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5
회귀자 사용설명서 535화
히든 피스(2)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는 건 나중이었다.
마치 거울에 뒤집히듯 뒤바뀐 풍경에 의문을 제시할 만도 했지만, 일단은 현재 상황부터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눈앞에 보이는 비상식적인 풍경을 목도한 순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어느 한 곳으로 특정되지 않은 거대한 파도가 사방에서 덮쳐왔다.
“마법! 마법!”
내 목소리에 정하얀이 급하게 주문을 외웠지만, 이미 들이닥치고 있는 파도를 완전히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커다란 배가 충격으로 튕겨 나가는 순간 배 위에 서 있던 길드원들 역시 튕겨 나가려고 한다.
몇몇은 난간이나 커다란 기둥을 붙잡아 파도에 휩쓸리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연약한 내 몸이 이 정도의 충격에 버틸 리 없지 않은가.
난간을 꽉 붙잡았던 손이 저절로 풀린 이후에는 시야가 빠르게 돌아간다.
눈 깜빡할 사이에 공중으로 붕 떠버린 몸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제기랄!’
서둘러 손가락을 튕겨 연금 소환 마법을 시전하고 싶지만, 냉정한 머리와는 다르게 몸은 공중에서 발버둥 치며 허우적거리기에 여념이 없다.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파도가 팔을 때렸고, 그 결과 몸의 중심을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었다.
“오빠!”
정하얀의 비명과 함께 내 손을 붙잡는 감각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힘들게 시선을 돌리니 김현성이 이쪽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게 시야에 비쳤다.
“괜찮으십니까?”
“현성 씨?”
회귀자의 따뜻한 품속에 있으니 이제 난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안전하다. 아주 약간이었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상상했던 것처럼 나쁜 상황은 아니다.
한소라와 엘레나는 운이 좋게 벽에 튕겨 나간 이후 김창렬에게 잡혀 있었고, 황정연은 박덕구가 붙들고 있다.
유아영, 김예리나 조혜진 같은 전위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무사한 것을 보니 능력치가 높은 이들은 버텨낼 수 있는 충격이었던 모양.
하지만 신체 능력치가 낮은 후위들은 그렇지 않다.
길드에 마지막으로 남은 후위 한 명을 찾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선희영이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떨어지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 남아서 구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옆쪽에서 거대한 파도가 다시금 들이닥치며 그녀를 집어삼킨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황급히 마음의 눈을 발동시켜 안쪽을 바라보자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선희영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김현성에게 반쯤 안긴 채로 손가락을 튕기자 거대한 용의 꼬리가 마법진과 함께 연성되었다.
혹여나 파도에 흐트러질까 걱정했는지 황정연과 엘레나가 연성된 꼬리에 강화 주문을 불어넣는다.
그 순간에도 선희영은 계속해서 보트에서 멀어지는 중.
‘닿아라. 시바, 닿아!’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모습에 김예리가 이를 질끈 문 채로 소환된 꼬리를 타고 달려나가고 있지만 길드의 꼬맹이가 달리는 것보다 선희영이 멀어지는 게 더 빠르다.
심지어 들이닥친 파도로 인해 꼬리에 단검을 박은 채 버틸 수밖에 없는 상황, 김예리도 위태로워 보인다.
최악의 전개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을 때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은 뜻밖의 천운이었다.
반대쪽에서 덮쳐온 파도가 선희영을 이쪽으로 밀어낸 것이다.
‘나이스! 나이스!’
작게 주먹을 꽉 쥔 순간 용의 꼬리가 선희영을 붙잡은 것이 눈에 보인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또다시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쳐왔다.
“막아! 막아!”
“이이이이익!”
주문을 완성한 것은 우리 존재 정하얀. 시연한 것은 라이오스에서 한 번 쓴 적이 있었던 압축 마법.
콰아아아아!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죽일 듯이 이쪽을 덮쳐왔던 파도가 한순간에 압축되어 사라져 버렸다.
“나이스 정하얀! 나이스으!”
놀라움을 표현한 것도 잠시, 한소라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이쪽의 몸들을 감싸는 검은색 사슬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포박하기 위해 주문을 외운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튕겨 나가지 않게 조치한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자석처럼 배에 딱 달라붙은 신체를 보니 역시 마법의 위대함에는 엄지를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정신을 잃은 선희영이 배 안쪽으로 무사히 도착. 물을 먹었는지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조치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엘레나가 달려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이건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다.
“예리야, 희영 씨 좀 꽉 붙잡아. 현성씨 는 덮쳐올 파도에 대비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빨리요.”
“…….”
“네, 알겠습니다.”
사랑스러운 회귀자라면 뭐가 됐든 알아서 조치해 주겠지. 아마 예상하건대 이 배로 저 웜홀을 통과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무르거나 배를 뒤로 돌리는 건 암만 생각해도 난파 엔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시바, 이 배가 있어서 다행이지.’
단언컨대 초기에 만들어져 있던 박덕구 마크1이었다면 지금쯤 길드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뒈질 시간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머릿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 미안하기는 하지만 앞섬을 풀어헤치고 가슴 정중앙 부분을 계속해서 짓눌렀다.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내 기억대로라면 분명 맞을 거다.
간헐적으로 몸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튕겨 나갈 정도는 아니다.
기도를 확보한 이후에는 입을 가져다 대고 계속해서 숨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초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김예리가 선희영의 손을 꽉 붙들고 있는 게 보인다.
조금씩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컥 하는 소리와 함께 선희영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다.
다시 한번 반복. 입술을 가져다 대고 수십 번 정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자, 다시금 울컥 하는 소리와 물이 역류하는 것이 보였다.
이다음은 미약한 신성력을 쏟는 것으로 마무리.
정신이 깨어나면 선희영 본인이 자신의 몸을 치료할 수 있을 테니, 이 정도 응급처치가 딱 적당할 거로 생각했다.
이 광경을 본 정하얀이 파도로 몸을 내던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보지도 못한 듯했다.
신이 도운 건지, 조금 전까지는 파도가 덮쳐오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본격적으로 배가 흔들리고 있었으니, 여기에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자연이 씨바… 위대하기는 위대하다.’
괜히 마법이 자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아니다. 파란 길드가 처한 현 상황을 생각하니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
신화급 마법의 안에 갇혀 있다고 표현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막말로 현재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파도가 대륙에 들이닥친다면 멸망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연출하게 되리라.
온 도시가 파도에 휩쓸리고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쓸려나가는 것은 물론 복구할 수조차 없을 게 분명했다.
전지전능한 신이 대륙에 심판을 내리는 모습이 이러할까.
방주를 타고 세계를 표류했던 노아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불안감만큼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일맥상통하리라.
여기를 봐도 파도, 저기를 봐도 파도.
배를 완전히 삼킬 것처럼 덮쳐오는 파도는 후위들이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지만, 대충 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파도가 갈라지는 진풍경을 김현성이 보여주고 있지만, 녀석 개인의 힘으로는 계속해서 밀려들어 오는 파도를 감당할 수가 없다.
“박덕구, 핸들 잡아!”
“어? 어?!”
“조타 핸들 잡으라고! 핸들!”
“아… 아! 알겠다니까!”
그제야 박덕구가 허겁지겁 뛰어가 핸들을 잡았다. 앞쪽에서 오는 거대한 파도는 피하고,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는 게 맞다.
어찌 됐든, 이 웜홀을 통과하는 게 먼저다.
“안기모 씨, 돛! 돛 펴요! 돛!”
“우웨에에에엑!”
‘시바… 해적은 무슨.’
“돛! 돛!”
“우웨에엑! 네… 알겠! 웨에에에엑! 잠시만… 웨엑!”
‘바다 모험은 개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창렬아. 시바, 네가 해라.’
답답하면 니들이 직접 뛰어보든지를 실현하듯 김창렬이 돛을 활짝 펴자, 커다란 배는 본격적으로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준비를 마친다.
도대체 뭐에 영향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배가 순식간에 앞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배를 움직인 박덕구가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핸들을 움직인다.
사실 지금 배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반쯤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면 거의 직각으로 파도를 타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한 시름을 놓으니 조금 더 정확하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앞, 뒤, 옆, 심지어는 위까지 파도로 꽉 차 있는 공간은 어떻게 생각해도 비현실적이었다.
어째서 천장에 있는 파도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배는 파도를 피해 옆으로 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현실 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옛날에 봤던 인뭐셥이라는 영화를 저도 모르게 떠올렸을 정도로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여나 차원의 미아나 균열 같은 곳을 떠돌아다니고 있는지 걱정된 것이 당연하리라.
“꽉 잡으쇼! 꽉 잡으쇼!!”
쾅!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린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박덕구, 저 돼지도 지금 자신이 어떻게 배를 움직이고 있는지 모를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커다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이 웜홀을 돌파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게 보인다.
어디선가 연습이라도 해왔는지 제법 훌륭한 컨트롤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주 조금 여유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왔다고 한들 방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정하얀과 김현성, 조혜진은 옆쪽에서 오는 파도를 최대한 마크하고 있었고,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마법을, 엘레나는 계속해서 신성력을 뿜어대고 있다.
조금 더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
-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쏴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고래 같은 자식이 파도를 뚫고 튀어나온 것.
“저건 또 뭐야….”
“미친….”
마음의 눈으로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확인할 수조차 없다.
적어도 디아루기아의 몸보다 열 배는 더 커다란 것 같은 이형의 생명체는 이쪽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작은 배를 지나치고 있었다.
마치 폭포수같이 물과 함께 튀어 오른 생명체가 바로 위쪽에 있는 파도 속으로 몸을 내던진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 여파로 엄청난 양의 물이 배 위로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거대한 보호막이 배를 감싸 안았지만, 무게 때문에 배가 아래로 가라앉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물속으로 들어간 배는 다행히 곧바로 위로 올라왔지만, 모두 할 말을 잃고 서로를 바라봤다.
“…….”
“…….”
배가 물속에 들어간 순간, 내가 본 것과 똑같은 걸 봤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저씨, 봤어?”
“어… 봤어.”
뭔가 이상한 곳으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김예리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박덕구가 준비한 회심의 나이스 보트는 파도의 웜홀을 뚫고 나갔고 그와 동시에 귓가로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화 등급의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악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씨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