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회귀자 사용설명서 518화
떠오르는 빛(1)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구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분명히 버텨 내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후대의 인물이 이 싸움에 대해서 묻는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싸움은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 같았지만 처절한 두 사람의 싸움이기도 했다고.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그 어떤 싸움보다 공감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들이 느끼는 아픔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어떻게 생각해도 부족한 표현이었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저 장소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이야기에 나 역시 멍하니 하늘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 아니야….”
아니, 저들은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보잘것없는 신의 피조물이 맞다.
“괴물….”
아니, 그들은 괴물이 아니다. 그들이 가진 힘은 신에 필적할 정도지만 그들은 절대로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래, 분명, 그 어떤 인간보다 인간적일 것이다.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장면에, 베니고어의 이름을 읊조리며 다시금 고개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견습에 불과해 무대에 서지 못한 사제였지만, 신과 함께하는 사제인 만큼, 후대를 위해서라도 저 싸움을 눈에 담아둬야 했으니까.
타락한 성자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마력이 그 팔을 휘두르자 폐허가 된 도시가 다시금 뒤집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빛의 검사의 몸이 튕겨 나가지만, 그는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킨다.
전투에 관해 제대로 모르고 있는 일반인이더라도 아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저 검사의 몸은 한계라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이 이상 몸을 썼다가는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말라고.
-이번에는 반드시….
하지만 검사는 몸을 일으킨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이미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렇게 몸을 일으킨다.
울컥울컥 피를 내뱉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금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 모습은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처절해 보였다.
그 어떤 이의 모습보다 슬퍼 보였으며 많은 짐을 가지고 있는 이처럼 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면서도 검사는 그렇게 검을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조용했던 장내에 다시 한번 침묵이 감돈다.
기도를 드리던 이도,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이제 대륙은 끝났다고 울부짖던 이도, 악마들을 저주하던 이들도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단순히 하늘을 올려다볼 뿐, 다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
당장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도 그렇다. 서로를 견제하던 적과 아군도 거리를 벌린 채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싸움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자신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빛의 검사는 검을 휘두른다.
타락한 성자의 몸은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은 거리를 튕겨 나갔고, 검사는 다시 한번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성자에게 따라붙는다.
마력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들려오는 굉음과 사방으로 튀는 파편들, 두 사람의 싸움에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것은 결코 와닿지 않는다.
제대로 눈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싸움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들이 한계를 맞으면 맞을수록, 그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담을수록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몇십 분, 아니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싸움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일어나는 검사의 온몸이 넝마가 될수록 타락한 성자를 감싸고 있는 이형의 마력 또한 점점 더 힘을 잃는다.
-구할 수 있어.
-그만!
-기다려 주세요.
-더 이상 지껄이지 마라! 쓰레기 같은 인간!
-믿고 있겠습니다.
-…….
-믿고 계신 만큼 믿고 있습니다.
타락한 성자의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검사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에 다시금 마력을 집어넣는다.
검을 쥔 손에서는 계속해서 핏물이 떨어진다. 너덜너덜해진 팔로 다시금,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
그 어떤 성전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어떤 영웅이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더 이상은 이런 모습으로 있기 싫다고 절규한 타락한 성자는 다시 한번 끝을 내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옆쪽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제님.”
“…….”
“명예추기경님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승리하실 겁니다. 분명히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으니까.
“분명히 빛의 검사께서 길을 인도해 주실 겁니다. 명예추기경님이 계셔야 할 곳이 어디인지, 어디가 명예추기경님이 가야 할 곳인지, 인도해 주실 겁니다. 그렇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겁니다.”
“…….”
“명예추기경님이 있어야 할 장소는 저곳이 아닙니다. 악몽과 악의가, 어둠과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항상, 항상 명예추기경님은 저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 대륙에 인간들이 나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진정으로 대륙인들이 걸어야 할 길은 어느 곳인지 항상 아둔한 저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
“잠깐 길을 잃으신 거로 생각합시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이상을, 더 멀리 있는 가치를 쫓다가 잠깐 길을 잃으셨을 뿐입니다.”
“돌아올 수 있으실까요.”
“네, 분명히, 분명히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노을….”
그래.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기 시작하는 붉은 노을빛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네. 빛께서 그분을 다시 이끌어주실 테니까요.”
* * *
“어째서 악마들이….”
“글쎄요. 낸들 알겠습니까. 아마 저들도 지켜보고 싶나 봅니다. 인간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것은 그들이 가장 즐기는 일이니까요.”
“그 말씀은….”
“아마 저 싸움을 지켜보고 싶은 거겠죠. 우리가 믿고 있는 빛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이 더 강대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을 테니….”
“악취미로군요.”
저도 모르게 성벽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찹찹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 전투가 잠깐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미 이번 전투는 이쪽의 손을 떠났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섣부르게 도우려 손을 뻗는다면 분명히 다시 한번 전투가 벌어지게 되리라.
아니, 사실 그것보다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가장 크지.’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여력이 없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리라.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는 붉은 용병의 단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벽에 몸을 기대고 있다.
검은 백조의 길드 마스터인 박연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잘려나간 한쪽 다리를 치료받으며 저 멀리 있는 장소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었다.
명성 높은 파란 길드원들 역시 한 곳에 모여 쓰러지듯 앉아 있었다.
대륙 내에서 손에 꼽는 강자들이 저러할진대 일반 병사들이 어떤 상태일지는 뻔할 뻔 자.
지독했던 전투에 탈진한 병력이 반이 넘는 상황이란다. 잠깐이라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기회로 삼는 게 옳다.
지휘부에서도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분명 이 같은 판단이 섰기 때문이리라.
이미 성벽의 반 이상을 악마들에게 빼앗긴 상황이다. 저 전투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웃기는군.’
마치 투기장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린델을 감싼 성벽의 위에서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을 구경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자신 역시 잔뼈가 굵은 모험가다. 저들의 상태가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보다 더욱더 최악으로 보이는 모습에는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한 녀석이 있었던 모양인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 고작 둘이서 도시를 저렇게 폐허로 만들어 버린 거로 모자라서… 지금까지 저렇게 치고받고 있으니….”
“왜 힘들지 않겠나. 아마 당장에라도 쓰러지고 싶은 게 분명하겠지.”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장담컨대 내가 저 몸 상태였다면 제대로 설 수도 없을 거야. 마력을 전부 사용하고 체력을 조금 소진한 것만으로 이 모양 이 꼴인데… 아마 자네도 다르지 않을 거야.”
“…….”
“격을 벗어난 인간이라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게 아니야. 버티고 있는 거지.”
“…….”
“쓰러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니겠나? 나 같이 자기 목숨만 중요한 멍청한 놈보다는 뭔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함께 싸우고 있는 베니고어의 상징 역시 마찬가지고.”
“…….”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이타적인 행동은 상상하는 것만큼 쉬운 게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어떤가. 우리 내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왜 그 소리가 안 나오나 했다. 멍청한 도박꾼 자식.”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살아 있었구나.’
펍에 함께 다니던 동료들이다. 한 녀석은 린델의 난봉꾼 캐넌, 나머지 한 녀석은 삼류 도박사 조지.
반가움에 슬쩍 손을 들었지만, 이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까지 꼭 그래야겠어?”
“마지막이라면 더욱더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인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도박인데. 그렇다고 해서 패하는 쪽에 거는 건 아니라네, 캐넌. 나는 저 빛의 검사 쪽에 걸지.”
“이유가 따로 있나.”
“삼류 도박쟁이가 무슨 이유가 있겠나. 그냥 감이 팍 하고 온 거지, 뭐.”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조지. 네 감이 구리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글쎄. 한번 두고 보자고. 이번에는 왠지 맞을 것 같단 말이야. 그리고….”
“뭐?”
“이건 어디에 걸어도 이기는 도박이 아닌가. 명예추기경이 이긴다는 쪽에 걸어도 빛의 검사 쪽에 걸어도 어느 쪽이든 이기는 게임인데 내가 질 리가 있나. 콜록.”
‘개소리를….’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기본적으로 멍청한 놈이기는 했지만 가끔씩 저런 소리를 지껄여 줄 때가 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은 기분, 만약 정말로 모든 게 녀석의 말대로 끝나게 된다면 펍으로 데려가 질릴 때까지 술을 먹여주리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일단은 전방을 응시했다.
녀석의 도박이 이번에는 맞아떨어졌는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감이 안 좋은 녀석이기는 했지만….
“하하.”
왠지 모르게 이번에는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참, 타이밍도 귀신 같구만. 누군가가 마련해 준 무대처럼 보이지 않은가.”
눈이 부실 정도로 떠오르고 있는 붉은색의 빛.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