴을 다시 한번 두드리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녀석은 살짝 입을 벌리기까지 한다.
이윽고 무의식 속에 있던 내가 자신에게 전했던 말을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거리가 멀어 들리지는 않겠지만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
“믿고 있겠습니다.”
‘아, 여기서는 머리 한 번 쥐어 잡아주고요.’
잠깐 내면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이후에는 다시 원상 복귀.
아주 잠깐, 혹시나 하는 얼굴로 기대하는 듯한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 반응에 이쪽은 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재미있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카리스마 진짜 오졌다.’
“사천왕 중 최약체이긴 하다만, 한낱 인간이 도노반을 처리할 줄이야.”
-…….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마지막까지 몰입 오졌다, 진짜.’
완벽에 가까운 마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