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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28화 (1,015/1,590)

# 528

회귀자 사용설명서 528화

둠기화(3)

“저… 기영 씨. 괜찮으시면 식사를 조금 하시는 게….”

“아뇨, 지금은 입맛이 없습니다.”

“그래요, 이기영 님. 어제도 조금밖에 안 드셨잖아요.”

“오, 오빠. 시, 식사 같이하세요.”

“괜찮아.”

“그, 그, 그래도….”

“놔두면 알아서 먹을게. 문 앞에 놔줘.”

“네….”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됐다. 이지혜의 쓰레기 같은 생각이 확실히 들어맞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마음고생 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

숨기고, 또 숨기고 싶었던 진실이 본인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밝혀진 셈이니 그럴 만했다.

모르긴 몰라도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으리라.

자기가 실수했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거고, 아마 이쪽의 멘탈을 가장 걱정하지 않을까 싶다.

평생을 이타적으로 살았던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륙에 커다란 피해를 끼친 빌런이 되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황이다.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성품을 생각해 보면 자해를 하거나 정신적으로 무너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잠깐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거의 3분 간격으로 이쪽의 기척을 살피러 오는 김현성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가슴 아프기도 했다.

어지간히도 깨지기 쉬운 유리로 비친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들키면 안 되는 거야, 현성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쪽을 속였다는 것 역시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지 않을까.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당장은 정신적인 부분과 변화한 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겠지만, 사태가 아무리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더라도 날 속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혹여나 파란 길드와 자신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끼고 있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도 뇌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을 거고, 녀석에게는 꼭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음고생 하고 있을 길드원들에게는 미안하기는 했지만, 일단 원하던 바는 이뤄냈다.

엄지를 추켜올릴 만한 탈출. 지금은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현성 씨.”

“네? 네, 기영 씨. 지금 가겠습니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부탁드립니다. 마차를 돌려주세요.”

“…….”

‘뭐야, 이 새끼. 표정 왜 그래. 진짜로 마차 돌리려고?’

“제발….”

악어의 눈물을 장착하자 그제야 원하는 반응이 나온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기영 씨.”

‘그래, 이래야지 시바.’

“하지만 기영 씨가 우려하시는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만에 하나 일어나더라도 제가 막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기영 씨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제가 느끼기에는 그래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저를 믿으시는 만큼 자신도 믿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믿지 못해, 스스로 방 안에 틀어박히고 싶어 하는 사람을 다시 감금할 미친놈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정말로 그런 방식으로 이번 일을 마무리 짓는다면 정신적으로 망가진 이기영을 보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마이너스 감정을 집어먹으면 둠기화가 진행된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을 테니 아마 홀로 굴속에 들어가는 행동은 최대한 막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이제 팍하고 튀어나와 줘야지.’

단순한 추측이기는 하지만, 고백 타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앞의 20일은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나를 배려하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지금은 또 사정이 달라졌다.

실의에 빠진 캐릭터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거나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전해주는 건 주인공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든가.’

기영 씨의 힘이 필요하다던가.

녀석의 무의식 세계에서도 이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으니, 김현성이 입을 열어오는 것 자체는 이미 확정된 이야기.

‘시간이 어느 정도가 걸릴지가 문제지.’

물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후 일이 어떻게 벌어져도 어떤 식으로든 이쪽에서 회귀 고백 이벤트를 진행하도록 만들 테니까.

‘둠기영의 공론화도 그렇고….’

마음속에 있는 어둠을 컨트롤하는 그 흔한 클리셰를 어째서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교황청에 들어간 후에 현 사태를 대충 해결하고 나면 이 힘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걸 소수에게 내비쳐야 했다.

베니고어의 공증이 있다면 더욱더 좋고.

물론 주변에서는 둠기영의 힘을 사용하는 걸 만류하겠지만, 본래 이런 위치에 서 있는 캐릭터들의 필살기는 치명적인 페널티를 떠안게 마련이다.

한 번만 더 사용하면 영원히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다든가, 계속해서 사용한다면 결국, 어둠에 영원히 잠식될 수도 있다든가.

이런 떡밥 정도는 몇 개 가지고 있어야 조금 입체감이 살아나는 법이지 않겠는가.

주변 사람들의 걱정하는 마음도 조금 더 늘어날 거고….

뭐, 이지혜 개인적인 욕심이 들어간 것 같기는 했지만, 결과만 좋으면 문제는 없다. 오히려 환영하고 싶을 지경이지.

혼자서 행복 회로를 돌리는 와중에 김현성이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곧 교황청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째서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방금과 같은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말아 주세요.”

“…….”

“그리고 제멋대로… 쓸데없는 판단을 한 걸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현성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제가 현성 씨였어도 충분히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맞습니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라….”

“나무라는 것이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아까의 표정이 괜스레 신경 쓰였기 때문에 마음속에 작은 짐 하나를 떠미는 것으로 가볍게 마무리.

그 와중에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교국의 수도에 진입하는 것이다. 다시금 슬픈 표정을 일발 장전하며 교국을 바라봤지만, 역시나 이 지역은 별다른 피해가 없다.

아니, 애초에 교국 자체가 피해가 없다시피 했다. 엄밀히 따지면 개박살 난 건 연방과 린델이 전부.

수도 같은 경우에는 악마의 침입도 없었을뿐더러, 개미 새끼 한 마리와도 싸우지도 않았다.

린델이 복구 중인 현재, 이 장소는 교국 내에서도 가장 괜찮은 거주지로 손꼽히고 있지 않을까.

내 예상이 맞은 듯 검은 머리를 한 모험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린델의 활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광장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대부분의 모험가는 갑작스레 나타난 파란 길드의 휘장에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굳이 커튼을 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창문에 선팅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은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허락을 구한 이후 커튼을 치기 시작했다.

‘교황청 앞까지 마차를 끌고 가려나? 아니, 아예 그 앞에서 내려줄 확률이 높겠네.’

지금 당장 대중에게 둠기화를 공개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대부분의 모험가는 물론 수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등장으로 비칠 것이다.

현재 린델 복구 작업에 매진하고 있어야 할 파란 길드가 거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교국의 수도로 입성했다. 의아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리라.

저 마차 안에 누가 탔는지, 아예 수도로 길드 하우스를 이전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가설들이 오가는 것은 물론, 어쩌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마차에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궁금하긴 궁금해.’

교국에서는 아직도 먹힐 거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로 먹힐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환호를 받을지, 아니면 추앙을 받을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하지만 마차는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을 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교황청에 도착한 것은 물론 바젤 교황에게 이것저것 설명하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살짝 창문을 여니 소수의 인원과 바젤 교황 그리고 그 심복들만 자리한 상태였다.

벌써 수심이 드리워지는 교황님의 얼굴은 30년은 더 늙어 보인다.

김현성은 최악의 상황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 예상대로 교황 성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소수의 경호 인원들이 허겁지겁 그를 만류했지만, 오히려 커다란 노호를 내지르고는 그들의 팔을 뿌리쳤다.

‘성격 어디 안 가네, 우리 교황님.’

마침내 마차의 문도 열어버렸는지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것 놔라! 이 아둔한 것들!”

“빛의 검사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네놈들의 그 썩어빠진 생각이니라. 죽일 놈들! 이것 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교황님!”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못해! 당장 사라지거라! 이 쓸모없는 것들!”

“최소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경비 하나가 나 자빠진 모양이다.

그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는 교단의 성기사가 노친네 하나 감당 못 하는 게 우스웠지만, 그만큼 바젤 교황이 흥분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이리라.

이윽고 내가 있는 곳까지 달려들어 온 바젤 교황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에 무리 오면 안 되는데, 진짜.’

너무 놀라 가슴이라도 부여잡지 않을까 싶었지만,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찮을 거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었다.

“바젤 교황님.”

“고생 많았네. 정말… 고생 많았어.”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찾아뵙게 돼서….”

“하하하. 아무리 그런 모습이라 한들, 우리 이기영 명예추기경 내면의 빛이 바래게 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내 눈에는 명예추기경이 빛을 잃고 있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네.”

“교황님….”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게나.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을 살피실 게야. 아암, 그렇고말고. 자, 일어날 수 있겠나?”

심지어는 황급히 부축하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뒤늦게 따라온 성기사들이 베니고어의 이름을 읊조리며 바젤 교황을 막으려고 했지만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이쪽에서 은근슬쩍 교황을 피하는 액션을 보여준다.

더럽고 저주받은 몸이라는 듯, 혹시나 교황님 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듯, 어색하게 몸을 뒤로 빼자 오히려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이쪽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 명예추기경… 님의 부축은 저희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황 성하.”

“아마 명예추기경님께서도 그게… 더 편하실 겁니다.”

성기사들의 뒤늦은 만류에도 바젤 교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되었다. 내가 직접 명예추기경을 여신께 모시고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모습으로는… 혹여나 여신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교황 성하.”

“명예추기경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일단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 보심이….”

“네이노옴들!!! 입조심 하거라!! 이 썩어빠진 것들아!! 저주받을 악마의 생각이 머릿속까지 꽉 차 있구나! 악마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 멍청한 것들!! 정녕 네놈들의 눈에는 명예추기경 안에 있는 빛이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어째서 명예추기경이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 어째서 악마들이 이런 힘을 명예추기경에게 심어놓은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말이냐! 이 아둔한 것들!!!”

“그, 그렇지만….”

“아무래도 너희 멍청한 것들의 머릿속이 악마로 꽉 찬 모양이구나!! 당장 내 둔기를 가져와라! 이 멍청한 놈들에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구니를 내가 직접 으깨 버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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