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9
회귀자 사용설명서 529화
너의 죄를 사하노라(1)
“당장 가져오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어우….’
“이 죽일 놈들! 이 악마에 홀린 놈들이! 감히! 누구에게!!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감히 누구에게!!”
‘얘, 왜 이래, 진짜.’
“아니다! 차라리! 이단 심문관 헬레나를 불러와라!! 이것들의 머릿속을 조사해 봐야겠으니!! 든 것 없는 저 머리통 속에 정말로 악마가 들어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교황님. 이제 슬슬 그만해도 될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교황님. 그렇게까지 성내실 필요 없습니다. 저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예추기경….”
“여신님과 교황님을 아끼는 마음에 올린 충언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이대로 여신님의 성소로 들어가는 건… 역시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명예추기경.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명예추기경을 버릴 리 없지 않은가.”
확실히 버릴 일은 없다. 내가 베니고어를 버렸으면 버렸지.
“그러지 말고 어서 가게나. 저 아둔한 성기사들의 말에 흔들릴 필요도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네. 겉만 볼 줄 아는 멍청한 놈들….”
“그들을 너무 나무라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콜록.”
“오… 오빠.”
“성기사들은 단지 본인들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 부축은 그들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합니다만….”
“…….”
“혹시나 해가 될까 무섭습니다.”
이때라는 듯 슬쩍 성기사들을 바라보자 녀석들이 묵묵히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무척이나 감동한 듯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인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듯 반성하는 반응은 덤이다.
마음 약한 한 여자 성기사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왜 슬프지 않겠는가.
대륙을 밝게 비추던 빛이 악마의 저주에 의한 부작용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입장상 어쩔 수 없는 태도를 취했을 뿐, 그들의 마음 역시 바젤 교황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교황 성하.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해 명예추기경님을 보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이야. 혹시라도 명예 추기경에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절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윽고 내 옆으로 다가와서는 조용히 중얼거린다.
“정말… 정말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죄송하실 필요도, 감사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로라 성기사님.”
깜짝 놀라는 얼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실제로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상태창에 떠오른 이름을 그대로 읽었을 뿐이었지만, 눈을 보니 감동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잠깐이나마 명예추기경을 의심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바젤 교황을 보필하던 성기사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그들의 얼굴에는 정체 모를 책임감이 감돌고 다시 한번 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히는 게 눈에 보인다.
가슴 아파도 이것보다 더 가슴 아픈 장면이 또 있을까.
선희영과 엘레나는 무척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커다란 한숨을 쉬고 있었고, 김현성은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이쪽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겐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교황님.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솔직히 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빛의 검사에게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런 말 하지 말게, 명예추기경. 이게 전부 다 내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인데, 누가 누굴 탓하겠는가. 미안함을 표시해야 할 사람은 나야. 실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게. 여신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명예추기경을 아끼고 있으니….”
“아뇨, 그뿐만이 아니라… 제가… 이 이전에 했던 일들을….”
“…….”
“…….”
“들었나 보군.”
“자세히 전해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 어둠은 명예추기경이 아닐세. 내가 아는 명예추기경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며 신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자네라는 사람이야. 어둠에 굴하지 말게. 말하지 않았는가.”
“…….”
“내 눈에는 아직도 명예 추기경의 가슴속에 있는 빛이 보여.”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바젤 교황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여신의 석상까지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본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몸을 조사한 이후에 들어갈 것 같았지만, 역시나 성미가 급한 바젤 교황다웠다.
일단 여신님께 데려간다면 뭐든 해결이 될 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빛이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 솔직히 바젤 교황으로서도 위험이 따르는 행동이었다.
만약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연기한 것이고, 둠기영으로서 여신의 심장부를 노리기 위해 교황청에 침입한 것이라면 현재의 바젤 교황의 행동은 이후 문제의 소지가 될 확률이 높다.
교황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추기경들에게 물어뜯길 가능성 역시 농후하다.
그러니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겠는가.
“이 모습으로 여신님을….”
“여신님은 명예추기경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품어주실 것이네.”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함께 들어가게나.”
‘물론 같이 들어가야지.’
김현성도 굳은 얼굴로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정하얀이나 엘레나 역시 마찬가지.
‘얘들아….’
눈에 띄었던 것은 분위기.
‘이건 진짜 감동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무거운 얼굴로 성소에 진입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어쩌면 베니고어가 정말로 나를 적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베니고어가 이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쾌재를 질러야 함이 맞지만, 혹시나 현재의 모습에 크게 분노한다면 어쩔 수 없이 칼을 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키야, 우리 현성이가 베니고어까지 적으로 돌리려고 하네. 대단하다, 증말.’
‘그래, 하얀아. 너는 그럴 것 같았어. 그래도 고맙다, 진짜.’
‘엘룬은 아니니까 엘레나도 그럴 만하지. 암, 그렇고말고.’
‘희영이도 넘나 고마운 것. 우리 같이 가즈아.’
교국의 그 어떤 장소보다 성스러운 장소였지만, 함께 들어온 파란 길드원들에게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던전 같은 장소로 비치고 있으리라.
아직 모습을 보지 못한 다른 길드원들 역시 그렇다.
포인트마다 대기하며 혹시라도 일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 퇴로를 확보하고 있으리라.
붉은 용병의 일부와 검은 백조까지 교황청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
애초에 베니고어는 나를 적으로 돌릴 수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적으로 돌린다면 커다란 손실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얘는 반응이 없네. 지금 바쁜가.’
바쁜 시기가 맞다.
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베니고어 2.0 패치를 준비하고, 계약에 관련된 부분을 정리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현세를 돌볼 여유가 없는 것도 이해된다.
만약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면, 내가 직업 전환을 보여준 시점에서 퀘스트를 날리지 않았을까.
‘아무리 바빠도 여기서 울리는 목소리는 들을 수 있겠지, 뭐.’
한 번 본 적 있는 베니고어의 석상이 나를 내려다본다.
바젤 교황도 어느 순간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성기사들 역시 본인들의 신앙과 믿음을 노래한다.
따뜻한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향해 들어오고 있었고, 대충 눈으로 보이기만 해도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한 신성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베니고어 님. 충실한 종, 이기영 신도가 찾아왔습니다.’
속마음으로 힘껏 외쳤지만, 들리지 않는 목소리.
아니나 다를까 바젤 교황 역시 커다란 목소리로 베니고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위대하고 자애로운 여신이시여, 보잘것없는 종들이 찾아왔사옵나이다.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답을 부디 내려주시옵소서.”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 불쌍한 종들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대답이 없다.
‘와, 이거 업무 태만 아닌가?’
여기서 베니고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상황이 조금 심각해진다.
빛 하나 내뿜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상을 홍두깨로 내려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여신님, 시바… 여신님!’
대륙을 위기에서 구해줬건만,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부터 신력이 목적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인상을 구기던 찰나.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나… 나, 왔어! 나, 왔어!]
석상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젤 교황과 성기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석상을 바라봤지만, 이쪽은 그녀와 대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여신님.’
[요… 즘 일이 조금 바빠서… 여러 가지로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원래 여기든, 거기든 뒤처리가 제일 귀찮고 힘들잖아. 절대로 이기영 신도를 무시하거나 괄시한 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는… 그, 그리고 그 모습은 웬만하면….]
‘저도 다 사정이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
[미안해, 내가 그만 모자라서… 이기영 신도를 섭섭하게 만들었네. 기분 풀어줬으면 좋겠는데… 내 사과 받아줄 거지?]
‘됐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상처받은 마음이 어디 가지는 않아요. 사실 깨어났을 때부터 찾았었는데.’
[미, 미안해 나의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정말로 바빠서 그랬어. 너무 바빠서 잠깐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 알다시피 계약 문제 때문에….]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안, 그, 그래도 여기 찾아온 이유는 있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힘써볼게. 추가로 이번 사태에 고마움도 조금 표현하고… 필요한 게 뭐야?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사실 딱히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응.]
‘용서받고 싶어서요.’
[뭐?]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기는 하지만, 제가 연방과 린델에 조금 커다란 상처를 입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가면도 쓰고 있고요. 그걸 용서받고 싶습니다.’
[어….]
‘용서해 줘요.’
[너… 너의 죄를 사… 하노라.]
‘아니, 그렇게 말고요. 기적 팍팍 넣어서.’
[뭐? 저 미친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언니! 언니, 정말 이대로 참고 있을 거야? 연방이 박살 난 걸 왜 언니가 용서해 주는 건데! 내 땅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로렌! 너 조용히 있지 못해?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나 해?! 미… 미안해, 이기영 신도. 깜짝 놀랐지? 이건 다름이 아니라….]
‘연방 수호신, 로렌 님도 함께 계십니까?’
[어?]
‘기왕이면 로렌 님께도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
[…….]
[저… 저 미친노옴!!]
더욱더 환한 빛이 장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