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1
회귀자 사용설명서 531화
거울 호수(1)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베니고어시여….”
[저와 로렌이 잠깐 그 안에 있는 어둠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이는 단기적인 대책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어둠이 남아 있습니다. 대륙의 빛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그대들이 그를 잘 돌봐주셨으면 합니다. 작은 부탁이지만, 이는 장차 이 대륙의 존망을 가를지도 모르는 커다란 일입니다. 항상 그를 지지해 주고 그의 등 뒤와 앞에서, 그를 떠밀어주고 끌어주세요.]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바젤 교황, 이렇게 부족한 여신을 의심하지 않고 항상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찌 베니고어 님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믿음은 곧 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빛을 확인한 그대야말로 저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으으으윽….”
[빛의 검사여, 그대에게 거는 기대 또한 큽니다.]
“…….”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셨군요.]
“…….”
[부탁드리옵건대, 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방향을 잘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길잡이 역할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는 이해합니다만….]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
베니고어는 환한 빛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윽고 빛의 가루가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내리며 상황은 마무리.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마지막까지 빛에 휩싸인 채로 모든 죄가 씻겨 내려간 내 모습을 보니 더욱더 미소가 지어진다.
오류나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을까 싶어, 이지혜가 찍어놓은 마력 홀로그램을 돌려봤지만, 두세 번 점검해도 눈에 밟히는 장면은 없다.
오히려 기적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은 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했다.
전 교국과 대륙에 이 영상이 뻗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감금 상황을 해결한 것으로 모자라 둠기화에 개연성까지 부여했으니, 어떻게 봐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미 사흘 전부터 교국은 밤낮 가리지 않으며 기도 체제에 들어갔다.
베니고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받은 바젤 교황을 필두로 한 교황청은 기적에 대해 떠들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이쪽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듣고 며칠 동안 교황청에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
당장 린델로 돌아가 복구 작업을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곧바로 돌아가기엔 신경 쓰이는 게 많다.
‘분위기는 대충 읽어봐야지.’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도시에 돌아간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정보에 목말랐던 만큼 악마들이 떠나간 이후에 도시의 여론이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자리 잡히고 있는지, 실제 교국민과 모험가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동안 읽을 수 없었던 반가운 기사들과 뉴스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요소들.
나름 정보화 시대에서 살아왔던 만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나온 기사부터….’
[베니고어 님께서 일으키신 기적, 악몽은 걷히고 대륙을 노을빛에 물들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음… 음….”
[기적에 가까운 대승,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망자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돼…. -교국신문 마이클 특파원.]
‘기적에 가까운 대승이기는 했지.’
[연방에 있는 포로들, 기적적 구출. 나라는 사라졌지만, 사람은 남았다.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교국의 수호룡, 디아루기아. 임시 거처인 실리아로 거취를 옮겨 회복 중 -실리아일보 쿄스케 기자.]
[깨어나지 않는 명예추기경, 벌써 20일째. 교국의 수도에서 매일 같이 열리는 기도회에 모습을 드러낸 바젤 교황. “이럴 때일수록 모든 신도가 힘을 모아야 할 때.” -교국신문 마이클 특파원.]
[린델 복구 작업에 난항. 약 3개월이 지난 후에야 본격적인 복구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 임시 거처 확보와 모험가 복지 문제로 오늘 저녁 붉은 용병의 길드 마스터 차희라의 입장 발표가 예정되어 있어…. -교국칼럼 김성경 칼럼니스트.]
[34일째 들려오지 않는 명예추기경의 소식에 뿔난 교국민. “혹시나 교국에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돼….” -교국신문 콤파니 특파원]
[파란 길드 대변인 김미영 팀장의 입장 발표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득이 없어. 혹시나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죽음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대두.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교국민들의 촛불 시위. 진실을 밝히는 외침 통할까.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금일 새벽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눈을 떴다는 소식에 교국 전체가 축제 분위기. 하지만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어….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확실히 내가 누워 있던 동안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디아루기아는 휴식 중이고, 린델의 복구를 제외하면 뒷수습 역시 제법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파란에서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발표하지 않았다는 것.
‘그냥 계속 누워 있다고만 발표한 거네. 키야… 얘네 좀 봐….’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짜상으로는 분명히 일어나 있었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아마 촛불 시위니, 뭐니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끝까지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소름이 돋기도 한다.
멀쩡하게 깨어 있는 사람을 천연덕스럽게 감금해 놓고 기절해 있다고 발표한 꼴이었으니까.
‘이제는 다 끝난 일이지, 뭐.’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뭉쳐 있는 기사들이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다. 기본적인 내용 말고도 재미있는 기사들이 꽤 많다.
[빛의 검사는 무의식 속에서 무엇을 봤던 것일까. 언론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파란의 길드마스터가 직접 전한 생생한 이야기. 노을빛 검은 명예추기경의 선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스토리에 교국 전역이 화제. -린델일보 박성경 기자.]
‘우리 현성이, 자랑하고 싶었구나. 이런 미담 좋지, 좋아. 미담은 마음껏 퍼트려도 돼.’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신간 출간.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신원 미상의 작가 인터뷰 수록. “제 글이 많은 분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린델 문화부 정유미 기자.]
“이런 것도 좋지. 무조건 도움된다니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치고 힘든 상황에 문화생활만큼 힘을 주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여신이 악마들을 물리쳤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린 모험가들이 많을 거라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저런 건 충분히 도움이 된다. 길드 차원이나 나라 차원에서 지원해 주는 게 마땅하다.
[천재검사와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법, 영화화 확정. 많은 투자자가 앞다투어 경쟁할 것으로 추측. 환호성을 내지르는 팬들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는 팬들의 입장도….]
이러고 보니 이번 기회에 파란에서 정식으로 투자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창작자가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에 입장인 만큼 굳이 앞으로 나서서 뭘 제작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투자 정도는 쉬운 일이니까.
앞으로 이쪽 사업 역시 커질 테니 미리 선점해 놓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사업에 비해 수입이 그리 크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기왕 하는 김에 연극 같은 걸 만들어 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조금 더 사업을 커다랗게 키울 수 있을지 생각하기만 해도 계속해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오랜만에 찾은 자유가 괜스레 소중하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다. 여기저기에 읽을거리, 볼 것 천지다.
여신의 거울에서는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교황청에서 여신을 만나 몸을 회복하고 있다는 소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모여서 기도를 드리는 교국민들의 모습 또한 이쪽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정보에 바다에서 헤엄치는 모습이 역시 나답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 주니, 이것보다 더 편한 게 어디 있겠는가.
현 배경도 그렇다. 슬슬 바깥으로 나가 선전 활동을 벌여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 시점.
누가 봐도 지친 몸으로 복구 작업을 맨손으로 돕는다거나, 교국민들의 손을 한 명, 한 명 잡아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거나.
할 수 있는 건 많다. 그렇게 아주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때였다.
바깥에서 국화차를 가지고 온 오스칼, 아니, 아리스 시녀가 시야에 비친 것.
“오스칼 님….”
“아리스 시녀라고 불러주세요. 명예추기경님. 아까도 그러시더니…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섭섭해요.”
“아무래도 잘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몸은 괜찮은 거 맞으시죠?”
“네, 보시다시피 이제는 건강합니다. 무리 없이 돌아다닐 수도 있고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다른 분들도 걱정이 많으시고… 명예추기경님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마지막 대사가 왠지 모르게 무섭게 들려오는 건 착각일 거다.
“지금 당장 린델로 뛰어가고 싶으신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미 명예추기경님은 커다란 짐을 짊어지기도 했고, 잠깐이기는 하지만 여유를 즐겨주셨으면 해요.”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차 한 잔 드시겠어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같이 있으니 정말 좋네요. 아, 어제는 어떠셨어요?”
“어제라면….”
“카트린 의원과 엘리제 의원, 마를린 의원이 들렀다고 들었었는데.”
“아, 물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걱정해 주셔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모두 뵌 지 오래된 분들이니까요.”
“그래도 피곤하지는 않으셨나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괜찮았습니다, 아리스 시녀님.”
‘이것도 중요한 일이고….’
인맥 관리는 지속해서 해주는 것이 좋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왔다고 한들, 초심을 잃지 않는 건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안 그래도 한 번 관리해 줄 때가 됐었으니까.’
캐슬락 의원이나 마를린 의원 같은 의회의 수뇌부들과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 같은 알짜배기 인맥.
그 외에 유력 상인이나 시민 대표 그리고 다완과 실리아의 교국 8좌 등등. 이미 대부분이 병문안하러 다녀간 지 오래다.
아주 약간 귀찮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왕년에 귀족 부인들과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을 즐길 수 있어서 좋았고, 여러 가지 정보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이놈의 생각도 다르고, 저놈의 생각도 다르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한 번쯤은 정리해야 할 이야기였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병문안 때문에 정작 김현성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과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게 단점 아닌 단점이었지만, 얘네 얼굴은 감금당할 당시에 질리도록 봐왔다.
조금은 주변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건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게 분명하다.
최근 조금 조용해진 건 아마 그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아리스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등 별별 이야기를 다 꺼내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헐레벌떡 허겁지겁 뛰어오는 소리, 쿵쾅쿵쾅 땅이 울릴 것 같은 소리는 확실히 녀석이 맞다.
“형님! 어? 오스칼 님도 있었구만!”
“아, 안녕하세요.”
“항상 수고가 많수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형님.”
“어?”
“거울 호수로 보트 타러 갈 시간이요!”
“뭐?”
“형님이 맨날 맨날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거울 호수로 다 같이 가기로 했다, 이 말이요!”
‘내가 언제… 가고 싶다고 했어, 이 돼지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