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6
회귀자 사용설명서 526화
둠기화(1)
‘사실 이렇게 빨리 튀어나올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얼마나 빨리 달려왔는지 친위대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이럴 거면 친위대는 왜 임명한 거야. 쟤네 그냥 던전 돌리라니까.’
거칠게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면 거의 최대 속도로 달려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악 소리가 전부 튀어나오기도 전에 방으로 도착한 모습.
육체적으로 충격이 왔을 때 신호가 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으리라.
시야에 비친 김현성의 표정은 갑작스레 흉작을 맞이한 농부의 표정이다. 인정사정없이 구겨진 얼굴은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무섭다.
나에게로 곧바로 뛰어올 것 같아 빠르게 입을 열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아마 목소리가 나오기 전에도 대충 눈치채지 않았을까. 가면을 쓰고 겉모습이 변화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확연히 다르게 비칠 테니까.
둠기영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비릿한 미소와 광기에 물든 눈 대신 내 얼굴에 자리한 것은 혼란스러운 표정과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입. 추가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토끼 같은 눈이다.
얼굴이 여우 혹은 뱀 상이라는 말을 자주 듣기는 하지만, 나라고 해서 토끼 같은 눈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나조차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일발 장전한다.
건드리면 쓰러져 기절해 버릴 준비가 된 개복치처럼 최대한 연약하고 약해 보이는 모습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기영 씨? 기영 씨가 맞습니까?”
“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한 시름 놨다는 얼굴이었지만,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로, 정말로 기영 씨가 맞는 겁니까?”
“네, 제가 맞습니다.”
“머리는 조금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무척 혼란스럽고, 조금 무섭다고 해야 할지.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건지. 저, 저는 잘 모르겠어서….”
“일단은 마력을 운용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가면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시야가 검어지면서 갑자기… 벗으려고 해봤지만, 벗겨지지 않습니다.”
‘황당하겠지.’
갑자기 들려온 비명에 깜짝 놀라 튀어 와봤더니 눈앞에 둠기영이 자리해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어째서 갑작스레 모습이 변한 건지, 어떻게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건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황급히 이쪽으로 다가온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나를 바라본다.
한쪽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벗기려고 손을 뻗지만 고통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심각한 얼굴로 안절부절 당황하는 게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지혜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녀석 역시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그러하듯 피시방에서 남 탓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배워온 모양이다.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대화하는 도중에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더니….”
“지혜 씨는 잘못 없습니다. 현성 씨. 저도 갑자기 제가 왜 이러는지….”
“제길….”
입술을 꽉 깨문 것은 물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 주변 통제하고 이 방으로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희영 씨와 엘레나 님 바로 호출해 주시고요. 그리고 지혜 씨는 저 좀 봅시다.”
“네?”
“여기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슨 이야기가 있었고, 무슨 말을 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하세요.”
“아, 네, 알겠어요. 마침 저도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제길, 제기랄….”
“지혜 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마 지혜 씨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제가 갑자기….”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제발… 침대에 누워 계세요. 제발, 제발요.”
‘아, 진짜 이거 하기 싫었는데.’
역시나 똥줄이 타는 얼굴로 방방 뛰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방방 뛰고 있지 않았지만, 극도로 초조해하는 게 눈에 띄었다.
손톱을 깨문다거나 한쪽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는 종류이기는 했지만, 녀석의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이윽고 선희영과 엘레나, 심지어는 정하얀까지 방 안으로 들어온 후, 다시금 방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김현성은 나를 엘레나와 선희영에게 맡기고 잠깐 이지혜와 함께 바깥으로 나갔는데,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제법 신경 쓰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아마 대략 유추하자면 이 정도 이야기일 것이다.
‘기영 씨가 많이 괴로워하고 있다. 많이 답답해했고, 실제로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원들 전부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을 이야기했을 때 갑작스럽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추가로.
‘얼굴 쪽에서 가면이 스스로 생성되고, 머리카락 색깔이 바뀌는 걸 봤다. 처음에는 둠기영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확실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서 당황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 순간 현성 씨가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이 이번 사태의 전말이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도 뭐 개인적인 사견을 붙일 수도 있는 거고.
이를테면 마이너스 감정이 폭발해서 변화한 것 같다든지, 처음부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겉모습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겠다든지.
아마 이지혜가 알아서 잘 처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사이 엘레나와 선희영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에 분석하기 여념이 없다.
정하얀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힘든 와중에서 정하얀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제스처였다.
너무나 어수선하고 혼란에 빠져든 장내. 천천히 입을 열자 무척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엘레나 님. 혹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고 계십니까?”
“괜찮아요. 너무 당황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기영 님 탓이 아닌 걸요. 일단은 몸을 좀 살펴봐도 될까요? 몸에 혹시라도 신성력이 남아 있는지….”
신성력은 개뿔. 조금도 남아 있지도 않다. 아마 엘레나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둡고 칙칙한 마력이 전부일 터.
선희영도 함께 무언가 방도를 찾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무슨 방법 같은 게 나올 리 만무했다.
“일, 일단 침착하세요.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는 엘레나 본인이 가장 초조해하고 있다.
“흐윽, 갑, 갑자기 왜….”
심지어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모습. 어떻게 해보겠다고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 넣고 있었지만, 변화가 생길 리가 있겠는가.
다시 한번 직업 전환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이상, 빛의 연금술사로서 가지고 있었던 신성력이 회복될 리가 없다.
오히려 고통스럽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자 깜짝 놀라며 손을 놓아버린다.
또 하나의 주치의인 선희영은 내 몸 자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진단하고 있었는데,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표정이 어둡기는 마찬가지다.
그사이에 김현성과 이지혜가 다시금 방 안으로 복귀했다.
김현성의 표정이 한결 어두워진 것을 보니 이지혜가 이야기를 잘 풀어낸 것 같았다.
무슨 이빨을 털었는지 사색이 된 얼굴은 내가 다 미안해질 정도였다.
“어떻게 됐습니까? 엘레나 님.”
“저… 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신성력에 거부반응을 보이시고는 있지만, 본래의 정신을 유지하고 계신 것 같고…. 일단은 경과를 지켜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현성 씨, 뭔가 잘못된 겁니까?”
“아닙니다, 기영 씨. 잘못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고개 드세요.”
‘당신, 아직 둠기영 아닙니다.’
“혼란스러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해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호언장담하는 모습은 자랑스러웠지만, 김현성이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하겠는가. 지금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이쯤에서 슬그머니 끝을 내는 게 어떨까 생각해 이지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교황청으로 함께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아마 그곳이라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상태로 말입니까?”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대로 계속 영문도 모른 채 탁상공론을 하기보다는 움직이는 게 더 도움이 되겠죠. 바젤 교황님께서도 기영 씨에게 충분히 우호적이고, 베니고어 여신님의 사랑을 받고 계신다는 걸 생각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상정하시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는….”
“…….”
“저희 검은 백조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그럼 당장 하얀 씨가….”
“불가합니다, 길드마스터. 그건 위험한 선택이에요. 아무래도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마법을 몸으로 감내하신다는 건 개인적으로 추천해 드리고 싶은 방법이 아닙니다. 마차로 천천히 이동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지혜가 해줘야 하는 말을 대신 해준 선희영에게는 엄지를.
이곳에 모인 이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교황청으로 가 좀 더 명확히 상태를 살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한 것이다.
방에서 탈출하는 것치고는 스케일이 조금 큰 것 같아서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결과만 좋다면 이쪽이야 아무 상관 없다.
둠기영이 아직 내면에 남아 있고, 빛기영이 그걸 다룰 수 있다는 설정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이윽고 김현성은 친위대를 향해 명령을 전달한 후 곧바로 이쪽을 부축했다.
혼자 걸을 수 있었지만, 그냥 몸을 맡기기로 했다. 조금 더 편하게 가면 좋지 않은가.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지 커다란 마차는 마치 경호 차량에 둘러싸인 대통령 차량처럼 친위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내 모습을 보지 말라고 전달받은 모양인지 박리안을 포함한 조장 2명 만이 사태를 온전히 볼 수 있었는데, 놈 중 하나가 김현성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이 서둘러 나를 넘겨받고 마차로 이끌고 가려는 찰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슬쩍 뒤를 돌아보니 김현성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여는 것이 보인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치 없는 조장 한 놈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로 이송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다.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하다. 여기서 갑자기 내가 정신이 나가 버린다면 커다란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은 이쪽을 포박시킨 채 수도로 향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았다. 가면을 쓰고 있지만, 정신은 온전히 이기영의 그것이었으니까.
‘지는 방안에 가둬 놓고선….’
포박은 불가하고 감금은 가능한 내로남불의 정석.
“괘, 괜찮으세요? 오, 오빠.”
“응, 괜찮은 것 같아.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하얀아. 신성력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몸이 이상하지는 않아.”
무척 정신없었던 상황인 만큼 이쪽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 역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다.
보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지 김현성이 혼자 머리를 꽉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모든 정리를 끝내고 마차 안으로 들어온 김현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밝은 척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별일 아닐 겁니다.”
누가 봐도 나를 안심 시키려는 것 같은 어색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