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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30화 (521/1,590)

# 530

회귀자 사용설명서 530화

너의 죄를 사하노라(2)

머리를 뒤흔드는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움찔했지만, 굳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로렌인가, 가렌인가 하는 신의 돌발 행동을 베니고어가 막아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국의 마지막 희망, 빛의 등불이라고 불리는 명예추기경의 뚝배기를 깨버린다면 대륙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하다.

김현성을 포함한 대륙 영웅들의 원망과 불신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나아가 우리네 영웅분들께서 윗동네를 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김현성이 저 눈부신 빛을 견제하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

그 무엇보다 대륙의 존망에 힘써야 하는 저들의 입장상 내게 해를 끼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이쪽의 영입을 생각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무능력한 신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내가 벨리알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베니고어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윗분이 나를 열렬히 원하고 있다는데, 베니고어보다 아래에 랭크된 여신 로렌이 어떻게 이쪽에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나를 건드리지는 않을 거로 생각하던 그때였다.

[네 이노옴! 역겨운 영혼을 지닌 인간 놈이!! 감히!! 여신을 우롱해?! 신벌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거대한 빛과 함께 머릿속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그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잠깐 몸을 거북이처럼 웅크리게 될 정도였다.

슬그머니 김현성을 바라보자 녀석이 입술을 깨문 채로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조금만 더 충격을 받으면 검을 뽑아 매개체인 석상을 부수려고 하리라.

‘그건 안 되는데…. 조금만 더 참아야 돼, 현성아….’

여신보다 이 교황청과 척을 지게 되는 게 신경 쓰인다.

여신이 타락했습니다, 어쩌고를 시전하기에는 지금 뿜어져 나오는 빛이 너무 강렬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현재의 내 모습을 여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는 만큼 척을 지는 건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그렇다고 저 멍청한 신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납작 엎드려 줄 수는 없는 일.

항상 그러했지만, 이쪽은 절대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 양보하는 건 내 반대쪽에 있는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에도 로렌은 계속해서 개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었고 그럴수록 빛은 점점 더 거세게 나를 몰아붙이는 중이다.

신이 났는지 아무 소리나 지껄여 대는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지옥으로 보내주마! 이 더러운….]

‘그래, 시바… 지옥 가자.’

[어?]

‘그래! 내가 더러워서 지옥 간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 지옥 간다고.’

[어어….]

‘용서 안 받아도 되니까. 그냥 지옥 가겠습니다, 진짜. 벨리알 님! 어디 계십니까. 벨리알 님!’

[어…어?]

‘어디 한번 그래, 갈 때까지 가봅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랑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뭐, 혼자 알아서 잘해봐. 대륙 생명체에게 직접 해를 끼치는 건 금기라고 들었는데, 무슨 배짱으로 이러고 있는 건지 몰라. 페널티를 먹으면 회복할 신력은 있으시고? 다시 파산하시려고 그러시나 본데, 이쪽에서 지원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아?’

[이기영 신도, 로렌의 뜻은 그게 아니라… 다른 의도가.]

‘베니고어 님도 그래요. 사랑하는 신도, 사랑하는 신도라고 말해주면서도 은근히 가만히 있었던 거 누가 모를 줄 압니까. 진짜, 어떻게든 대륙을 살리기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신도가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죄를 회개하러 왔다는데 그것도 못 받아줍니까? 회개하면 뭐, 모든 죄를 용서하고, 천국 어쩌고 하더니 그런 거 다 거짓부렁이었네요.’

[…….]

‘이거 무서워서 위로 올라갈 때 그쪽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죄가 깨끗이 씻기지도 않았는데, 거기서 누가 트집이라도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진짜 역겨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 죄를 씻지도 못한답니까. 진짜 너무 편협하시다. 이럴 거면 악마가 차라리 낫겠네. 그쪽에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게 훨씬 낫겠어요, 로렌 님.’

[이놈이 끄… 끝까지!]

‘지금 당신이 여기서 나랑 떠들고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잊으면 안 돼요, 이 사람아. 기껏 물에 빠진 거 건져 올려줬더니 여신 우롱 어쩌고저쩌고. 나랑 척지면 누가 더 손해인지 잘 생각해 봐. 연방 복구 작업에서 신전 축소, 아니, 아예 신전은 복구 작업에서 제외해 버릴 테니까.’

[내 신도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기적이라도 일으키시게? 한번 잘해봐요. 누가 이기는지 한번 봅시다. 안 그래도 그쪽 애들한테 영 평판이 좋지 않던데, 누가 누가 더 쉽게 여론을 움직이는지 한번 시험해 봅시다. 한 달 안에 로렌 여신이 연방을 악마들에게 팔아넘겼다는 진실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기대해도 됩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둔한 놈!]

‘정말로 안 믿을까? 이거 자기 신도들을 너무 믿고 계시네요.’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우리 잠깐만 이야기를… 원하는 용서라면 수백 번도 더 해줄 수 있으니까. 으응, 사실 용서받을 일도 아니잖아. 전부 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로렌이 하는 말의 뜻은 그거야… 애초에 용서받을 필요도 없는 일을 용서받으려고 해서 잠깐 당황한 것뿐이야.]

‘아, 베니고어 님 됐어요. 됐으니까. 용서 안 받고 지옥 갈랍니다.’

[이기영 신도! 이기영 신도오!]

[구질구질하게 그러지 마세요, 언니! 언니가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니까, 저 바퀴벌레 같은 쓰레기가 자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 거야. 한 번쯤은 버릇을 고쳐줄 때도 됐어.]

[로렌, 가만히 안 있어!! 당장 여기서….]

[이 역겨운 인간한테 언제까지 끌려다닐 작정이야! 이게 다 언니를 위해서라고! 이렇게 된 이상!!]

[로레에에에에엔!!!!]

뭔가 쾅!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베니고어가 그녀를 제압한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는 연결이 끊겼는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

하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우리 무능력한 베니고어가 로렌보다는 더 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정말로 척을 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고, 황급히 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게 학계의 정설.

앞서 말한 모든 내용을 진심으로 지껄인 건 아니었지만, 아예 일어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조금 힘들기야 하겠지만, 로렌을 타락한 악신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무난하게 완성될 확률이 높다.

애초 연방 종교는 한풀 꺾이기도 했고…. 그 신전 역시 지지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악마 천지가 되었던 곳에 무슨 신전과 석상이 남아 있겠는가.

매개체가 없으니 기적을 일으키거나 대륙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에 더욱더 포인트가 많이 들어갈 거고, 실제로 지금 로렌이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무언가를 해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베니고어 2.0 패치가 방금 끝났다고 가정해 보면 더욱더.

일이 터질 당시에 로렌을 부르짖던 많은 신도가 눈물을 훔치며 삶의 터전을 떠났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연방민이 그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말 몇 마디에 뒷공작 하나면 그녀를 벨리알과 놀아난 탕녀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헛소문을 만들기는 쉽지만, 그 헛소문을 해명하긴 위해서는 수십 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심지어 얘는 증거와 문서를 내밀 수도 없는 상황이란다.

할 수 있는 거라고 해봐야 빛이나 조금 뿜어대거나 몇몇 이에게 퀘스트를 내리는 게 전부다. 애초에 시작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베니고어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배운 티가 났다.

‘내가 진짜 여신 하나는 잘 키웠다, 진짜.’

이쪽과 오랫동안 함께한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상황 파악을 잘하고 있다.

혹시 큰일이라도 터질까 봐 그녀를 말린 것을 보면 대충 봐도 답이 나온다.

아무것도 몰랐던 순진한 신입사원이 점점 회사에 적응하는 걸 바라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잠시 후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베니고어가 혹독한 야생에 적응하는 법을 깨달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언니, 끄으으윽.]

[뭘 잘했다고 끄윽거려. 나,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지금 당장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한테 사과해.]

[끄으으윽….]

‘그렇지.’

[빨리 안 해?!]

[언니이….]

[이기영 신도, 미안해… 깜짝 놀랐지? 얘가 아직 뭘 몰라서… 이기영 신도가 그 넓은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어. 이기영 신도가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자, 어서.]

[미, 미안하구나. 내가 그만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어. 끄윽… 부디 나를 용서해 줬으면 좋겠구나.]

[기분 좀 풀렸어? 이기영 신도?]

‘…….’

[나를 봐서라도 한 번쯤 눈감아주면 안 될까? 우리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여기서 흐트러지는 건 사랑스러운 이기영 신도로 원하지 않을 거고, 나중에는 얼굴 마주치면서 일할지도 모르는데 서로 얼굴 붉히는 건 조금 그렇지.]

‘네, 뭐… 그렇기는 합니다. 솔직히 내키지는 않지만, 베니고어 님의 얼굴을 봐서 그 사과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제 죄도 용서해 주셔야죠. 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로렌 님께서도 직접 죄를 사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로렌은 신성이 많이 부족해서… 나도 현신하는 건 여유가 없어. 직접은 아니지만, 빛으로 모양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도 괜찮을까?]

‘베니고어 님이나 로렌 님의 모습을 대충 확인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준비되면 빨리 해주세요. 다른 사람들 기다리니까’

[물론, 지금 당장 해줘야지! 누구 부탁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기영 신도의 죄를 용서하는 건 반드시 하는 게 맞지. 으응! 그, 그렇지. 근데….]

‘이후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사용하신 만큼 확실히 벌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이기영 신도라니까. 항상 고마워서 어떡하지….]

‘괜찮습니다. 저 혼자만을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고, 모두 대륙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베니고어 님께서도 대륙을 위해 벨리알….’

[자! 그, 그럼 빨리 시작하자!]

베니고어의 입장에서 벨리알과의 계약은 다시 언급하기도 싫은 모양이다.

황급히 말을 돌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던 빛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성기사들과 표정이 어두워지는 바젤 교황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김현성을 포함한 파란 길드원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는 마찬가지.

안 좋은 상상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다시금 환하게 장내를 비추는 빛을 목도한 이후에는 한결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모자라 빛의 형상을 한 베니고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는데 어떻게 표정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형색색의 화려한 빛의 베니고어는 벨리알과의 격전을 치렀던 때의 완벽한 모습보다는 생동감이 떨어지지만, 조금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여기저기서 환희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베니고어시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바젤 교황,

“로렌 님까지….”

연방의 수호신 로렌의 등장에 깜짝 놀라는 성기사들까지.

화아아아아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

툭하면 터질 것처럼 연약한 표정은 그대로 유지.

베니고어와 로렌은 그 자리에 서서 휘황찬란한 빛을 뿌리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그대의 죄를 사하노라.]

[그… 끄윽… 너의 죄를 사하노라.]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빛이 몸을 감싸 안는 모습, 천천히 직업 전환을 선택하자 다시금 겉모습이 변하는 것이 느껴진다.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겠어, 진짜.’

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공증을 받으니 그동안 저질렀던 작은 죄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어째서 많은 종교가 회개를 강조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죄를 포기함으로써 거룩한 신과 함께하는 축복받은 단어, 이것보다 더 완벽한 면죄부가 어디 있겠는가.

[이기영 신도의 죄를 사하노라.]

몸은 물론 마음까지 충만해졌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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