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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27화 (1,014/1,590)

# 527

회귀자 사용설명서 527화

둠기화(2)

‘다른 애들도 다 오고 있는 것 맞나?’

함께 마차에 타지는 않았지만 아마 뒤따라오고 있을 확률이 높다.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된 수도행이었으니까.

파란의 파티원들이 임무 수행 도중이었다면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수도에서 만나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이지혜가 말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 일단 모든 전력을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물론 그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확률은 제로에 수렴하겠지만, 지금의 김현성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고 싶어 하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굳이 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지 않은 건….

‘이 일이 무척 커다란 일이라는 걸 내게 알리기 싫다는 의도인 거겠지 뭐.’

방금까지 그 생난리를 쳐놓고 애써 의연한 척하는 게 솔직히 조금 우습다.

아무것도 아닌 척, 그냥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깐 마실 나가는 척,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는 척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붙잡아두지 못한다.

다 알면서도 속는 척해주는 것도 힘들었다.

마음 약한 엘레나는 즙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나가서는 눈물을 훔친 후 돌아왔고, 정하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극도로 불안해 보였다.

그녀가 항상 그러하듯 머리를 벅벅 긁거나, 입술을 오물거리는 신호를 계속 보내는 중이다.

김현성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최대한 옆에 붙어 밝은 이야기를 재잘재잘 쏟아내고는 있었지만, 누가 봐도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

너무 말을 더듬어서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함께 마차에 올라탄 이 넷 중에서는 그나마 선희영이 가장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었다.

묵묵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하며 할 일을 하는 걸 보니 확실히 그녀가 다른 이들에 비해 성숙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원래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온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 것도 마차가 막 출발할 때 즈음.

‘와, 진짜 사람 몸이 신기하기는 하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나는 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계속해서 자기 세뇌를 하니 정말로 몸이 아픈 것 같았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거나 숨을 헐떡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미약한 두통 때문인지 안색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신성력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두통이건만, 현재의 두통이 혹시 엘레나가 쏟은 신성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들이 다시금 주문을 외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커다란 마차에서 엘레나, 이지혜와 함께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던 김현성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내가 잠깐 눈을 붙일 때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붙어 있는 수고를 해주시고 계시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해….’

혹시라도 둠기영의 인격이 다시 한번 세상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걸 수습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책임감이 자리 잡은 게 분명하리라.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장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연약한 척하는 것.

그래, 비극에 처한 히로인의 포지션이 가장 적절하다.

“몸은 조금 어떠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조금 어지러운 것밖에 없어서… 혹시나 잘못된다면….”

“아니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에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주시면 됩니다. 걱정하실 필요도, 당황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니까요. 아마 간단한 저주일 겁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는….”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겨우 그것뿐이니 한숨 더 주무세요. 고작 10분밖에….”

‘이 새끼 그렇게 슬플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라. 형 슬퍼진다, 진짜.’

저도 모르게 눈가에 맺히고 있는 크로커다일의 눈물. 녀석은 조금만 버텨 달라는 듯이 그저 손을 꽉 잡아 올 뿐이었다.

“아무 일도 아닐 겁니다. 네, 분명히 아무 일도 아닐 거예요. 기영 씨가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본인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씁쓸하게 웃으면 안 되지. 기본이 안 돼 있다. 진짜, 기본이….’

어색했는지 선희영이 이미 수차례나 정리해 준 이불을 괜스레 한 번 더 정리하고 있다.

확실히 녀석은 거짓말에 재능이 없다. 아무리 밝은 척해도 패시브처럼 슬픔이 묻어나오는 얼굴과 표정.

근심 걱정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버림받은 강아지의 표정은 초조함과 불안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엉킨 느낌이다.

현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에 전부 다 보인다.

그 와중에도 마차 안에서 바깥을 볼 수 없게 암막을 쳐놓은 모습은 가관이었다.

본래부터 밖의 상황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모든 걸 고백하는 게 더욱더 위험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머리 아프겠네, 진짜….’

이지혜를 통해 원인에 대해서 들었다는 건 일단 분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이너스 감정에 의해 둠기화가 진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모든 걸 오픈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현재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혼란스러워만 하고 있는 겁먹은 어린 양에게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와 주변 환경을 보여주며 ‘사실… 이거 당신 작품입니다.’라는 말을 꺼낼 수 있는 싸이코패스는 악마 소환사 진청이나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김현성은 잠깐이나마 과거를 숨기는 방법을 택했다는 게 정설.

저번과는 다른 방식으로 멘탈이 바스러지고 있는 게 아닐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요망한 입은 다시금 말을 내뱉기 시작.

일단은 불안하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어보자. 그게 더 맞을 테니까. 결정타를 날리려면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다.

애초에 암막이 쳐 있는 상태에서 이미 결과는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최대한 슬픈 얼굴로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 쪽을 애써 바라보자 불안한 듯 말을 돌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불편한 점이 생기시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기영 씨.”

“저기….”

“네.”

“커튼 좀 치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빛을 조금 쐬고 싶은데….”

“…….”

“…….”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더 있을까. 고개를 푹 숙이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현재 밖의 상황을 보여줄 수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 심리적으로 힘들어하는 얼굴은 조금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거짓말 같은 거 하면 안 되지, 이 새끼야.’

작은 거짓말은 큰 거짓말을 부르고, 큰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른다. 어떻게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고, 진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시간상으로는 몇 초일 뿐이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녀석의 심경이 얼마나 복잡한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체념한 듯한 이쪽의 목소리.

“역시…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시군요.”

“…….”

“감추고 계신 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지금은… 조금 보여드리기가 곤란할 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씁쓸한 웃음.

“그렇게 변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 혹시나 현재의 제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굳게 닫힌 입.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제가… 뭔가 잘못한 겁니까?”

“아니요. 절대… 절대로 아닙니다. 기영 씨는 잘못한 게 없어요.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조금…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커다란 일이 생긴 것뿐 입니다. 그것뿐이에요….”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꿈에서 본 것처럼 잡히지 않을 것 같은 기억이… 무너진 건물들과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는 악마들, 폐허가 된 잔해. 그리고 디아루기아. 울부짖는 악마들의 목소리와….”

“악몽을 꾸신 겁니다. 지금 당장은 떠올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를 가둬둔 것은… 제가 위험하기 때문이었군요.”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 겁니다. 절대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요. 기영 씨, 혼란스러운 건 이해합니다만, 일단…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시고….”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어요.”

“…….”

“어떻게….”

“…….”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울먹이는 목소리. 녀석은 이미 모든 게 끝났다는 듯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쉽게 끝날 것 같은데, 이거.’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는 것보다 담담하게 슬픔을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거라는 전략이 잘 들어맞았다.

곧바로 바깥을 볼 수 있다는 상황 자체도 괜찮았고, 스타트를 박아 넣는 게 어려웠지만, 확실히 한번 들어가고 나니 손쉽게 뚫리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는 다시 한번 힘 있게 목소리를 내뱉는 것이 맞다.

“창문 열어주세요.”

“하지만….”

“창문 열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면 김현성도 진실을 감추기 힘들다.

입술을 꽉 깨문 녀석의 눈에 오만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윽고 천천히 커튼을 걷어 올렸다.

“아….”

도시는 당연히 황폐했다.

어찌나 피폐했는지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폭발했을 정도였다.

복구 작업이 거의 다 끝났을 거로 예상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쉽게 복구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법으로 건물을 빠르게 올릴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현성의 말대로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마력이 보인다.

벨리알의 마력과 김현성의 마력이 부딪친 여파 때문에 복구 작업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리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우뚝 솟은 시계탑도, 사람들이 몰려들던 광장도 그곳에는 없다.

린델의 모험가들 역시 보이지 않는다. 마치 버림받은 도시처럼….

자연환경도 예외는 아니다. 울창하고, 아름다웠던 숲은 칙칙하고 끈적한 물질로 뒤덮여 썩어가고 있었고, 푸른빛을 자랑하던 호수 역시 그 빛을 잃었다.

항상 맑은 하늘 역시 어딘가 평소와는 달랐다. 린델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피해를 입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현성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봤다.

마차 안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단 한 차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영 씨… 잘못이 아닙니다.”

“…….”

투명하고 순수한 죄책감의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당연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감정선을 지켜야 했으니까.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린다.

소리 없는 울림이 마차 안을 가득 채우기까지,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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