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6
회귀자 사용설명서 536화
히든 피스(3)
파도의 웜홀을 빠져나온 그 직후, 배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잠잠한 파도만큼이나 조용한 장내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도시도 집어삼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파도의 길을 빠져나온 이후 시야에 비친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망망대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조심스레 박덕구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형님,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오게 된 것 같은데….”
“…….”
“…….”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이 새끼야.’
문제는 여기가 정확히 어디냐는 거지.
김현성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회귀자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건 애초 성립되지 않은 이야기지만, 무려 신화 등급의 던전이다.
떡밥이 워낙 커다란 만큼 알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알고 있지는 않아도 굵직굵직한 사건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있었던 1회 차에서 이 던전은 발견된 적이 없다. 아마 김현성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발견된 적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숨기려고 노력한다고 한들 이런 던전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만약 발견됐다고 해도….’
죽었을 확률이 90%가 넘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박덕구가 만들어온 나이스 보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기가 막히게 잘 때려 맞추네. 이 새끼는….’
던전에 들어온 것은 박덕구 때문이었지만,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도 녀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어 녀석을 흘겨봤지만, 박덕구는 죄책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얼굴은 자신이 바라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눈물도 훌쩍이고 있다.
덩치에 맞지 않게 턱을 덜덜 떨며 쏟아지는 눈물을 꽉 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로 미안할 것이다. 즐거운 휴가가 갑작스럽게 생존게임으로 바뀐 셈이었으니까.
사실 녀석의 탓은 아니었지만, 저 돼지 성격상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도 높고….
괜스레 상태창을 확인하자 눈에 띄는 것은 일반 이하로 랭크된 낮은 박덕구의 행운 능력치.
‘시바,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어떻게 보면 아주 우연히 던전 하나를 찾은 거라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정도면 필연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베니고어나 엘룬이나 로렌은 알지 못하는 뭔가에 간섭으로 인해 여기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진다.
당장 이 무능력한 신들에게 다른 연락도 되지 않는 상황.
더 이상 폭거에 견디다 못해 나를 날려 버린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김현성까지 이쪽으로 보낼 리는 없지 않은가.
다시 한번 박덕구가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 미….”
“됐다, 덕구야. 네 잘못 아니니까.”
괜히 더 기죽기 전에 이쯤에서 말문을 트는 게 맞다.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잘못 아니니까. 애초에 지금 잘잘못 가린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니고, 지금은 상황 파악부터 하는 게 먼저야.”
“그래도….”
“식량 있어?”
“배 안에 있을 거요.”
“물은.”
“그것도… 배 안에 있을 거고… 기본적인 건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될 거요.”
‘준비 하나는 철저하게 해놨네, 이 새끼. 무슨 거울 호수에서 몇 개월을 놀려고 작정을 하고 왔나.’
“뭐라도 알아낸 게 있거나 의심이 가는 길드원이 있으면 일단 말부터 꺼내봅시다.”
한마디 내뱉자 더 조용해진다. 슬그머니 황정연을 바라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얘가 가진 지식이랑 초기억력이 도움되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네.”
“아마 지금 저희가 거울의 뒷면에 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
“단순한 가설일 뿐이니까 그렇게 귀담아 듣지는 마세요. 애초에 거울 호수가 비추고 있는 세계의 뒷면이라고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마 게임에서 자주 등장하는 히든 피스 같은 개념일 거로 생각해요.”
“히든 피스?”
“말 그대로 숨겨진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누군가 이 대륙을 설계할 때, 의도적으로 이런 장소를 만들어놨다는 거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게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생각건대 누군가 저희를 이끌었다는 게 타당하다고 봐요. 단순히 우연으로 생각하기에는 저희가 지금 처한 상황과 타이밍이 너무 맞아 떨어지니까요.”
“누가?”
“그건 저도 모르죠. 어쩌면 베니고어 님일지도 모르고 이 대륙을 관리하는 신일 수도 혹은 악마일 수도 있고, 그것보다 더 위에 있는 상위의 존재일 가능성도 있어요.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지만 연어가 호수에 살고 있었던 것도 이해가 가네요. 어쩌면 거울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강일 수도 있겠어요. 지금 저희가 있는 곳과 저희가 왔던 세계를 잇는 강이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도중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저희 눈에는 고여 있는 호수로 보였지만… 걔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맛있었구나… 싶었다니까요.”
“우스갯소리라기보다는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네요. 세계를 잇는 강이라니….”
“그 파도의 웜홀도 그렇고요. 모두 보셨죠?”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게 시야에 비친다.
뭔가 복잡하다는 표정들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리액션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여기 있는 대부분은 일반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세계의 진실이야 아무 상관하지 않는 것 같은 정하얀은 이쪽의 얼굴만 보고 헤실헤실대고 있었지만, 서민 오브 서민에 빛나는 한소라나 안기모의 표정은 아직도 멘탈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도의 웜홀을 통해 우리가 목격한 것은.
“우주.”
말 그대로 커다란 우주였다.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행성들과 그 안에 사는 이들, 떠다니는 빛무리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생명체.
어떻게 그걸 다 내려다볼 수 있었는지는 설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파란 길드원들은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 많은 행성과 차원 중에 지구도 있지 않을까. 있을 게 확실하다.
황정연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인지 계속해서 개인적인 사견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는데 꽤 공감되는 이야기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학자의 관점에서 해석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후로 입을 연 것은 김현성이다. 녀석다웠고, 녀석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까지 보셨을 겁니다. 혹은 우주를 표류하는 생명체들, 아마 서 있는 위치가 달랐던 만큼 다들 눈으로 본 게 다를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명씩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처음에 입을 뗀 것은 김예리.
“하얀이 언니랑 닮은 사람.”
“뭐?”
“하얀이 언니랑 닮은 사람 봤어.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그냥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어. 머리는 조금 더 길었던 것 같았고, 나이도… 기억하려고 하니까 머리 아파.”
그다음은 박덕구였다.
“나, 나는 그… 균열 박물관에서 봤던 검을 들고 있는 몬스터를 본 것 같다니까.”
“고대 신?”
“아니, 고대 신 말고 그거랑 같이있던 괴물 말이요. 머리에 뿔 달리고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그 녹색 괴물. 그때처럼 죽은 것 같이 보이는 더미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습이었고… 조금 소름이 돋는 건….”
“뭔데.”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니까.”
‘이 새끼,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정말이요. 나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아주 잠깐이었지만, 현성이 형씨랑 형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었던 것 같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듯이 웃고 있어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는 거 아니요, 내가 진짜.”
그다음이 안기모다.
“그냥 평범합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을 봤습니다.”
이어서 계속해서 말을 내뱉는 이들이 보였지만, 특별한 걸 본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저는… 지구처럼 보이는 장소에 있는… 부길드마스터랑 닮은 사람을 본 것 같습니다. 어려 보였고 여자였는데… 조금 이상한 여자 같아서….”
“동생이 한 명 있기는 있습니다. 만약 혜진 씨가 봤던 게 제 동생이 맞으면 재미있겠네요. 뭘 하고 있던가요.”
“…….”
“…….”
‘왜 시바… 뭐 하고 있길래.’
“아니, 그냥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뺨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돈뭉치 같은 거로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의 뺨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구두로 머리를 질끈질끈 밟기도 했고요.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빌 듯이 구걸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는 미친 것처럼 웃으면서….”
“그만 말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인가 봅니다.”
이율하가 맞다.
‘또라이 같은 년, 이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거의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은 일단 최대한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 중요한 건 걔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아니었으니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길드원들은 이율하에 대한 관심을 떨쳐낸 모양이다.
조혜진은 실제 여동생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실제 가족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기영의 가족보다는 다른 곳에 더 집중하고 있는 느낌.
아니나 다를까 우물쭈물 눈치를 보고 있던 한소라가 입을 열었다.
“지구… 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라… 지구와 닮은 행성은 많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에… 만약 정말로 조혜진 님이 보신 게 지구가 맞다면… 저희… 그…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정연 언니가 말했던 것처럼 아까 봤던 파도의 웜홀이 정말로 차원을 잇는 강이라면 저희가 지구에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니, 베니고어는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여기로 소환된 이들은 지구에서 버림받은 이들이니까.
아마 평범한 방법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싶다. 한소라의 필사적인 질문에 대답한 것은 김현성이었다.
“불가능할 겁니다.”
“네?”
“저희가 믿을 수 없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맞지만 그게 거기까지 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애초에 차원의 바다를 뚫고 갈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어불성설이고요. 배는 물론이거니와 저희의 몸이 버틸 수 없을 겁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실제로 닿을 수는 있는지, 만약 실제로 닿는다고 하더라도 들어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접으라는 이야기지.’
희망을 너무 무참히 박살 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쓸데없는 꿈은 버려두는 게 맞다. 괜히 헛물 켜다가 개고생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끊는 게 정답이라는 거다.
그렇게 한 사람씩 모두 이야기를 끝내고 있었던 시점에서 정신을 차린 선희영이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뭘 보고 왔는지 궁금한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직접 파도의 웜홀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었으니까.
“…….”
“…….”
“신.”
“네?”
“대륙의 신과는 조금 다른 신을 본 것 같습… 니다. 네, 조금 다른….”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우터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