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0
회귀자 사용설명서 540화
김현성 대 박덕구(2)
옛날 버릇 못 버린 돼지가 슬슬 시동을 거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온다.
간혹 저렇게 뭐에 꽂히면 자기주장을 확실히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아 방심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치고 들어오는 모습은 암살자 직군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 새끼….’
물론 내가 저 정체불명의 선동에 낚여 창을 선택할 리는 만무하다.
공격력은 충분하다. 애초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은 그 자체만으로도 룽기누스를 상회할 만한 아이템이다.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
김현성, 본인피셜로도 이 검의 힘을 전부 끌어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성장의 여지도 남아 있다.
굳이 사용할 사람도 없는 저 창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는 거다.
‘저걸 누가 쓸 건데?’
대륙 전체를 뒤지면 이 창의 주인이 나오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쪽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조혜진을 믿고 픽하기에는 조혜진의 스펙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김현성이 창을 다룰 수 있다면 또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되겠지만, 애초에 듀렌달을 가진 녀석이 뭐가 아쉬워서 저 창을 선택하겠는가.
“아닙니다. 일단은 정화의 반지가 더….”
“아니요! 무조건 저 창이라니까! 왠지 모르게 필이 딱 꽂혔다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기영 씨에게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는 게 맞습니다. 이 브리이취의 정화의 반지는!”
“그렇게 형님을 못 믿는 거요! 무조건 창이요! 애초에 방어가 불가능한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창을 여기에 버려두고 가는 게 대관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조건만 맞으면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저 창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역시 정화의 반지가 더 낫습니다.”
“나는 형님을 믿는다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요. 창이요!”
“저라고 기영 씨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런 문제는 조금 더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입니다.”
“창이요!”
“반지입니다!”
“창!”
“반지!”
“차으아아아아앙!!”
“반지!!”
“차으아아아아아아아앙!!!”
“반!”
“차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박덕구 이 새끼.’
튜토리얼 던전에서 본 것만 같은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다.
그때 당시 흑마법사를 해야 한다며 소리를 지르던 녀석의 모습을 떠올리자 점점 더 창 쪽에서 마음이 멀어진다.
흑마법사를 선택했어도 나름 좋은 결과를 얻었겠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좋은 최상의 결과를 얻지 않았던가.
김현성의 추천에 따라 연금술사를 선택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한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베스트 초이스였다.
‘초반이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대륙 전체 병력의 질을 높이는 데는 확실하게 성공했으니까. 물론 빛기영 개인의 성공 역시 말이다.
‘아니, 김현성 이 새끼는 초반에 궁수 하라고 했었잖아.’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조금 헷갈린다. 감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은 저 둘의 싸움을 무시하고, 조금 더 이 이벤트에 집중하는 것.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교적 여유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만큼 천천히 여유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옳으리라.
[1시간 후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시바.’
방금 생각은 취소, 최대한 빠르게 가져가야 할 아이템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이 메시지를 본 것이 아닌지,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토론에 참여한 이들은 서로 반반씩 편을 갈라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창을 선택하는 게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하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다.
바닥에 깔린 아이템들을 빠르게 훑어봤지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신화 등급의 이름을 붙이고 있기는 했지만 활용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이 전부, 즉시 전력으로 사용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정하얀이 사용할 지팡이나 김현성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이 됐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갑옷이라든가, 혹은 회피 기능이 붙어 있거나 속도가 빨리지는 장화라든가, 항마력이 높은 멋들어진 망토라든가. 뭐,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차라리 준신화를 가져가는 게 속 편할까 같은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조금 모자라기는 하지만, 준신화 등급의 아이템들도 제법 쓸 만하기는 하니까.
‘제길.’
그래도 너무 아깝다.
일단은 급하게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단호하게 쳐내는 느낌이었지만, 이런 거에 괜히 실랑이할 시간은 없다.
우리 현성이가 상처받을 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지금 김현성은 우리 현성이 아니라 느그 현성으로 변태하려고 하고 있다.
무조건 단호해지는 게 옳다.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자 역시나 당황스러워하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브리이취의 반지는 받지 않을 겁니다.”
“아니요, 무조건 받으셔야 합니다.”
‘김현성, 시바.’
“지금 저에게는 필요가 없는 아이템입니다. 당장 저 아이템을 받는다고 길드와 대륙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진짜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구나 싶다. 결국에는 최후의 무기를 소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을 일발 장전했다. 이런 눈빛을 쏘아 보내기는 싫지만, 말했다시피 지금은 단호한 판단을 내려야 할 때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인지했는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표정을 본 순간, 도박에 가까운 방법이 확실히 먹혀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섭섭합니다.”
“네?”
“그렇게 저에 대한 신뢰가 없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하….”
실망했다는 처연한 표정으로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똥꼬 쇼를 시작.
“제가 분명히 제 입으로 괜찮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덕구 말이 맞아요. 정말로 제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브리이취의 반지를 받아들였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분명 몇 번이나 말씀드린 걸로 기억합니다, 현성 씨.”
“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절대로 반지는 받지 않을 겁니다, 김현성 씨.”
“어어….”
“어째서 가둬놓은 건지 알겠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키야, 먹혔네. 확실히 들어갔네.’
성까지 붙이며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면 이 정도 액션은 보여줘야 했다.
그래도 살짝 비틀거리는 건 너무 오바스러운 반응이 아닌가 싶었지만 케어해 줄 시간이 없다.
“역시 형님이라면 나랑 마음이 맞을 거로 생각했다니까. 그럼 이 창을!”
“아니, 그것도 아니야. 지금은 최대한 빠르게 다시 한번 다른 아이템을 건져 올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롱기누스의 창 빼고는 좋다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없으니까요. 다들 메시지를 들으셔서 알고 있겠지만,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자기 위치로 돌아가서 최대한 많은 선택지 중에 고를 수 있도록 합시다. 최소한 신화 등급 아이템을 3종 정도는 더 뽑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 그렇지만! 형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덕구야. 말 들어.”
‘X나 카리스마 있었어, 시바.’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자 확실히 기가 죽은 게 보였다. 눈치 빠른 다른 길드원들이 순식간에 각자의 자리로 뿔뿔이 흩어진 건 당연한 거고.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선희영과 엘레나는 자꾸만 반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축 처진 어깨로 조혜진과 발걸음을 옮기는 김현성을 보고서는 재빠르게 다른 이들과 같은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슬쩍 다가온 정하얀은 은근슬쩍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저, 저, 저는 오빠 믿어요. 응….”
‘거짓말하지 마. 너도 반지 받으라 그랬잖아.’
확실히 얘가 참 영약한 면이 있다. 대놓고 여우처럼 행동하는 느낌이라 오히려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현 상황에서 정하얀이 얼마나 귀여운지 생각할 시간은 없다.
최대 3개의 신화 등급 아이템은 더 건져 올려야 한다. 박덕구의 말에 낚여 창을 선택하는 건 지양하고 싶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 흐를수록 괜스레 침이 바짝 말라오는 상황, 잘 오던 입질이 왜 이리 안 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최소한 퀘스트 종료 전 5분 정도는 시간을 남겨둬야 하건만, 그것마저 쉽지가 않다고 느껴졌다.
미동도 없는 낚싯대가 원망스러워지는 것은 또 처음.
그나마 간헐적으로 다른 길드원들이 아이템을 건져 올리고 있었지만 전설 등급의 피라미들이 대부분 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썩은 복어같이 하나같이 쓸모없다는 게 문제였지.
“오, 오빠 이것 봐요. 괜찮은 아이템 같아요. 한 쌍의 귀걸이인데 두 사람이 귀걸이를 양쪽에 하나씩 끼면 합, 합체할 수 있게 된대요. 능력치도 상승하고요. 대, 대단한 아이템 같아요. 등급도 신화 등급이고… 근데 한번 합체하면 다시는 두 사람의 몸으로 못 돌아가는 모양이네요….”
‘현기트 만들 일 있나… 뭐, 하나가 되자, 이거야?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하얀아. 트윈 헤드 하얀기영 될 생각은 진짜 없다.’
부터.
“부길드마스터. 사랑의 묘약입니다. 무려. 신화 등급이요. 일회성이지만 절대적인 효과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효과 역시 반영구적입니다.”
별 쓸모도 없어 보이는 신화 등급의 물약.
이곳 기준으로 하위에 불과한 아이템들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30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안 돼….’
씨바,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제길….’
다른 아이템이 등장하지 않으면 롱기누스의 창을 가져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지 박덕구는 초조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아이템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크게 안도하는 모습.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저 창보다는 가치가 떨어져 보이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틀림없으리라.
“시간도 슬슬 끝나가는데… 결정해야 하는 타이밍인 것 같소.”
‘아직 아니야, 이 새끼야.’
[15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형님.”
“5분 전까지 계속해라, 덕구야. 마지막 입질까지 마무리하고 생각해 봅시다.”
“네.”
“네, 부길드마스터.”
‘김현성, 너 이 새끼 너도 낚시해야지. 왜 이렇게 멍 때려, 이 새끼야.’
입질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다.
[10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 초조한 마음에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이템과 힘을 겨루고 있는 길드원들은 소수.
이쯤 해도 나오는 게 없자 박덕구가 주장한 룽기누스의 창으로 거의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역시나 달라지는 게 없다. 갑작스레 몸이 앞으로 끌려간 것은 바로 그때.
‘마지막이야. 시바, 마지막이라고….’
끄트머리에 찾아온 기적.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히트나 다름없다. 손에 힘을 꽉 쥐고 최대한 빨리 끌어 올리려 발버둥 치자 바닷속에 숨어 있던 녀석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5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재빠르게 올라온 아이템의 정보를 확인하고, 룽기누스의 창과 객관적인 비교를 하기 시작,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 간의 특징이 명확했으니까.
[1분 뒤에 던전의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원하시는 아이템을 선택해 주세요.]
재빠르게 널브러져 있는 아이템 하나를 붙잡은 순간,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처럼 거대한 배가 파도의 웜홀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돛 펴요! 돛!! 돛!”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로 거울 호수에 다시 돌아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왔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