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
회귀자 사용설명서 520화
떠오르는 빛(3)
“정말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애매하다. 15살 먹은 중학생처럼 감정이 극도로 올라온 김현성을 바라보니 내가 다 민망해진다.
깨어난 이후의 첫 대사로 뭐가 제일 적절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기억이 난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아니면 아예 모르겠다고 이야기해야 하나.
만약 기억이 난다는 설정을 잡는다면 죄책감에 얼룩진 눈물 파티를 해야 하는 상황.
물론 어쩔 수 없는 관심종자인 만큼 죄책감의 눈물 파티도 필요했지만, 굳이 이 순간 오열하며 산통을 깰 필요는 없다.
‘3일 뒤에 석고대죄 각이지, 뭐.’
일단은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이게 맞지. 아암, 그렇고말고.’
본격적으로 즙을 뽑아내기 전에 승리의 여운 정도는 느끼는 게 맞지 않겠는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자 어둠이 걷히고 있다.
이미 김현성이 빛을 등지는 모습을 봤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눈에 띈다.
아마 녀석의 마력과 벨리알의 마력이 부딪친 영향일 터. 더없이 기분 좋은 풍경이었다는 것은 두 번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늘 위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빛의 가루는 또 어떠한가. 마치 승리를 축복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 가운데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장에라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눈동자에 오만 감정이 들어가 있다.
할 말을 찾기 이전에 양심이 콕콕 찔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제는 모든 게 전부 끝났다는 듯, 더 이상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맬 필요가 없다는 듯, 천천히 손을 뻗는 모습은 괜스레 심금이 울린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미소 짓는 걸 보면 자신이 현재 어떻게 비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잘생김도 이번만큼은 부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추한 몰골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얼굴 반쪽은 상처가 터져 붓고, 피에 젖은 상태였고 남은 한쪽 눈은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무장 역시 마찬가지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들어맞는 외관.
가까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도 정상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벨리알의 마력에 보호를 받아 겉모습 자체는 멀쩡한 편에 속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쪽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뿌듯해진다. 금이야 옥이야 보좌해 준 보람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이 새끼 이거 빨리 치료해야겠는데….’
“몸은,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 지금….”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지금… 이건….”
“혹시나 다치신 곳이 없는지 확인을….”
‘니 몸이나 챙겨, 이 새끼야.’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이쪽이 무사한지 스캔을 끝낸 이후에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기 시작.
우정의 허그가 필요한 시점인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김현성은 자신의 몸에 묻은 것들이 영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쪽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맞잡은 손에서는 녀석의 감정이 자연스레 전해져 왔다.
‘진짜 너무 자랑스럽다. 시바, 그래야지.’
뿌듯한 게 당연했다. 녀석이 오늘 보여준 신위를 생각하면 더욱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집어넣은 코인은 명백하게 떡상한 코인. 줄 하나는 제대로 잡았다고 느껴졌다.
“오, 오빠, 오빠아….”
‘그래, 우리 하얀이. 너도 수고 많았다. 아이고 오늘따라 얘가 왜 이렇게 이뻐 보여….’
볼이라도 꼬집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에 화염구를 맞고 좋아하는 게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정하얀이 결정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더 중요했다.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만 해도 김현성을 단검으로 찌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실.
하지만 정하얀은 김현성을 믿는다는 선택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굴에 화염구를 박아 넣은 건 아주 작은 발걸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커다란 발걸음이었다.
아직 손이 덜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여파가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나를 눈에 담은 정하얀이 김현성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품에 안겨왔다.
“죄… 끄윽…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끄윽… 끄윽….”
“하얀아, 일단….”
“잘못했어요. 끄윽….”
“아….”
정하얀을 잠깐 때놓기 위해 머리를 부여잡자 걱정스러워 하는 김현성과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제는 함부로 머리를 잡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즐거운 것이 당연하다.
모든 게 다 끝난다. 하지만 김현성의 눈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비치 모양인지, 다시금 입을 열어온다.
“지금 곧바로 성벽 쪽으로 데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얀 씨는 곧바로 기영 씨를 옮겨주세요.”
“…….”
“어째서….”
“아마 저들이 다시금 공격해 들어올 겁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
‘그 몸으로 어딜 싸우려고 그래, 이 양반아. 바깥에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비틀비틀 몸을 움직이면서도 검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는 조금은 질려온다.
‘마음은 이해한다. 진짜 애가 너무 기특하다, 진짜.’
“아, 지금, 큭….”
“갑자기 많은 걸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영 씨. 일단은 대피하는 게 먼저입니다. 그 몸 상태로는….”
“아니, 저보다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 새끼, 이거 이미 마음먹었네.’
마치 죽음을 각오한 것처럼 의연한 얼굴이었지만, 아쉽게도 이후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이쪽의 계산이 대충 들어맞는다면 아마….
화아아아아아아아악!!!
존버하고 있던 베니고어 측에서도 뭔가 액션이 있을 테니까.
빛의 검사가 승리한 덕에 신에 대한 인류의 믿음이 더욱더 확고해진 타이밍.
지금 나타나는 건 포인트를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 역시 이해하고 있으리라.
내가 딱히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커다란 빛이 이쪽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고 그 안에서는 다시금 빛이 쏟아진다.
“베니고어.”
파산한 주제에 신성한 척 등장한 베니고어의 모습은 가관. 이쪽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석상과 비슷한 외관이 눈에 띈다. 온몸이 빛에 휩싸여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녀의 모습은 무척 눈에 잘 들어온다.
거대한 신성력으로 뒤덮인 모습도 마찬가지.
그 멍청하고 어리석었던 베니고어에게 정체불명의 경외심을 느끼게 될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하지 않다.
-벨리알과 27군단의 악마들에게 고하겠습니다.
목소리에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는 것이리라.
준비해도 제대로 준비한 것 같은 모습에 나 역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대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세요. 이 장소는 그대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가 보군.]
‘아이고 벨리알 님. 너무 감사했습니다요.’
[조금 더 머물며 현세를 즐기고는 싶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저 멍청한 년도 신이라고 어떻게 수습하긴 한 모양이야.]
‘이것 참, 너무 아쉽습니다요. 혹여나 시스템이….’
[아마 외부고문이 생각하는 게 맞겠지. 사실은 너도 예상하던 것이 아닌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현세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와 마력이 필요하고, 모든 게 끝나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27군단의 소환을 유지하지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선 것이겠지. 혹시라도 내가 뒤통수를 칠까 염려했던 것이 아니었나.]
‘아이고오, 아이고오! 벨리알 님.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벨리알 님께서 이 아둔한 인간을 꿰뚫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요. 그런 구역질 나는 생각 따위는 감히 한 적도 없습니다.’
[푸하하하핫! 걱정할 필요 없다, 구역질 나는 역겨운 인간. 그게 네 매력이 아닌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이후가 기대되는군. 너 같이 구역질 나는 인간과 함께하는 게 기대돼 참을 수가 없어. 오늘만 해도 군단장들이 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립박수를 치더군. 정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며 감탄을….]
[더, 더러운 소리 집어치워! 벨리알!]
[오랜만이야.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나. 무능력한 베니고어. 벌레 같은 인간들 앞에 서서 체면을 유지하느라 수고가 많아.]
[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절대로 악마들과 함께하지 않을 거야.]
[이미 그에게는 나의 씨앗을 심어놓았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저 인간은 네가 있는 곳보다는 내가 있는 곳이 더 어울리는데.]
[더러운 악마 주제에! 가, 감히 나의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에게….]
얘네 왜 이러냐.
벨리알은 이해가 가지만 갑작스레 등판한 베니고어의 반응은 꽤나 의외다.
분명히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충실한 종이니, 사랑스러운 종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섞어가며 이쪽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거 뺏길까 봐 그러는 거 맞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쪽이 벨리알에게 넘어가는 게 신경이 쓰이기는 모양이다.
저쪽으로 가는 걸 두고 보느니 차라리 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현세로 몸을 드러낸 와중에도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이 내게 무척이나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
몸은 하난데 양쪽에서 나를 데려가고 싶단다.
‘인기인은 괴롭네.’
같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이것 역시 이후에 대화를 나누며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
모든 시스템이 정상화된 지금, 벨리알과 마찬가지로 베니고어가 현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예상했던 대로 그 둘은 나라는 통로를 이용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지는 게 당연하겠지.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지 않나, 베니고어.]
[뭐? 네가 감히!]
[지금은 네 사랑스러운 신도이자 내가 점찍어놓은 역겨운 인간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논해야 할 시간이라는 거다, 무능력한 베니고어여.]
[그건….]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무슨 소리야. 어차피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너 역시 마찬가지야. 꼭 물러나 주겠다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
[평화로운 수단으로 물러나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거다. 더 이상의 현세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던가. 알타누스의 의지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대륙이 정상으로 들어왔다고 한들, 아직 내가 자리해 있는 곳이 이 장소라는 건 변하지 않아.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대륙에 다시 한번 피해를 주는 것은 일도 아니야.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일터가 망가지기 싫은 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해 먹었으면 돌아갈 때도 됐잖아?]
[72군단장의 일인으로서 체면이 있는 법이다. 네가 강림했는데도 아무것도 얻어가는 게 없다면 내 자식들에게도 체면이 서지 않지. 너도 한 몫 챙길 수 있도록 확실하게 서비스해 줄 테니. 이만 마무리하는 것으로 하지. 시간이 없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 생각할 시간은 10초다.]
[우리는 절대로 악마 따위와 협상하지 않아, 벨리알.]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중재안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
[들어 보도록 하지, 외부고문]
[사랑스럽고 소중한 나의 이, 이기영 신도! 그대의 청이라면 당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