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2
회귀자 사용설명서 532화
거울 호수(2)
“갑자기 거긴 왜 가. 복구 작업은? 다른 할 일은 또 없고? 대륙 합동 훈련도 다시 진행해야지.”
“복구 작업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도중이고, 대륙 합동 훈련도 시간이 조금 남았다니까. 아무래도 커다란 전투가 끝난 직후인데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니요. 짧은 휴가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다시 시작한다면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을 텐데…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던전이나….”
“형님 자고 있었을 때 이미 한번 다녀왔다니까!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그 몸으로 던전에 들어간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마쇼. 안 그래도 현성이 형씨가 형님이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린델로 향할 거라고 걱정하던데.”
“그건 그렇지만….”
“대륙인들이 원하는 건 형님이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아니요. 좋은 곳에서 좋은 것 먹으면서 편하게 쉬고 있다는 소식이지. 안 그래도 그 부작용 때문에 근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있는데, 탱자 탱자 놀면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고는 알려야지. 형님도 이제 형님이 대륙에서 어떤 의미인지… 대충 알 필요가 있다니까.”
“아니.”
“나도 몇 번 가 본 적 있었는데, 확실히 기대해도 된다니까. 아마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그곳보다 아름다운 곳은 찾기 힘들 거요.”
“네가 거길 언제 가봤어?”
“거, 옛날에 몇 번… 뭐, 사전 답사한다고 생각하고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오스칼 님도 같이 갈 거요? 아마 간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할 거요.”
“아니요, 아무래도 저는… 교국을 지킬 사람도 필요하니까요. 여러 가지로 바쁘기도 하고….”
“제가 뭔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뇨, 명예추기경님은 다녀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계속 달려오셨는데, 조금은 숨을 돌릴 시간도 필요하잖아요? 아주 예전에 길드원분들과 다 함께 피크닉을 간다고 하셨던 게 엊그제 같은데… 모두 함께 가는 건 처음 아닌가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부족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나라를 돌보고 있겠습니다.”
“거,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구만! 현성이 형씨도 많이 기뻐할 거요! 사실 현성이 형씨가 수줍음이 많아서 제대로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것 같더라고. 조금 고민하는 것 같은 찰나에 내가 딱 말하니까 엄청 기뻐한 것 아니요. 하얀이 누님은 말할 것도 없고! 슬슬 형님도 하얀이 누님이랑 더 높은 계단을 향해 한 발자국 몸을 옮겨야 할 시기인 만큼 이번 여행은 중요하다니까. 이 박덕구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걱정 따위는 날려버리쇼.”
“그런 게 아니라….”
“형님이 하얀이 누님을 아낀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제 누님도 다 큰 성인이요. 지켜준다느니 뭐, 아껴주고 싶다느니 그런 건 너무 구시대적 발상이라니까. 좋으면 좋아한다고 마음으로도 표현하고, 몸으로도 표현하는 게 제일이지. 그게 연애 박사 박덕구의 솔루션이요.”
‘걔가 날 안 지켜줄 것 같은데….’
“그, 그래도 너무 갑자기 가까워지면 조금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명예추기경님, 정하얀 님께서 당황스러워 하실 수도 있는 만큼 천천히 다가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도 여자 마음은 여자가 더 잘 안다고….”
“아니라니까. 연애 박사로서의 촉이 말해주고 있는데, 하얀이 누님도 형님이 다가와 주기를 바라고 있을 거요. 이미 머릿속으로는 이런 짓, 저런 짓, 다 했을지도 모른다니까. 분명하다니까. 음음!”
‘이 새끼는 왜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거야.’
박덕구가 이번 전투로 얻은 특성, 사기의 외침이 그 사기의 외침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림 없는 올곧은 표정은 자신의 말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새.
모든 걸 뚫어볼 것 같은 눈에 괜스레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번에는 피크닉이야?’
김현성은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무의식 세계에서 함께 거울 호수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다고 한들, 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였으니까.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현재의 배경을 생각하면 한가롭게 여행을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아마 녀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고민했을 것이다.
그 시점에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건 아마 눈앞에 있는 돼지일 터.
분명히 평소처럼 이해는 안 되지만, 왠지 수긍이 가는 외침으로 파란 길드의 거울 호수행을 지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도 거절할 만했겠지만, 아마….
‘내 기분을 생각해 주는 거겠지.’
여신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한들 마음속에 있는 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기는 했지만, 간혹 씁쓸한 표정을 짓거나 멍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직도 죄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떡밥을 던진 것뿐이었지만,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종류의 휴가가 도움을 줄 거로 생각한 것 같았다.
둠기화를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현 김현성에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쪽의 멘탈을 케어하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다.
확실히 현시점에서 잠깐 이나마 숨을 돌리는 건 도움이 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길드원들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얘네도 심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을 테니까.
이쪽을 감금하면서 본인들 나름대로 만족감을 채우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다 함께 웃고 떠들며 하하 호호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지는 않을 거다.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박덕구 이 돼지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진다는 것만 아니면 당장 수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여러 가지를 떠올려 봤지만, 역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정답처럼 느껴졌다.
‘별일이야 있겠어.’
김현성과 둘만 있는 시간도 만들기는 해야 했으니까. 아마 밖으로 나가면 그런 분위기가 좀 더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가는 거요? 마는 거요? 아니, 솔직히 꼭 갔으면 좋겠다니까. 아니, 이건 형님이 안 간다고 해도 내가 꼭 끌고 갈 거요! 거절은 없으니까 그렇게 아쇼.”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 덕구야. 확실히… 매번 간다고 간다고만 말했지 실제로 간 적은 없었으니까. 이번에 한 번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정말이요?”
“그래.”
“예쓰! 예에쓰!”
‘이 새끼 지나치게 좋아하는데.’
꼭 거기에 서프라이즈 파티라도 숨겨놓은 것 같은 반응이다.
우당탕탕 달려들어 와 이쪽을 번쩍 들어 올리기까지. 이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됐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비행기 태워주기에 정신이 없다.
“정말로 가는 거요?!”
“그래, 간다니까.”
“이번에도 안 간다고 하는 줄 알고 엄청 긴장했다는 거 아니요. 내가 이번에는 갈 줄 알았다니까.”
“그렇게 가기 싫다고 했었나.”
“한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 물어봤을 거요. 매번 물어볼 때마다 형님은 바쁘거나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고… 오스칼 님은 정말로 안 갈 거요?”
“네,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요.”
“하긴… 지금 상황에 가기는 역시 조금 그렇긴 하지. 이거 괜스레 미안해지는구만….”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후에도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거, 그렇게 생각해 주면 다행이고….”
“그럼 출발은 언제 하는데? 아무래도 준비하려면….”
“지금 당장!”
“어?”
“지금 당장 가도 된다니까. 이미 준비는 끝냈다니까.”
‘이 새끼, 추진력이 무슨….’
확실히 추진력 하나는 어마어마하다. 이번에도 가기 싫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일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환호성을 지른 이유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 이미 옷도 입고 있는데 그대로 나가면 될 거요. 큼지막한 마차 한 대도 준비해 놨고, 거기에 있을 건 다 있으니까.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니까.”
“…….”
“거, 빨리 밖으로 갑시다.”
“길드원들만 가는 거 맞지?”
“용병 여왕님이랑 무녀님한테도 물어보기는 했는데 바빠서 못 올 것 같다고 합디다. 아무래도 길드원들끼리 움직이는 자리니까 조금 끼어들기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사실 용병 여왕님까지 린델을 비우면 도시가 돌아가지 않으니까. 무녀님도 마찬가지고.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거요. 아무튼, 여기에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나갑시다. 돌아오는 길에 선물 사 올 테니까, 오스칼 님도 잘 지내쇼.”
확실히 콘셉트 자체를 길드 소풍으로 잡은 것 같았다.
애초에 차희라와 카스가노 유노가 현시점에서 도시를 비울 수 있을 리 만무.
파란 길드가 린델을 비운 상태에서 붉은 용병까지 빠져 버린다면 아마 혼란이 더욱더 가속화되리라.
아리스 시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녀석과 함께 교황청의 안을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잘 다녀오라는 관계자들의 인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응수해 주며 바깥으로 나간 순간 이쪽의 눈에 비치는 것은 정하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차희라.
“어….”
다시 한번 눈을 비비고 바라봐도 정하얀과 차희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다.
물론 둘의 표정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기는 하다.
어떻게 지냈는지 대충 안부를 물어보고 있는 모양.
괜스레 한 번 더 눈을 비벼봤지만, 여전히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데면데면하기는 해도 사이가 나쁜 것보다는 좋은 게 좋지 않겠는가.
아마 이것도….
‘이번에 일어난 일 때문이라도 생각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을 듯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이 차희라에게 우호적이었던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적폐 늙은이가 사람을 시켜 도시에 테러를 일으켰던 당시, 차희라가 나를 구해준 것을 보고 그녀의 존재를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심정이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본인이 혼자 감당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모든 일을 망쳐 버리고 만 상황에서 차희라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김현성과 정하얀의 멘탈이 나간 시기에도 최전방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고 실제로 악마 군주 하나를 밀어붙이는 위용을 선보였다.
어시스트한 것은 정하얀, 마무리한 것은 김현성이었지만, 이번 전투의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차희라의 결단과 희생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었다.
‘팀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사실상 마지막 화염구 빼고 한 게 없는 정하얀의 입장에서, 다시금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대륙에서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이 여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선 것이 아닐까.
영악하게 다 보이는 잔머리를 굴리는 쪽이니 아마 내 추측이 맞을 것이다.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자 어느덧 정문을 지나 길드원들이 나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박덕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차희라는 곧장 다가와 평소와 같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잘 다녀오라는 말이겠지, 뭐.
“몸은 좀 괜찮지, 자기?”
“응, 거의 괜찮아지기는 했는데… 정말로 안 가게, 누나?”
“마음 같아서는 자기랑 지인하게 놀고 싶기는 한데… 직장 동료와 함께 놀러 가는 데 붙잡을 수가 있나. 얼굴에 철판 깔고 합류할까… 생각은 해봤었는데, 그쪽 길드 마스터가 은근히 눈치 주더라니까. 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더러워서 안 간다고 이야기했다니까. 아무튼, 잘 다녀오라고 말이나 하려고 왔어.”
“그거 아쉽게 됐네. 카스가노 유노도 그래?”
“그쪽은 정말로 바쁘고, 왜 이번에 연방 파이 다툼에 그쪽 입김이 조금 세거든. 안 그래도 저번에 만났을 때 편지 한 통 전해달라고 하길래. 그것도 가지고 왔어.”
“아. 고마워, 누나.”
‘희라 누나, 파워 인싸네….’
카스가노 유노와도 친하게 지내고 있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긴밀한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엘레나나 이지혜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종종 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심지어 최근에 밖으로 나갔을 때는 선희영이랑 카페에서 있는 모습도 본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길드원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나쁘게 보일 리가 있겠는가.
서비스 삼아 살짝 팔을 벌리니 내 예상보다 꽈악 나를 껴안아 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귓가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돌아올 때 선물 사 와. 그리고 이번 여행 끝나고 나면 삼일 밤낮 동안 내 시간이야.”
‘희라 누나, 그건 쫌….’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지만, 다치지 않게 잘 다녀오고. 그리고….”
‘나도 그러고 싶어, 누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뭔가 일이 터져도 가면은 쓰지 마. 내 말 알아듣지? 최대한 정하얀 쪽에 붙어.”
‘이 말을 여기서 들어보네. 키야….’
“그럴 일 없어.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 위험해질 리도 없고….”
“그냥 노파심에서 하는 소리야. 자기도 알고 있잖아. 자기랑 종류는 다르지만 나도 비슷한 거 하나 가지고 있는 거. 애초에 위험성 측면에서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그런 종류로 얻은 힘은 어떻게든 대가를 받아내게 마련이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괜히 잔소리가 길어졌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돌아온 뒤에 삼일 밤낮으로 나눠보자고. 사랑해, 자기.”
“어….”
“사랑한다고.”
“나… 도 사랑해, 누나.”
조금은 반강제적으로 대답한 느낌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둠기화 떡밥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