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521화 (1,012/1,590)

# 521

회귀자 사용설명서 521화

떠오르는 빛(4)

‘이제 막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온 타이밍이지 않습니까, 베니고어 님. 벨리알 님과 협상하기 싫다는 그 고결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때로는 이상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

[…….]

‘만약 벨리알 님이 다시 대륙의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 벌려놓는다면 그 틈새로 나타날 악마는 벨리알 님 같지 않으실 겁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아주 잘 알고 있고요. 이제 막 신성을 회복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강림하는데 많은 신력을 사용하셨는데, 이후의 일까지 수습하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그때도 강경파 악마들이 소환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나, 나의 사랑스러운 신도… 하지만….]

‘벨리알 님도 자신의 군단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은 제가 잘 마무리하려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베니고어 님이 현 타이밍에 강림해 주신 것이 조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소중한 이기영 명예추기경?]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베니고어 님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 주셨으니 벨리알 님의 입장이 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이대로 빛에 밀려 악마들이 사라지는 결과가 나온다면 군단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습니다. ‘베니고어에게 꼬리를 내리고 도망갔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멍청한 베니고어. 군단의 자식들뿐만이 아니야. 얼마나 많은 악마가 실적을 소모하면서 이 대륙을 지켜보고 있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군. 몇몇을 제외한 72군단장 전원이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대로 물러가는 그림을 보여주기에는 내 체면이 서지 않아.]

괜찮은 연계. 오지는 티키타카.

‘미천한 필멸자에 불과한 제가 위쪽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다른 분들 역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일의 크기를 키운다면 이 모습을 보고 있을 다른 분들이 베니고어 님을 질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그럼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것은 이후 이 대륙에 다시 한번 발을 들이는 것이다.]

[뭐? 그딴 걸 내가 허락할 것 같아? 그건 불가한 이야기야!]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 무능력한 베니고어.]

[역시 악마들 따위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 더러운 속내를 누가 모를 줄 알아?!]

‘베니고어 님. 이건 나쁜 조건이 아닙니다.’

[뭐? 이기영 신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어차피 27군단은 현재의 대륙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틀어막는다고 해도 악마는 소환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만약 벨리알 님이 한 번 더 이 장소에 발을 들이게 된다면 베니고어 님께서 컨트롤하실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게 하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건….]

‘네. 현세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올지, 대략적인 시기와 피해 규모는 어떻게 되는지, 군단은 함께 오는 것이 맞는지 같은 세부적인 계약 사항을 베니고어 님께서 조정해 주시면 됩니다.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현 상황과는 다릅니다. 아마 벨리알 님께서도 무리한 계획은 세우지 않으실 겁니다. 혹시나 이번 패배로 인해 대륙의 인간들이 27군단을 잊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라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이번이 기회입니다. 베니고어 님. 이제야 막 일어서신 타이밍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도망자 생활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채워 넣어야지요.’

[…….]

‘지금 이 장소에서 위대한 신의 기적을 선보여 벨리알 님을 몰아내는 그림을 신도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강림으로 소모한 신력의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하늘을 치솟을 만큼 그 위상이 높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조금 불안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혹여나 실수라도 한 번 하면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이번 기회에 재기하십시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그 많은 신력을 소모하면서까지 내려온 만큼 너 역시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러니 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대륙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상의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곳에서 물러난다면 강경파 악마들과 척질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설 자리가 축소된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 만약 내 입지가 좁아진다면….]

‘이 대륙으로 강경파 악마들이 몰려들지도 모릅니다. 그 이후로는 저 역시 감내해 낼 자신이 없습니다, 베니고어 님.’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베니고어. 그나마 군단장 중에서는 내가 가장 합리적인 이라는 걸 말이야. 리리스 같은 미친년이나 맘몬 같은 쓰레기 같은 놈들이 이곳에 오는 걸 바라고 있지 않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벨리알 님처럼 합리적인 악마는 또 드물 겁니다. 아암,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하, 하지만….]

‘제가 공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시지요.’

[뭐… 뭣?!]

‘그게 맞습니다. 베니고어 님.’

[흐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굳이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는 없다만, 확실한 쪽이 네게도 더 안심되지 않겠는가.]

‘물론 계약 내용 자체에서는 벨리알 님께서 많이 양보해 주셔야 할 겁니다.’

신과 직접 계약한 악마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아마 벨리알은 계약서만 쓸 수 있다면 계약 내용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소소한 이득을 챙기고야 싶겠지만, 너무 본인의 욕심대로 밀고 나가다간 계약 자체가 파기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베니고어는 여전히 모든 게 의뭉스러운 모양.

사실… 베니고어에게도 이 조건은 나쁜 게 아니다.

벨리알이야 고객에게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악마였으니 베니고어가 앞으로 일으킬 기적에 최선을 다해 호응해 줄 것이다.

막대한 신력을 소모하며 녀석과 치고받으며 다시금 파산상태로 진입하는 것보다는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여 인류에게 신앙을 받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이다.

[계약서까지 작성한다면 추가 조건을 넣어야겠어. 나 자신의 안전을 위해기도 하지만 그게 곧 네 실적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사은품이라고 생각해, 벨리알.]

[적당한 것이라면 넣어주도록 하지.]

[그, 그렇다면 더 이상 내 사랑스러운 신도를 건드리지 않는….]

[불가. 사은품으로 내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소리와 진배없는 말이다. 생각보다 더 영악하군.]

[만약 더 이상 내 신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내용을 계약서에 적는다면 앞으로 2,000년 동안 5번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조치해 주겠어. 추가로 네가 넘긴 역병군주 직업도 다시 회수해. 이 정도라면 벨리알, 너도 만족스럽지 않겠어?]

[터무니없는 개소리다. 영악한 년! 무능력한 줄로만 알고 있었건만 생각보다 속이 더 검군.]

[그렇다면 계약은 없어.]

[바라던 바다, 무능력한 베니고어. 다시 한번 도망자 신세로 만들어주지.]

[내 사랑스러운 신도 역시 내 곁에서 함께 싸울 거야.]

[그 역겨운 인간은 네가 아니라 나와 함께할 것이다.]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나와 함께할 거지? 응? 그럴 거지? 내가 앞으로 잘할게… 진짜 잘해줄게… 그러니까 이리 와서 함께 저 악마들을 처단하자.]

[구역질 나는 인간이여. 네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위에 있는 더러운 년들에게 대화를 거부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함께 보여주도록 하지.]

니네 왜 이래. 제발 이러지 마.

갑자기 이 자리에서 신마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갑작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조금은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나고 쉴 수 있다고 생각한 타이밍이다. 다시 한번 이 전쟁터에 몸을 담그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양해야 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타격을 입는다면 인류도 회복 불능, 현성이도 회복 불능. 모든 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다면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두 분께서 제 생 이후의 거취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앞으로 2,000년 후를 기다리고 있다. 저쪽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아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역겨운 인간 너를 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구역질 나는 영혼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지.]

그것보다는 왠지 뺏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있는 것 같았다. 하늘 위에서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다른 곳으로 이적시키느니 차라리 품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베니고어 역시 누군가로부터 언질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이 마찰을 원활하게 풀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 모두가 만족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베니고어 님 측에 우선 영입 기회를 드리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

[…….]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우, 우선 영입?]

‘네. 우선 영입 기회입니다.’

[혹, 혹시 이쪽으로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나의 사랑스러운….]

‘당연히 베니고어 님과 함께하고 싶지만, 앞으로 평생 몸담을 곳인 만큼 조금은 신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건이 어느 정도인지도 따져 봐야 하고… 여러 가지로 고려해 볼 사항들이 많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베니고어 님. 조건만 맞는다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재안으로 우선 영입권을 제시한 겁니다. 베니고어 님뿐만이 아니라 베니고어 님과 함께 일하시는 윗분들과도 이야기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기영 신도는 역시 눈치가 빠르네.]

‘언질을 받으셨을 줄 알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계약은 진행되는 겁니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네.’

[역시나 잠깐은 더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빛에 몸을 담은 자로서 악마와 계약한다는 선택지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또 자기 자신의 신념도 일부 던져야 했으니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별것 아닌 일이지만 아마 그녀에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민.

순식간에 무의식 세계가 만들어지고 계약서를 들고 있는 벨리알이 시야에 비친다.

베니고어 역시 책상 위에 앉아 울먹이는 모습. 여기에 정말로 자신이 도장을 찍는 게 맞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얘네가 초월적인 존재라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공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베니고어의 울먹이는 얼굴은 초월적인 존재도 뭣도 아니다.

마치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처럼 힐끔힐끔 이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

‘믿으세요, 베니고어 님. 파산 위기도 같이 잘 헤쳐 나가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얻는 게 더 클 겁니다.’

[시간이 없다. 빠르게 결정하라.]

[이기영 신도오…. 히끅.]

‘도장 찍으시지요.’

[싫다면 회수하도록 하지.]

‘오늘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구역질 나는 인간의 말이 맞다.]

‘도장 찍으세요.’

[히끅… 히끅….]

바들바들 떨리는 손. 초월적인 존재에게는 무례한 짓일 수도 있겠지만, 슬그머니 손을 잡자 떨림이 멎는 것이 느껴진다.

‘저를 믿고 도장 찍으세요.’

[계약을 진행하기 싫은 모양이군.]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뿐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히끅….]

‘자. 어서 빨리!’

[계약을….]

‘도장 찍어요! 베니고어 님!’

[나… 나 역시… 이건 안 될 것 같….]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빨리 도장 찍으라고요!’

[끄으윽….]

‘하나, 둘, 셋 하면 찍는 겁니다. 하나.’

[둘.]

‘셋!’

다시금 손을 바들바들 떨며 손을 가져다 대는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순간, 눈앞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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