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
회귀자 사용설명서 522화
떠오르는 빛(5)
“정신이 드십니까?”
“끄응….”
“기영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아….”
천천히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 세계로 빨려 들어간 이후, 현실에서도 잠깐 정신을 잃고 있었나 보다.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혼자 악마들을 막는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접어둔 것 같았다.
말인즉슨….
‘계약이 제대로 마무리됐나 보네.’
그게 아니라면 녀석이 길드원들과 함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다시 한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오랜만에 보는 듯한 반가운 얼굴들이 곳곳에 보이기 시작했다.
위치는 격전이 펼쳐졌었던 성벽의 위. 아니나 다를까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형님, 괜찮은 거요? 정말로 괜찮은 거 맞는 거요?”
“…….”
“형님, 내 말 들리쇼? 형씨 말에 답 좀 해보라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거요?”
“그래, 괜찮다, 덕구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거,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쇼. 저, 정신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고 합디다. 거, 엘레나 님! 형님이 깨어났다니까. 형님이! 빨리 이리로 와서 상태 좀 봐주쇼! 빨리이!”
“이기영 님!”
틀림없이 박덕구가 엘레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건만 이쪽으로 몸을 날린 것은 뜻밖의 선희영.
‘뭐야. 얘는 또 왜 이래. 원래 이런 포지션 아니었잖아.’
은근히 티를 내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렇게까지 달라붙어 오지 않았다.
항상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는 포지션에 있던 그녀가 다른 길드원들을 밀치면서까지 안겨 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상황.
아마 그만큼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겠지만,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평소 행동과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상이라도 치른 것처럼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모습은 무척 초라하게 보인다.
얼마나 서러워 보였는지 내가 다 민망할 정도.
얼굴이 엉망이 된 것은 물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는 모습은 세상 모든 걱정과 불안감을 가진 이의 얼굴처럼 보였다.
“허어어어어엉….”
“…….”
“흐어어어어어엉….”
물론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아영과 김창렬, 안기모, 김예리.
내 친구 조혜진과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 카스가노 유노와 엘레나까지 자리한 모습에 약간의 뿌듯함이 밀려 들어왔다.
물론 김현성과 정하얀, 박덕구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아직 눈치를 보는 정하얀의 표정은 아직도 불안해 보였고, 박덕구는 또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부어 올라있었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고 있었다는 것.
아직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들이 아끼는 부길드마스터를 되찾았다는 안도감은 이들에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다, 다행…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
“어떻게, 형님은 괜찮은 거요? 희영 누님. 형님은….”
“몸, 몸은… 크게 이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머리에도 크게 이상이 없으신 것 같고. 단기적인 기억상실이 있으신 것 같기는 한데, 이대로 휴식을 잘 취하신다면 본래의 상태로 금방 회복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엘레나 님이 보기에는 조금….”
“다행히 그들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기억상실이라니. 그리고 지금 여기가….”
“…….”
“…….”
이쪽의 한마디에 서로를 쳐다보는 파란 길드원들의 표정은 가관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아마 나였어도 저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아… 그러니까 부길드마스터가 악마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타락해 린델이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악마도 이런 악마도 없었다니까. 길드마스터 상처 보이십니까? 그거 전부 부길드마스터 작품이니 자랑스러워 하셔도 됩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드원들의 얼굴에는 수만 가지 표정이 떠오른다.
서로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이쪽의 시선을 피하기도 한다.
심지어 박덕구는 김현성과 함께 한 발자국 물러난 위치에서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시다.
“어떻게 할 거요? 아무래도 말하는 게….”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드실 겁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알게 될 일 아니요. 먼저 맞는 매가 그래도 덜 아프다고 차라리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게 나을 거요. 형님 성격에 본인이 먼저 깨닫는 날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니까.”
“하지만….”
‘다 들린다, 덕구야.’
정신이 몽롱한 척,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하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이후의 일도 생각해 봐야 하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교국이나 다른 길드에서 우리 형님을 걸고넘어질 수도 있을 거요. 그런 상황은….”
“제가 두고 보지 않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만약 상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거요?”
“교국을 벗어나야겠죠.”
아마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을 확률이 높다.
바젤 교황이 이쪽을 적대한다는 것은 김예리가 연기를 싫어한다는 것보다 더 설득력이 없는 발언이다.
베니고어까지 지지를 보내고 있을 테니 영웅이면 영웅으로 추대받았지 대륙 공적으로 몰리지는 않으리라.
거참 여러 가지 상상을 하는 게 귀엽게 느껴진다.
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머지 길드원들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최대한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라도 내가 진실을 알아차릴까 무서워하는 얼굴을 보니 제대로 해냈다는 생각도 든다.
김현성과 박덕구의 작은 회의가 마무리된 것도 딱 그즈음.
일단은 김현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는지 모두가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눈에 보였다.
괜스레 긴장된 장내,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현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영 씨.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몸을 회복시키는 게 먼저입니다. 이후에 천천히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말에 따라주세요.”
“아, 네.”
내 멘탈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쪽의 멘탈은 약하지 않다.
일단 회피하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만, 숨기면 숨길수록 마음고생하는 것은 녀석 쪽.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기억을 되찾는 게 좋겠다고 여겨졌다.
알겠다는 듯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이 파티원들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저들의 뒤쪽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베니고어 님께서….”
“이것 역시 이후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괴수 대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빛이 너를 태울 것이다.
-해볼 테면 해보라. 더러운 빛의 탕녀여!
거대하게 모습을 드러낸 벨리알과 그런 벨리알을 막아내고 있는 베니고어.
형형색색의 빛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어둠의 기운이 계속해서 부딪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베니고어 님께서는 상처받은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본인의 힘을 분배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베니고어에 대한 기도와 감사를 담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상처받은 대륙의 피조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성스럽고, 고귀하게 느껴졌다.
벨리알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라이오스 때보다 더욱더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는 압도적인 공포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와… 쟤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본다면 정말로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리라.
‘이거 모르고 보면 진짜인 줄 알겠네, 진짜. 와… 이놈이나 저놈이나 쓰레기 같기는 마찬가지네, 진짜.’
당장에라도 대륙을 파괴할 것처럼 떠들어댔던 벨리알은 자신의 고객님께 충실한 상황.
눈물을 훔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던 베니고어도 나름대로 열연을 펼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기도 그리고 몇몇 인간들이 느끼는 공포심으로 인해 두 초월적 존재에게는 계속해서 실적이 쌓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벨리알은 지옥으로 돌아가야 했고, 베니고어도 더 이상 현세에 머무를 수가 없었으니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베니고어가 성스러운 창을 벨리알의 심장에 꽂아 넣었고
-이, 이 내가… 당하다니….
-돌아가세요, 벨리알. 더 이상 이 대륙을 당신들의 뜻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기억해라, 더러운 빛의 탕녀와 그녀를 따르는 필멸자들이여. 이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오늘의 승리가 너희들의 승리가 아님을 기억하라.
-이 대륙은 제가 지켜 나갈 것입니다.
-기억하라! 벌레 같은 인간 놈들! 나는 어둠이며, 공포이자 너희들의 악몽… 이니라….
‘벨리알 연기는 역시나 수준이 다르다, 진짜. 키야… 어떻게 저런 대사를 치는 데도 몰입이 될 수가 있냐.’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군.]
‘아이고, 벨리알 님.’
[아까도 작별 인사를 했다만, 이만 헤어질 시간이다.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아. 언젠가 다른 방법으로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하지.]
‘부디 뜻대로 하시옵소서.’
[즐거웠다, 구역질 나는 인간, 아니, 우리 27군단의 외부고문. 또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저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빨리 사라져, 벨리알.]
[너무 말이 거친 것이 아닌가, 베니고어. 이제는 파트너가 아닌가.]
[누가 너 따위랑!]
[어떻게 생각하든 네 마음이지만 방금 일어난 일은 변하지 않아. 즐거웠다, 베니고어.]
[다시는 오지 마.]
어둠이 걷히고 이형의 괴물들은 본래 본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빛이 다시 한번 밝게 터지고 베니고어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그 자취를 감췄다.
-그대들은 강합니다. 포기하지도 쓰러지지도 마세요. 지금의 아픔은 언젠가 그대들에게 커다란 힘과 재산이 될 것이며 그대들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말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모두가 껴안거나 환호성을 지르며 빛의 승리에 취한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비비는 녀석도 있었고, 풀썩 주저앉으며 허탈한 미소를 보이는 녀석도 눈에 비친다.
나 역시 미소를 보내고 싶었지만,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설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을 대중들에게 내비친다.
지금부터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게 좋을지 고민되기는 마찬가지.
일단은 진실을 깨닫고 대국민 사과와 함께 즙을 뽑아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여기가… 린델… 이걸… 제가?’
따위의 쓰레기 같은 대사를 날리며 울부짖는 연기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획은 많지만 지금 당장은 잠이나 자도록 하자. 안 그래도 밤새도록 깨어 있느라 힘들었으니까.
“형님, 형님! 정신… 정신 차리쇼!”
“기영 씨… 괜찮으신 겁….”
“오빠아… 끄윽… 오빠아!!”
“…….”
“…….”
“…….”
점점 희미해지는 목소리.
이후 눈을 떴을 때.
창문 하나 없는 방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