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
회귀자 사용설명서 525화
반 감금(3)
‘그럼 도대체 언제 되는 건데….’
단호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호했던 표정과 말투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딱 끊어 말하는 건 내가 알고 있던 김현성답지 않았다.
내 안전에 집착해 주는 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냥 기억났다고 말하는 게 좋을까.’
적당한 타이밍에 입을 여는 게 오히려 더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말해도 문제야.’
충격받고 실신하며, 눈물을 흩뿌리는 연기에 들어갔을 때 녀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는 리액션을 보여줬을 때, 이 새끼가 진실에 마주하도록 내 등을 떠밀 수 있을까.
오히려 더욱더 꽁꽁 싸고돌 확률이 높지 않을까?
더욱더 강력한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시 모를 날파리들이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하고 심문해야 한다고 외치는 녀석들 말이다.
물론 많지는 않겠지만, 아예 없다고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베니고어의 상징이었다고는 한들 한 번 악마에게 넘어가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최소한 교국 내에서는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지 않겠지만, 외부에서는 충분히 나올 법한 소리다.
김현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떠오르고 있는 현재의 린델이라면 아마 조금 더 많은 견제를 받고 있지 않을까.
같은 당내에서도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싸우는 게 현대의 정치판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연방이라는 파이를 나눠 먹어야 하는 권력자들의 입장상, 아무리 파란이라도 정치적인 견제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인류가 한뜻으로 힘을 모으자고 단결했어도 국가와 집단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거다.
‘그게 인간이니까.’
조금만 고민해도 파란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가장 적합한 것이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김현성이 이쪽을 싸고도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부의 잡음이 들려오는 상황에 나를 밀어 넣는 건 내게 좋지 않을 거라고 느끼는 것이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나?’
그럴 리가 없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적극적이고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못할 테니까.
갈등이 존재한다고 한들, 아주 스케일이 작은 갈등일 것이 분명하다.
‘궁금해서 미치겠네, 진짜.’
현재 바깥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피해 복구 작업은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대륙 합동 훈련은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베니고어가 등판했으니 모든 대륙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건 당연한 거고….
닫혀 있었던 던전과 네임드 몬스터들이 활성화되는 것은 물론 소소한 변화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신력을 꽤 벌었을 테니 대륙에 새로운 던전과 콘텐츠들을 등록했을 수도 있다.
베니고어 2.0 패치가 시작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여기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기에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매일 매일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내게 오는 정보들이 모조리 차단되어 버렸으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현 상황에서 단 하나뿐인 아군인 이지혜와 만남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것 역시 그런 연유 때문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그랬어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다니까. 그거 조금 적당히만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갔을 텐데… 괜히 연출에 힘주고, 상황에 힘주고, 연기에 힘주고… 그러니까 한 방에 훅 가는 거 아니에요. 조강지처 버린 것도 그래. 참나, 어떻게 그 지경이 되도록 연락 한 통도 없었어요?”
“…….”
“내 꿈에도 나타나 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미안해, 누나. 충분히 반성하고 있어.”
“사과 듣고 싶어서 칭얼거린 것 아니에요, 오빠. 질투한 것도 아니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 마음고생 조오금 했었거든요.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 난 이후에는 즐거워졌지만. 큼큼, 그래서 궁금한 게 뭐예요?”
“바깥 상황이 조금 어떤지, 기왕이면 자세하게 정보 좀….”
“…….”
“…….”
“그거 아쉽게 됐네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금제가 걸려 있거든요.”
“…….”
“…….”
“제 혓바닥 좀 보세요. 기본적으로 오빠 면회 오려면 외부인들은 이걸 박아야 한대요. 예외는 없어요. 그나마 오빠랑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이 돼서 이 정도지, 조금 애매한 사람은 심사가 더 까다로울 걸요. 아, 추가로 말씀드리면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빠가 질문하고 제가 답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어요.”
“뭐 그런 것까지 해?”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고 싶다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이 이야기하다 보면 말실수도 할 수 있으니까. 미리 예방하자는 차원인 거겠죠. 물론 조금 빡세기는 했어요.”
“…….”
“서류로 미리 정리해서 가져오려고 했었는데 몸수색까지 한다고 하지 뭐예요? 쌍검의 박리안인가 하는 계집애가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곳저곳 수색하는데 조금 불쾌했다니까.”
“정확히 무슨 금제가 걸려 있는데?”
“특정 단어를 사용하는 건 금지, 글로 쓰는 것도 금지. 위험하거나 트리거가 될 수 있는 물품을 가지고 가는 것도 금지. 지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신간이 나왔고,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 없어요. 근데 있잖아요.”
“응?”
“솔직히 이해는 돼요.”
“뭘….”
“생각해 봐요. 반 시체가 돼서 죽을 뻔한 사람이 깨어난 지 2주 만에 활동하고 싶다고 하는데 누가 납득할 수 있겠어요. 의사의 고견으로도 반년 정도는 푹 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걸요. 물론 이런 방식은 아니겠지만. 이 건은 멘탈적인 부분도 걱정돼서 주의를 기울이는 거로 보여요.”
“아무리 그래도.”
“더군다나 트라우마까지 더해지면 이렇게 감금보호 조치하려는 것도…. 고깃덩이 영상이랑 촉수 영상 그리고 타락까지. 눈에 안 띄면 불안하고 무섭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이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할 걸요. 오빠를 그렇게 아끼는 파란 길드마스터인데… 어련하겠어요.”
“…….”
“누가, 누구 멘탈 걱정을 하는 건지. 이렇게 쓰레기 같은 사람도 드문데….”
‘네가 할 말은 아니야.’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오빠 때문에 매번 안심해요. 그래도 나는 아직 덜 썩었구나… 같은 생각하면서 자위도 하고 그런다니까요. 이번에는 특히 더 많이 했고… 아무튼 간에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 하나예요.”
“뭐?”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마 거의 다 들어맞을 거예요. 대처도 나름 잘하고 있고요. 자세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기는 한데 이 부분은 금제가 걸린 게 많아서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네요. 그것보다 우리 오랜만에 섹! 아, 정하얀 얘는 쓸데없는 것까지 걸어놨네….”
“뭐?”
“19금 단어는 모조리 금제가 걸려 있네요. 이런 건 서약서에 없었는데, 얘 변한 거 맞기는 해요?”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지. 예전과 비교하면, 뭐. 그래도 사소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봐.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게 아니니까.”
“아무튼, 파란 길드 마스터보다 얘가 더 문제라니까. 지가 제일 즐기고 있을걸, 아마.”
그건 동의할 수 있다.
사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에 한 번 들른 차희라도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고, 길드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갇힌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일단은 린델이 복구되거나 날파리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나갈 방법 자체가 없었으니까.
필살기라고 생각했던 ‘너는 내가 왜 화 난지 모르겠어?’조차 통하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김현성은 단단했다.
이미 본인 나름대로 정신 무장을 마친 것이다.
‘시벌….’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고 생각했던 이지혜조차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
물론 내가 예상하는 게 대부분 맞을 거라는 말은 들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현장과 실무의 분위기는 다른 법이 아닌가.
영혼의 동반자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지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다시 한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왔다.
“그래도 오빠 새장 속에 갇힌 새 같네요. 왠지 조금 섹… 아… 정말? 이것도 금지라고?”
“…….”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네. 제길, 그냥 식사나 하죠, 우리. 슬슬 배고픈데.”
“오늘은 안 먹을 거야.”
“네?”
“단식투쟁. 입맛이 없다고 버티는 중이거든. 아마 며칠 내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어.”
“고전적이네요. 지금 이렇게 된 지 며칠이나 지났죠?”
“한 20일?”
“꽤 기네요. 그래도 할 건 다 하잖아요.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저기 장식장에 있는 명품들 좀 봐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놀이 생각나지 않아요?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1년 동안 갇혀 있는 대신 1억 받기, 이런 거 있잖아요. 뭐, 그런 거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적당히 즐길 것도 많고… 조금은 여유를 즐길 줄도 알아야죠.”
“여유는 개뿔….”
“나는 오빠가 이렇게 나를 가둬줬으면 좋겠는데. 기왕이면 다른 모습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누나.”
“정말이라니까요, 오빠. 어, 이거 금제 안 걸려 있네요. 얘는 정작 중요한 건 안 걸고, 이상한 걸 걸어놨네. 하긴 저도 오빠랑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네요. 잘됐다.”
“…….”
“지금도 그 다른 모습 할 수 있어요?”
“가능해.”
“정말요? 한번 보여줄 수 있어요?”
눈에 띄게 흥분한 것 같은 모습, 평소의 이지혜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금까지 가까이서 그녀를 봐왔지만, 내가 본 이지혜의 모습 중 가장 흥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해 봤지만 보여줘도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있는 만큼 순순히 직업 전환을 시전하자 몸에 변화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미쳤다, 진짜. 미쳤어. 가면은 없어요? 저번에 깨졌나?”
“다시 복구되긴 했어.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자체복구가 되고… 소환 역소환도 가능한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라. 추가로 다른 사람이 벗기려고 하면 벗겨지지도 않아.”
“아이템 설명은 됐고. 가면도 빨리, 빨리요.”
“갑자기 왜….”
“진짜. 와, 분위기가 다르네요. 진짜로… 확실히 달라… 진짜. 너무 섹…. 하다, 진짜. 카메라를 가져왔어야 됐는데. 그것도 못 가져오게 되어 있어서… 이건 파란 길드원들도 알아요?”
“당연히 모르지. 이걸 어떻게 이야기하겠어, 누나.”
“전투 능력은 써먹을 수 있어요?”
“물론, 하지만 저번처럼은 불가능해. 벨리알이 직접 현세로 내려와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압도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마력을 전해 받을 수는 있거든. 사실 지난 2주 동안 심심해서 실험해 본 게 몇 가지 있었어. 유령들도 만들어낼 수 있고, 간단한 흑 마법 같은 것들도 가능하다고 보면 되겠네. 이제 써먹을 일은 없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이걸 왜 안 써먹어요? 무조건 써먹어야지. 대충 설정들 때려 박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사용해요. 기왕이면 나랑 있을 때는 그 모습으로 있는 게 더 괜찮을 것 같고… 이건 그냥 개인적인 욕심이지만요. 아무튼, 오빠 지금 밖으로 나가고 싶죠.”
“물론.”
“이거 저한테 맡겨볼래요?”
“응?”
그녀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녀에게 맡기는 것이 맞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갑작스레 이지혜가 허벅지를 꽉 꼬집은 것. 심지어 마력 보호막까지 풀어버린다.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비명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내부로 들어온 것 역시 바로 그때였다.
‘이… 미친….’
순간적으로 황급히 녀석을 바라본다.
설마 이 미친년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이쪽을 보내려고 한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벌써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지혜의 표정을 본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얘는 진짜 쓰레기다, 진짜.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한테….’
일단은 합을 맞추는 것이 급선무.
의문이 가득한 김현성을 향해 입을 열자 다시금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현성 씨. 제… 제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