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
회귀자 사용설명서 515화
조우(1)
조금 황당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혹여나 디아루기아도 김예리와 같은 과가 아닌지 고민해 봤지만, 얼굴에 드리운 감정은 명백한 부끄러움.
의식하고 있던 게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리라.
선생님을 엄마라고 불러 버린 것 같은 사고에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한마디로 이죽거렸겠지만, 그녀가 앞으로 힘써줘야 하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
지금은 아무 말 없이 지지를 보내주는 게 더 중요하리라.
‘…….’
-그러니까 이건….
‘아니, 별말 안 할 테니까. 준비하세요.’
-네?
‘아마 곧바로 올 거니까 준비하라고요.’
-그 말씀은….
‘주변 정리해요.’
-아, 네.
말보다는 행동.
어느 정도 이쪽의 생각을 알고 있는 디아루기아는 곧바로 주변에 역병의 숨결을 살포하기 시작.
높고 높았던 커다란 건물들, 지금까지의 린델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건물들이 허무하게 쓸려나간다.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이고, 저 레스토랑 맛집이었는데….’
소중한 추억이 깃들었던 장소들이 모조리 허물어진다.
‘저 카페랑 바도 괜찮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아이고, 아까워라….’
린델의 상징 역시.
‘저 동상은 좀 마음에 안 들었었고.’
연도가 꽤 오래된 건물 역시 바스러지고 있다.
‘저건… 복원 작업 하는 데 시간 좀 걸리겠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린델의 1/6이 허물어진 셈이다.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린 린델의 모습에 많은 이가 이쪽을 바라본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일부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녀석들의 얼굴도 대충 이해가 가기는 한다.
광장부터 길드 하우스를 가리지 않고, 전부 쓸려나가고 있는 모습은 몇몇, 특히나 린델 출신의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일 테니까.
내가 살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버린 상황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이들이 누가 있을까.
분통하고 비통할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몇몇 감수성이 풍부한 분들께서는 입술을 깨문 채로 전투에 임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조금 미안한 일이기는 했지만, 나에게도, 이쪽에게도 이번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린델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김현성이 주변 지형을 활용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다.
다람쥐 같은 녀석에게 숨을 곳마저 생기면 싸움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다.
마음의 눈이 있다면 적어도 녀석이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올지는 캐치할 수 있게 되리라.
‘좋아요. 아주 좋고요.’
촉매를 이용해 연금 마법을 펼친다면 내가 몸을 피할 곳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마침 악마들에게 받은 촉매도 널리고 널려 있었으니까.
충분히 좌절할 수 있는 상황에도 아직 인류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조금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지혜 누나가 이쪽과 합을 맞춘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남아 있기도 했고….
아무튼, 외부 병력은 전부 몰려드는 악마들을 방어하기 위해 묶여 있다.
지원 병력도 전부 발이 묶여 있었던 만큼 내부에 들어온 이쪽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보급대나 여유 병력이 역병드래곤 디아루기아와 타락한 둠기영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애초에 그런 여유 병력이 있었다면 디아루기아 특제 역병의 숨결이 도시를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내부에 들어온 적을 거의 프리 롤로 내버려 두고 있다는 건 연합 측에서도 믿고 있는 게 있다는 뜻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 믿고 있는 구석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뻔할 뻔 자.
‘준비.’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벽 쪽, 정확히는 동남쪽으로.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는 마요.’
-저 인간들을 향해 발사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뒈져도 상관없는 놈들만 모아놓은 곳이에요. 언제부터 인간들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러십니까, 진짜. 그리고 제 말 못 들었습니까? 진짜로 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냥 숨만 들이마시고 있으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6시 방향 아래, 방사형으로 내뱉!’
-제길, 이런 거라면 빨리 말을!
‘앞으로 아무 대답 하지 마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판단하라고 할 때까지 판단하지 말고 제 말에만 따릅니다.’
콰드드드드드득!!!
긍정의 뜻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숨결을 내뱉는 디아루기아의 표정에는 아주 약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마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용이라고 한들 사각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심지어 저 정도로 빠른 물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다가 온다면 눈치챌 수 없었다.
아마 이쪽의 눈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캐치할 수도 없었을 것이 분명.
예상했던 대로 폭음과 연기를 뚫고 오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반갑다, 씨바. 현성아!’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돈다.
아쉽게도 아까의 지친 기색은 없다. 오롯이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너무나 굳은 결심을 한 듯한 얼굴에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미안함도 잠시.
거의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것처럼 달려오기 시작한 녀석의 모습에 나 역시 괜스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두드리며 앞으로 일어날 상황과 현재의 정황을 머릿속에 그린다.
힘을 밀집시키는 관통형이 아닌 만큼 김현성의 마력 갑옷을 벗겨낼 수 없었던 것 같았지만, 체력을 소진시키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었어.’
-어떻게….
‘질문하지도 마요. 그럴 여유 없으니까. 지금 곧바로 몸 날려요. 거주 지역에 있는 가장 큰 건물로 이동하면서 제가 찍는 좌표에서 좌표로 선 그어버리시고요.’
-네.
‘할 만한 싸움이야. 충분히 할 만해.’
회귀자 사용설명서도 적을 수 있는 마당에 디아루기아 사용설명서를 적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날다람쥐가 나무에서 나무 사이로 몸을 날리는 것처럼 디아루기아 역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몸을 옮기는 건 날다람쥐처럼 귀엽게 보이지는 않았다.
후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탑이 허물어진 것은 물론 풍압에 의해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들이 사방팔방으로 튀기 시작했으니까.
거기에 김현성의 움직임에 제한을 두기 위해 역병 브레스까지 뿜어댄다.
-크워어어어어어!!
김현성이 어디로 움직일지는 무척이나 뻔했다.
곧바로 손을 튕기자 내가 디아루기아와 함께 이동하며 흩뿌려 놓은 촉매들이 부풀어 오른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용의 뼈와 악마의 뼈로 이루어진 합성물.
김현성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녀석을 한 자리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비주얼 좋고.’
제한적인 범위에만 힘의 사용이 가능했던 이전과는 보이는 모습 자체가 다르다.
폐허가 된 곳을 가득 채운 뼈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 봐도 장관.
악마의 팔인지, 용의 팔인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는 거대한 뼈의 팔이 김현성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 녀석을 붙잡으려 에워싸고 있다.
심지어 저 지역에 하급 스켈레톤까지 박아놨다는 걸 생각하면 몇 초 안에 수준 낮은 던전 하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콰드드드득!
콰지지지지지직!
퍼어어어엉!!
하지만.
뼈의 손바닥은 폐허가 된 린델의 바닥을 두드리거나 허공에 휘둘러진다.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는 하급 스켈레톤 역시 너무나 쉽게 부셔져 버린다.
‘개… 씨바….’
이것 역시 장관이라고 하면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물 크기의 뼈 팔에 둘러싸인 인간 하나가 그 장소를 빠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뭐라 감격하기도 힘든 장면이다.
심지어 저런 팔 수백 개가 녀석을 에워싸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마치 재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뼈의 파도를 두 다리로 서핑하는 것처럼 헤치고 나아간다.
입이 떡 벌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피할 수 없는 것은 막고, 막을 수 없는 것은 부순다.
애초 김현성의 힘에는 부서질 수밖에 없지만, 너무 쉽게 부서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던 한 수가 너무나도 쉽게 파훼 당하는 상황에 나 역시 인상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캐스팅을 외우자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이쪽의 손에 감돈다.
유령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형태의 역병은 천천히 이쪽의 손을 떠나기 시작.
빠르지는 않지만, 은밀하고 눈치채기 힘들 게 느껴지는 기운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이건 이제 의미도 없는데….’
본래대로였다면 이 역병을 뼈의 파도 안에서 고생하고 있을 김현성에게 넣는 것이 맞다.
녀석을 옭아매는 게 확실하게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선택일 테니까.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1차 관문이 뚫리는 바람에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거 큰일 났는데….’
“브레스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곧바로 여기까지 오지 못하게 해요. 최소 거리 100m를 유지한다고 생각합시다. 손톱 같은 거 휘두르지 말고 박치기 같은 것도 금지예요. 무조건 원거리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는 꼬리를 휘두르는 거로 합시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근데… 저걸 상대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당신도 격이 올라갔다고 생각했었지만, 저 인간은….
“지금 생각 중이에요. 첫 번째부터 망했으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다리가 문제네요. 다리가… 저 다리만 조금 막을 수 있어도….”
‘조금 더 아름답고 처절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텐데.’
애초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거니와 카메라라도 붙잡기 힘든 싸움이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관객들이 볼 엔딩은 김현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이쪽의 뚝배기를 쳐버리는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감동은커녕 허무함만이 남을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깐 머리를 감싸 쥔, 그때였다.
“기영 씨!”
녀석이 허겁지겁 소리를 내질러온 것.
‘아… 이거….’
태세 전환에 능한 정신 상태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이 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크아아아아아악!!”
괴롭다는 듯이 머리를 붙잡는 모습에 디아루기아는 이 새끼가 또 무슨 정신병이 돋았는지 의심하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의 반응은 다르다.
“저… 저 현성입니다. 제 목소리가!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아이고, 너무 처절하다, 목소리가… 어구야.’
“기영 씨! 기영 씨!! 거기에 아직 계신 겁니까! 기영 씨! 눈을 뜨세요. 제발! 제발!”
‘어우.’
최근 들어본 목소리 중 제일 처절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꼭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는지 목에 마력까지 넣어가며 목이 터지라 외쳐대고 있었다.
“지금… 지금 구하러 가겠습니다!”
심지어 시선까지 이쪽에 고정하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이 새끼… 또 정신 못 차리네. 이러니까 털렸지, 인마.’
“조금만 거기서 기다리세요. 조금만… 제가 곧 가겠습니다.”
하지만 방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더욱 커다란 괴성을 내지르자 더욱더 초조해진 녀석이 조금 더 텐션을 높인다.
안 그래도 지쳐 있는 상태.
주변을 둘러보고 있지 않은 두 눈.
사고가 일어난다는 건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다.
천부적인 감각으로 뼈의 파도를 헤쳐 나가고 있었지만, 아까 보낸 유령 하나를 캐치하지는 못한 모양.
이윽고.
묘하게 걸음걸이가 불편해진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
유령 하나가 마력 갑옷을 뚫고 침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 진짜 강해진 것 같은데…. 진짜 왜 이렇게 세졌냐.’
튜토리얼 몬스터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던 애송이가 어느새 각성한 회귀자의 다리에 상처를 남기게 된 상황.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는 했지만 뿌듯함은 별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