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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10화 (507/1,590)

# 510

회귀자 사용설명서 510화

린델에서(1)

“당신이라는 인간은 도대체… 도대체! 어디까지 쓰레기인 겁니까!”

처음 만났을 때 반가웠던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자 커다란 노호성을 내지르는 디아루기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웃음기를 쫙 뺀 진지한 표정에 조금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역시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리는 중이지 않은가.

“어허! 이거 아실 만큼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어떤 게 정답인지는 디아루기아 님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일이 저를 위해서 진행되기는 했지만, 대륙을 위해서라는 것 역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륙에 악마를 풀어놓는다는 건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전면에 나서서 돕다니…. 지금 제정신인 겁니까?”

“그렇게 불같이 화내실 사안이 아닙니다. 디아루기아 님.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게 제가 소환한 악마도 아니고, 여기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악마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은 해보고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궤변으로 합리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넌덜머리가 납니다.”

“아니, 정말로 합리화 같은 걸 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애초에 베니고어와 엘룬을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제정신이라면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었겠습니까. 악마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이유도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 무능력한 신들 때문인데, 어째서 제가 나쁜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

“제가 지금 도망자 신세에 처한 베니고어를 도와주고 있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동안의 사건으로 인해 세이브된 열성적인 기도만으로도 벌써 베니고어가 진 빚의 1/3은 갚았을 겁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지금 악마들이 이렇게 적당히 하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진짜….”

“…….”

“정말로 대륙이 멸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현재 다른 강경파 악마들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걸 막고 있는 것도 벨리알 님이고 군단 내 강경파들의 세력을 줄인 것도 벨리알 님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기 완전히 개판 됐을 수도 있었어요. 인간이라는 인간들은 깡그리 죽고, 무능력한 신들이 자리 비운 틈을 타서 악마들이 완전히 대륙을 먹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겁니다.”

“그건….”

“온건파 악마들에게 실적을, 무능력한 신들에게는 신력을, 대륙의 인간들에게는 최소한의 안전과 강해질 기회를 주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서 저를 쓰레기로 매도하세요, 좀…. 제가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대륙을 위해서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셔야 합니다, 디아루기아 님.”

“아무리 그, 그렇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짓입니다. 이런 짓은… 이건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당장 더러운 악마 놈들에게서 벗어난 다음에 인류와 함께 저항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당장 같이 나갑시다. 어디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자고요.”

“아니요. 꼭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나 참… 애초에 대륙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가 누군데. 오히려 디아루기아 님을 비롯한 드래곤들이 해야 할 일을 제가 대신해 주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디아루기아 님은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뭘 얼마나 해주셨다고 저를 이렇게 압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이것보다 합리적인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뭐, 뾰족한 수가 있으면 디아루기아 님이 직접 말씀해 주세요. 괜찮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수용해 볼 테니까.”

“딱히 방법이 있어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포괄적인 관점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이라…. 당신이 해 준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가, 감사를 표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본래 세상의 균형을 수호하려고 하다 보면 윤리적인 부분이나 다른 관점에 의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랍니까. 과정이 조금 깨끗하지 않더라도 결과 자체는 가장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대륙은 평화로울 겁니다. 똘똘이가 살아갈 세상은 정의롭고 평등하며 균등할 거고… 큼, 그러니까 너무 여러 가지 따지면서 촬영장 분위기 흐리지 맙시다.”

“…….”

“자기 자신과 싸운다는 생각으로 들어갑시다. 네?”

“아무리 그래도 여… 역병 드래곤은 조금… 조금 그렇….”

“대륙보다 개인적인 체면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겨우 그 정도 드래곤이었어요?”

“아니, 아닙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다시 한번 기합 팍 넣고 시작합시다. 우리 똘똘이도 마침 수면기라고 하니 절대로 볼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영상이 남지 않습니까.”

“아….”

“아, 알겠습니다. 제대로… 제대로 촬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처절하게 가야되는 겁니다. 처절하게.”

“네….”

나라라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디아루기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잘 구슬릴 수 있겠다, 예상했지만 기존에 생각한 것보다 자연스럽게 넘어온 듯한 느낌.

아마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모양새가 조금 안 좋기는 했지만, 현재 이쪽이 하는 행동이 가장 효율적으로 대륙을 되돌릴 방법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테니까.

그 말 그대로.

‘잘하고 있는데, 뭐.’

악마들을 컨트롤하고 있는 것도 나고, 대륙을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도 이쪽이다.

심지어 베니고어에게 신력까지 밀어주고 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가장 아름다운 상황은 현재 상황이라는 거다.

초반에 뒤집을 수 있을 기회가 있기야 했겠지만, 현재로서는 디아루기아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게 정설.

아마 그녀 역시 이걸 알고 있기에 저 힘든 자리에서 고통스러움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리라.

조금 말을 더듬기는 했지만, 연기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대륙 전체에 방영되기에 충분했다.

-나, 나는… 저항할 것이다. 네놈들이 워, 원하는 대로는 절대로… 절대로….

-볼만하군. 이미 타락한 모습으로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꼴이라니. 대륙의 균형을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제는 대륙의 적이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멍청한 용이여.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내게… 서, 선택받은 인간이여. 그들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친우들이, 당신을 아끼고 당신이 아끼는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아루리아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에게 지지 마세요. 아직 당신이 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디….

-시끄러운 소리는 여전하구나. 네가 알고 있던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야. 네가 그를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너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디아루기아여. 오늘부로 너는 나의 권속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믿고 있습니다.

-…….

-저는 아직도 당신의 영혼에 한 줌 순수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습군.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그 투… 명했던 맑… 은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도중입니다. 분명히요.

-그만. 이제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천천히 손을 들자 위에서 거대한 어둠의 기운이 디아루기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물론 단순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가 제법 볼만하다.

광택으로 빛나던 검은색 비늘은 칙칙하고 썩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총기가 넘치던 눈동자는 그 빛을 잃는다.

그녀의 상징이라고 불리던 거대한 한 쌍의 뿔은 또 어떠한가.

녹슬어 버린 쇳덩이처럼 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금방이라도 썩어버릴 것 같은 구역질 나는 기운이 담겨져 있다.

심지어 입에서는 검녹색의 체액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

누가 봐도 역병 드래곤처럼 보이는 외관이라 할 만했다.

다른 것보다도 일단 비쥬얼적으로 충격적이라 저도 모르게 박수를 보내게 되는 상황.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컷. 키야… 디아루기아 님, 이거 뜻밖에 재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 정도로 잘해주실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이… 정도면 된 겁니까?

“네. 만약에 더 찍고 싶으시다면 더 찍으셔도 되고요. 사실 저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는 했지만, 누가 알겠습니까. 이다음에 더 좋은 신이 나오게 될지.”

-아니요. 마, 만족하신다면 이대로… 마무리,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인간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예의 그 나라 잃은 표정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상황에 불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그럴 만했다. 애초에 성격이 이런 일을 하기에 알맞은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모를 동족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거라고 걱정하는 것 같다.

뭔가 소중한 걸 잃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괜스레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계속 저런 모습이면 어떻게 써먹으라고….’

사실 역병 드래곤의 모습과 어울리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며칠 후에는 김현성과 부딪쳐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다.

전위가 튼튼해야 후위도 뭘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제 슬슬 에베리아 왕국에 있는 벨리알의 기운을 거두라고 해주세요.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간다면 세계수가 다시 한번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당신 말대로 대륙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저로서는 이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어요.”

“아… 그 쪽은 좀….”

“또 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뭐, 딱히 그런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재의 인류가 희망의 등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다고는 하지만, 최근에 털린 거점만 해도 18개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다는 걸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쪽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그 말씀은….”

“악마들이 노리는 장소는 세계수가 있는 엘프의 땅 에베리아. 덕분에 연방 쪽에 있는 병력의 질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라는 설정이 추가로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거점을 빼앗기고 철수한 악마들도 조금은 체면이 서지요.”

“정말로 그 이유 때문입니까?”

“지분이 높은 이유이기는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긴장감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고요. 당하기만 한다면 누가 악마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갈 땐 가더라도 대륙에 커다란 상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 래서 정말로 세계수에 해를 끼치겠다는 겁니까?”

“아무리 제가 쓰레기라도 그건 좀…. 무슨 사탄 같은 생각을 하는 겁니까? 정말 끔찍한 생각을 하시고 계시네요, 진짜.”

“…….”

“상처를 입어야 하는 곳은 린델이에요.”

“린델….”

“네. 아마 이지혜라면 대충은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정보가 적어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만 27군단이 아직 철수하지 않은 거점들을 잘 보시면….”

“뭐가 어떻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잘 보세요. 지금 대륙의 본대가 유지하고 있는 거점. 그러니까 19 거점과 21 거점, 마지막으로 32 거점을 27군단이 다시 빼앗는다고 가정해 보면….”

“린델로 가는 길이 열리는 군요.”

“인류 측에서도 현재 거점을 전부 유지하고 있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27군단이 에베리아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필연적으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병력을 뒤로 뺄 수밖에 없을 테니… 그사이에….”

“거점을 확보하고 곧바로 린델로 들어갈 생각이로군요.”

“네. 최종장은 그 쪽에서 마무리 될 겁니다.”

“그렇다면 시기는….”

“지금부터. 소수의 병력을 제외한 후, 27군단의 전 병력은 린델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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