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
회귀자 사용설명서 512화
린델에서(3)
“결국, 떠나지 않으셨군요. 바젤 교황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오스칼 님 역시 자리를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륙 연합 역시 두려움을 참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신만 살겠다, 몸을 내빼는 지도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죽더라도 교국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과 함께 죽겠어요. 그게 무능력한 지도자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역할입니다.”
조용히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바젤 교황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온갖 근심이 있는 얼굴이 저러할까. 교황청 내에서도 유명한 불같은 성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년 사이에 무척이나 늙어버린 것 같은 모습은 지금의 바젤 교황님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아마 단순히 악마들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이후부터 최근까지 제대로 된 숙면을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유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이 악마에게 붙잡힌 그 순간부터, 대외적인 활동을 제외하고는 기도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셨단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여신상에서는 피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럴수록 바젤 교황은 더욱더 기도에 몰두했다.
몸이 망가질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어 제대로 된 신성 주문 하나를 외우기에도 불안한 몸입니다. 함께 전선에 설 수 없는 것조차 저주스러울 정도인데, 어떻게 살기 위해 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분명히 이겨낼 겁니다.”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하하, 사실은 며칠 전에….”
“네.”
“며칠 전에 파란 길드마스터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파란 길드마스터라면….”
“네. 빛의 검사 말입니다. 믿어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말을 꺼내시더군요.”
“아….”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아직 악마들과 싸우고 있다고, 자신에게 찾아와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말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그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기도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부끄러웠습니다, 오스칼 님.”
“네?”
“참으로 부끄러웠어요.”
“바젤 교황님….”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 말입니다. 이제는 포기하라고, 이제는 틀렸다고, 무너지는 제 마음을 그 젊은 영웅이 눈치챈 것만 같았습니다. 그를 구하지 못하는 베니고어 여신님에 대한 원망을 그 젊은이에게 들킨 것 같았다, 이 말입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은 분명히, 분명히 이겨내실 겁니다.”
“암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명예추기경은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베니고어 여신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그전에….”
“앞에 있는 산부터 넘는 것이 먼저겠지요.”
“예. 저는 믿습니다. 여신님도, 미래와 대륙을 위해 싸워줄 전사들도, 그 누구보다도 내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이기영 명예추기경 역시 믿고 있습니다.”
“저도….”
“…….”
“저도 같은 심정입니다.”
씁쓸한 미소를 애써 삼키고, 조용히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다.
린델이 점점 어둠에 침식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의 광장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이들이 눈에 보였다.
“이번 싸움은 대륙의 명운을 결정짓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바젤 교황님의 말 그대로 이 싸움은 대륙의 명운을 결정짓는 싸움이나 다름없다.
전장에 있는 것은 저들이지만, 저들만 싸우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 마지막 결전의 시작을 기다리는 교국민들 역시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들은 이 자리에 서 있다.
아이를 안은 채로 하늘 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 기도를 드리는 어린 사제님들과 다가오고 있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들.
손을 잡은 연인과 노부를 모시고 있는 청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대륙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이 분명하리라.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사하셔야 합니다, 명예추기경님.’
간절히 손을 모르게 된 것은 당연지사.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베니고어 여신이시여.’
대륙의 무사와 그의 평안을.
그에게 이 시련을 버텨낼 힘을.
언젠가 다시 한번 아리스 시녀님이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그리고.
린델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성스러운 군대가 부디 이 커다란 시련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 * *
-긴장하지 마라, 제군들이여.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노을빛의 검사 역시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결단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대륙에 평화를 가져올 그 순간까지, 절대로, 우리가 잃어버린 빛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후우… 후우….”
쿵. 쿵.
“후우….”
쿵. 쿵.
“괜찮은 건가?”
“네, 괘, 괜찮습니다.”
“지원병인가 보군.”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데… 아니, 그것보다는… 필드를 떠난 지 오래됐었군.”
“네, 은퇴한 지는 조금 됐습니다.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할수록 한계가 느껴지는 터라….”
“하, 굳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뭔가? 강제 징용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 그것보다 자네의 몸은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그 어깨…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
“…….”
“라이오스 출신입니다.”
“그렇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병사를 정확히 확인한 이후에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어색하게 창을 쥐고 있는 이 병사가 어째서 이곳으로 향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이유는 있겠지만, 아마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다른 이들과는 다를 거로 생각했다.
그는 라이오스 출신이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창을 쥔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자신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눈앞에 악마의 군세를 두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발을 내딛는 소리는 린델에 선 연합군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고, 그들이 몰고 오는 어둠은 본능적인 공포심을 유발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이 고장 난 병사를 통해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가 내뱉으려는 이야기는, 다리가 떨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오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아내와 딸을 구해주셨습니다.”
“…….”
“아마 명예추기경님은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니, 저라는 인간이 존재하는지도 모르실 겁니다. 그분께 저는… 목숨을 빚진 수많은 국민 중에 한 사람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날 명예추기경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자신의 몸이 완전히 망가질 정도로 신성력을 뽑아내며 72군주가 떨어뜨린 마력에서 저희를 지켜주신 광경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겁니다.”
“다시 한번 무기를 들기에 합당한 이유로군. 무섭지는… 않은 건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질문이다.
“무섭기는 합니다. 왜 무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용기 있군.”
“용기라기보다는 죄책감일 겁니다. 아마 그날 명예추기경님께서 라이오스를 지켜주시기 위해 무리하지 않으셨더라면,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지나간 일로 자책할 필요는 없네. 그래서 자네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자네뿐만이 아니야.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인간 중에 어디 그분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자네처럼 커다란 일을 겪은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은 이들은 셀 수조차 없을 것이네.”
“예.”
“그분과 함께했던 린델의 3대 길드와 주민들, 대륙에 있는 모든 모험가와 베니고어 여신님을 따르는 신도들까지. 모두가 그분을 구하려고 모여 있네. 그분 역시 싸우고 있는 도중이고…. 노을빛 검사의 꿈에 나타나 대륙을 구원할 힘을 선물했다고 하지 않았나. 나 역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네. 저도 분명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 역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해. 이곳에 모인 이들을 믿으며,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로 생각하며, 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지켜보고 있을 게 틀림없겠지. 현장에 나와 있는 우리가 질 수가 있나. 여기에 있는 이들을 믿고, 함께 싸울 이들을 믿게나.”
위로의 의미로 어깨를 두드리자 조금은 힘을 받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오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단순히 저 병사를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던 만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자네의 마음은 분명히 전해질 것이네.”
“분명히 전해질 거요.”
“아….”
“분명히, 분명히 전해질 거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인형이었다.
그 거대한 몸을 전부 가릴 수 있을 것처럼 만들어진 거대한 방패는, 들고 움직이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패를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져 얼굴을 들자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그때는 저, 정,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는 지원병이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
“내가 한 게 아니요. 우리 형님이 한 거지. 나는 그 자리에 운 좋게 있었을 뿐이라니까. 아무튼, 와줘서 고맙수다. 분명히 형님이 기뻐할 거요, 분명히. 목소리도 분명히 닿을 거요, 분명히.”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는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성벽의 바깥.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굉음을 내지르며 발걸음을 내딛는 이형의 괴물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표정이 구겨졌다.
조용했던 대지가 울리고 귀를 찌르는 함성이 계속해서 들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재 벌어지려는 이 싸움이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알고 있다.
옆에서 창을 쥔 채로 겁먹은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저 지원병처럼 아마 모두가, 아마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거점을 지킨다는 것은 꺼져가는 대륙의 빛을 지킨다는 것과 진배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
저 이형의 괴물들을 상대로 인류가 버텨낼 수 있을까.
교국의 수호용으로서 교국과 함께했던 성스러운 용은 역병에 온몸이 뒤덮인 모습으로 어두운 하늘을 배회하고 있었고, 베니고어의 상징은 타락한 가면을 쓴 채로 자기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륙의 빛이 없는 현 상황에서 우리만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적들이 점점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쓸데없는 생각이 점점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굳건할 것 같은 신앙과 믿음은 무너지고 그 위치에 자리한 것은 공포심과 불안감.
다리는 점점 떨려오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간다.
종국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고 저도 모르게 악에 박치는 소리를 내질렀을 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폭격을 맞은 것이 아니다. 굉음이 들려온 곳은 바로 근처.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조금은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주먹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모습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될 정도였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이!!!”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목이 터지라 전투 준비를 외치는 모습은 여유가 있다기보다는 필사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기를 쥔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 영웅이 외치는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몸 안에 있는 감정을 고양한다.
[전설 등급의 특성 사기의 외침에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합니다.]
“하하하하….”
몸 안에 있는 서린 기운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옆을 바라보자 조용히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길 수 있을 거요.”
그렇게.
인류의 존망을 건 마지막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