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9
회귀자 사용설명서 509화
잠깐의 휴식(2)
-외부고문님, 4거점 철수 완료했어요.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7거점도 철수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그동안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희가 무슨 수고를 했겠습니까. 전부 다 이기영 외부고문님 덕분이 아닙니까. 사실 대륙에서는 인지도가 없어 하급 잡마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인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물론이거니와 괜찮은 실적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모은 실적보다 이번에 한 번 터뜨린 실적이 더 많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니. 이렇게 지옥으로 돌아가기 전에 뭐라도 남길 수 있어 정말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도와주신 게 외부고문님 이고요.
“그렇게까지 띄워주시니 이거 부끄럽습니다.”
-약소합니다만, 이건….
“아.”
-제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러실 필요 없는데….”
-아니, 제 마음입니다. 하하. 넣어두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이런 걸 받으려고 한 일이….”
-에헤이! 외부고문님 넣어두세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큼, 받을 수밖에 없겠지요. 감사합니다.”
입꼬리가 슬슬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
쌓여 있는 재화도 재화였지만, 사실 돌아가는 상황 자체가 더 즐겁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승전 소식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없다.
오늘만 해도 4거점과 7거점이 시나리오대로 철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어제는 13거점과 19거점이 안정적으로 철수했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는 말이 연이어 들려오는 상황이다.
덩실덩실 춤이라고 싶은 심정이었다.
‘확실히.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는 멍청한 아군이라는 옛말이 틀린 게 하나 없어….’
도노반이 죽고 강경파 놈들의 기가 꺾인 이후, 프로젝트 자체가 굉장히 성공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핸들이 고장 난 8t 트럭처럼 성공적인 돌진을 하고 있는 군단의 기세는 내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
현 프로젝트는 확실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동안 이 세상의 위기가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모른다.
내가 봐도 눈에 띄는 몇몇 악마들은 인간들도 놀랄 만한 연기력을 선보였고, ‘27군단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시그니처 대사 역시 인간들의 기억 속에 점점 더 확실히 틀어박히고 있었다.
인류로서는 성공적인 전투라고 느껴졌겠지만, 도노반 이후 악마 측에서는 묵직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사실상 사망자가 나올 리가 없다.
시나리오대로 퇴장하거나 역소환을 선택하면 죽을 가능성은 무척 희박했으니까.
악마들은 그저 인류를 위협할 만한 커다란 인상을 남긴 채 시나리오를 진행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을 일도 없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인지도도 끌어올릴 수 있다.
인류의 입장에서는 승리가 맞지만 여러 가지로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본인들을 완전히 궁지로 몰아넣은 악마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머릿속에 가지고 살아가게 될 테니까.
마음 약한 놈들은 어쩌면 전쟁 후유증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가장 덩치가 큰 본대뿐만이 아니다.
커다란 연방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군대.
또 현 상황을 마력 홀로그램으로 지켜보고 있는 인류.
하루에도 절망과 희망을 반복적으로 느끼다 보니 실적이 쌓이는 것은 무척 당연한 순서였다.
27군단 전체의 인지도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다 보니 지휘부에 있는 악마들까지 웃음꽃을 피우게 된 것이 현재 상황.
다시 한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입을 벌리는 악마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인간들이 기뻐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제가 어째서 벨리알 님을 따르려고 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외부고문님.
“하하하, 사실은 만족스럽지 않으실까. 불안했는데 그렇게 느끼고 계시다니 정말로 다행입니다.”
-실적이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지옥으로 돌아가 제대로 정산을 받는다면 이제는 27군단이 아니라 20군단, 아니, 19군단이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이기영 님이 일으키신 반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힘드실 겁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군단의 악마들까지 이번 일을 온건파의 모범 사례로 홍보하고 있을 정도니….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하급 악마와 중급악마들은 2,000년 후에는 꼭 이기영 님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고 있다더군요. 심지어 10위권 안에 있는 군단장님들 역시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전언을 날려오기도 하고요.
“그건….”
-벨리알 님께서 이기영 외부고문님을 너무 아끼시니… 아마 직접 전해 듣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하하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저야 뭐, 이미 27군단의 사람이 아닙니까. 지옥에 계신 다른 군단장님들의 제의야 감사하지만, 아마 어떤 조건이 나오더라도 27군단 여러분들과 함께 일하는 걸 선택했을 겁니다.”
-외부고문님은 역시….
“이렇게 즐겁고 유쾌한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랍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3거점은 조금 어떻습니까.
“오늘 안으로는 무사히 철수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이번 일도 마지막이로군요.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히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외부고문…. 마음 같아서는 계속 여기에 있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도 여러분들께서 계속 남아주시면 너무나도 감사하겠지만, 여러분도 어서 지옥으로 돌아가야지요. 실적이 쌓이는 것도 좋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일터가 아닙니까.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을 처자식과 가족들에게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다.”
-…….
“너무 일에만 집중해도 효율이 떨어지는 법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 몇백 년은 푹 쉬어야지요. 다른 차원의 일도 있고요. 2,000년이 다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소환할 수 있도록 꼭 조치하겠습니다.”
-잊지 못할 겁니다, 외부고문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하….”
-그리고 그… 혹시 작은 부탁을….
“무엇이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사인을 받고 싶습니다. 혹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사인이 뭐가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릴리미리안 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여기 부탁드립니다.
슬쩍 전방을 바라보자 눈앞에 있는 것은 잘 만들어진 것 같은 고풍스러운 소설책.
‘그러고 보니까….’
일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온 이후에는 간간이 개인 시간을 보내는 녀석들이 보이기는 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저 커다란 책을 읽고 다니는 놈들.
사실 악마들이 독서하는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지만, 그런 상황을 겪은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기본적으로는 인간들과 크게 다름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저쪽 동네에도 베스트셀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옥에서 온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하니까… 궁금하기는 하네.’
슬그머니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책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악마어를 배우기 시작한 게 최근이라 제대로 읽히지는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제목은….
[역병군주와 천재검사가 사랑하는 법.]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타이틀이었다.
‘요즘은 뭐 어쩌고 어쩌고가 사랑하는 법이 유행이야?’
현세나 지옥이나 트랜드는 비슷한 모양이다.
천재검사 같은 경우야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클래식한 소재고….
악마들이 사랑하는 법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는 게 웃기기야 하지만, 저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역병군주라는 이쪽의 직업명이 들어가 있는 것도 의아하기는 했지만, 애초 직업명을 알고 있는 건 로노베, 리무르아를 비롯한 일부 만인장들뿐이고….
베스트셀러라는 게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적당히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펜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비슷한 제목의 책을 현세에서도 본 적 있었습니다. 물론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제목이 비슷하니 조금 신기하군요.”
-아, 그….
“네? 알고 계십니까?”
-천연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천연사요?”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말입니다.
‘뭐야, 얘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은 가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저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들이 쓴 책답게 수준이 낮은 게 눈에 보이더군요. 클리셰를 한 번 꼬는 법도 모르는 정석적인 커플링에는 지루함이 다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필력 자체도 최악이고 쓸데없는 감정 표현에 힘을 들이고 있고요. 전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씬은 어째서 그렇게 힘이 없는지.
‘무슨 씬?’
-천재검사가 연금술사를 아낀다는 건 이해합니다만, 폭력성과 가학성이 결여된 작품은 기본적으로 인기를 끌 수가 없어요. 한마디로 말해 자극적이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 책은 쓰레기입니다.
‘무슨 평론가야, 이건….’
-떡밥만 뿌린 채, 회수하는 것도 너무 느리고요. 심지어 그 떡밥도 흥미롭지 않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단언하건대 역천사와 인간들이 쓴 천연사를 비교하는 것은 이 글을 집필하신 작가님께 너무나도 큰 실례입니다.
“아, 죄송합니다. 저… 정말로 죄송합니다.”
-최근 작가님께서 현세에 있는 인간들에게도 이 책을 전파하고 싶어 번역 작업에 힘쓰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멍청하고 아둔한 인간들에게도 좋은 공부가 될 겁니다. 이 좋은 소재로 얼마나 자신들이 형편없는 글을 써오고 있었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겁니다. 그 반응을 보고 싶어서라도 다시 현세로 소환되고 싶…. 아, 제가 너무 말이 길었군요. 조금 흥분하기도 했고요. 죄송합니다. 외부고문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엇 하나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까. 그럼 사인은….”
-아, 타이틀 바로 밑에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릴리마리안에게라고 써주시면….
“네, 알겠습니다.”
-딸아이 선물이라… 너무 감사합니다. 이기영 님.
“괜찮습니다. 하하하. 별것도 아닌 부탁이니까요. 그럼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릴리미리안 님.”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외부고문님. 그럼 이만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다시 만날 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야말로. 지옥에서도 꼭 모니터링하겠습니다. 부디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활짝 미소를 지은 채로 천천히 역소환되는 악마 하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평론에 조금 정신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마지막 대사는 가슴속에 팍하고 틀어박힌다.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해야지…. 그래.’
중간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된 매듭을 짓지 못한다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천연사든 역천사든 둘 다 읽어보지 않아 뭐라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승리하는 쪽은 마무리 이야기를 잘 매듭지은 쪽이 될 것이다.
물론 그건 내 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실적을 올리고 악마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들, 애매하고 힘없는 마무리가 된다면 많은 이들이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크겠지.’
대륙과 지옥 모두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갑작스레 온몸을 짓누른다.
사실 김현성과 몸을 부딪치는 엔딩은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있었던 상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엔딩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기 어렵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타락한 둠기영과 빛현성이 대립하는 장면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제길, 방법을 찾아야겠는데.’
벨리알의 힘을 빌릴 수 있다고 해도 역병군주는 어디까지나 후방에 랭크되어 있는 직군이다.
전방에서 몸을 써줄 만한 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싸우는 것과 악마와 함께 2:1로 싸우는 것은 또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다지 멋진 장면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소환수 설정이라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잠깐 잊고 있었던 소환수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순식간, 지금 당장 연락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곧바로 통신 채널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어? 어? 정신이 들어온 겁니까? 당신…. 지금 도대체 어디에서 뭘…. 몸은 조금 괜찮은 겁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아루기아 님.’
흑암룡, 아니, 흑역룡 디아루기아가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