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3
회귀자 사용설명서 543화
진심 어린 사과(3)
확실히 시선을 모을 상황이기는 했다. 파란의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가 둘이서 헤르엔을 방문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교국 내에서의 녀석과 나의 인지도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더 그렇다.
혼자 왔어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쏟아졌을 텐데 둘이 함께 모습을 드러내니 어떻겠는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힐끔거리게 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제는 익숙하기도 하고….’
아니나 다를까 헤르엔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도 조금은 배려를 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란 길드가 현재 휴가 중이라는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서 들었을 테니 이곳에 들린 것 역시 휴가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평소라면 악수 한 번 해달라고 달라붙어 왔겠지만, 오늘만큼은 멀리서 바라볼 뿐 굳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건 참 좋네. 이 동네 사람들도 마음에 들고….’
“휴가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 헤르엔에는 갑자기 왜 들르셨지?”
“다른 길드원들은 어디간 거지? 두 분이서 오신 건가 봐. 이런 건 처음 아닌가?”
“쉿.”
그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금방 잠잠해진다.
김현성 이 새끼는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
식당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어! 어… 어? 어서오세요.”
“김현성으로 예약했습니다.”
“아! 아! 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두, 두 분 맞으시죠?”
“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기 가장 괜찮은 게….”
“저희 레스토랑에서 추천드릴 수 있는 메뉴는….”
‘아, 이 새끼. 이거 자리도 테라스로 잡았네.’
레스토랑 종업원은 예약한 김현성이 그 김현성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로 격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대충 알아서 시켜달라고 말하자, 김현성이 메뉴 초이스를 위해 종업원과 함께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가 괜찮은지, 어떤 게 가장 맛있는 음식인지, 토론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몇 분 동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마치 중대한 계약을 앞둔 사업가의 표정이었다.
물론 이쪽은 바깥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다.
“싸우신 걸까?”
“분위기가 조금 냉랭한 것 같지 않아? 아까부터 조금 그랬어. 분명히 뭔가 있는 거야.”
‘있긴 뭐가 있어, 이 여편네들아. 아, 이거 여기 앉으니까 컨셉질도 못하겠다.’
내일 메스컴에서 파란 길드마스터와 이기영 명예추기경의 불화설이 1면에 실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김현성 이 새끼가 이걸 노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 한층 더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야 차단할 수 있지만, 입소문도 조심해야 했으니까.
“저는 이걸로… 기영 씨는….”
“저도 같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 네. 그럼 그렇게 가져다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와인은….”
“미리 준비해 달라고 요청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혹시 전달되지 않은 겁니까?”
“아! 아뇨. 지금 확인… 아, 네. 준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확인한 이후에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두 분 좋, 좋은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와인은 미리 준비하신 겁니까?”
“네. 혹시 그레이브 그레이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데….”
“여기 헤르엔 지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서만 수확되는 포도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레스토랑에서만 판매한다고 하더군요. 그 동굴이 발견된 게 딱 150년 전인데 그 당시 처음 발효시킨 와인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미리 부탁드렸습니다.”
“흥미롭네요. 혹시나 안에 던전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미 몇 차례 조사팀을 보냈지만, 그런 정황은 발견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거울 호수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겠죠.”
“으음….”
“저… 그보다 기영 씨.”
“네?”
“일단은 감사의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네?”
“차원의 바다에서 구한 아이템….”
“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현성 씨가 아니면 쓸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정확히 말하면 제가 드린 것도 아니니….”
“그래도 넘겨주신 팬던트는 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저한테 감사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 리고 그… 바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사과를… 기영 씨는 너무 불편하시고 갑작스러우셨겠지만, 제가 그 반지를 기영 씨에게 드리려고 한 건 어디까지나….”
‘이 새끼는 시바, 뭐 갑자기 여기서 진지하게 분위기 잡고 난리야.’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무척 긴장했는지 마력으로 소리를 차단하는 것도 깜빡 하신 것 같다.
서둘러 마력으로 덮기는 했지만… 훔쳐 듣는 귀가 있었다면 아마 좀금 전 말을 듣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귓속말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이기연 때도 느끼기는 했지만 얘는 진짜….’
타이밍도 잡을지 모르고 분위기도 파악할 줄 모른다. 1회차에 어떻게 대인 관계를 유지했을지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파란 길드원들이 우연히 발견한 던전에서 아이템 분배 문제 때문에 갈등이 있었다는 헛소문은 이미 퍼지기 일보 직전, 아니, 벌써 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쪽의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리지 않겠지만, 아마 갤러리들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부풀리며 재생산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이 분위기도 그래.’
소리를 차단한다고 해서 분위기까지 차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곳 레스토랑에 있는 다른 이들이나 주변에서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 거지 같은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
나 역시 사과를 받고, 슬슬 좋은 분위로 향하는 걸 원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재빠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 하고 싶지 않네요.”
“아… 네.”
김현성 1차 시도 실패. 하지만 재빠르게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당시에는 저도 조금 말이 심했던 것 같았고요. 굳이 이런 자리에서 언급하실 필요 없어요. 마침 주문한 것도 오고 있고요.”
“하지만… 네, 그렇죠. 네, 제가 조금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풀 죽은 표정 하지 마. 사람들 수군거려, 이 새끼야.’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확실히 와인 맛이 괜찮을 것 같아서 정말로 기대되네요. 좋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게 계속 밝은 표정 유지해라.’
“네, 최근에 마신 것 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실 몸이 안 좋아서 그렇게 많이도 마시지도 못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훌륭한 것 같네요. 맛있어요, 정말로.”
“다행이군요.”
“그나저나 식사한 뒤에는 조금 더 둘러보고 돌아가는 겁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아직 들러야 할 곳이 남아 있어서… 경매장도 들러야 하고….”
“뭐 들어온 거라도… 제가 알기로 이곳 경매장은… 아!”
“네. 현재 교국 사정 때문에 그나마 이곳에 있는 경매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물건도 가장 많이 들어올 겁니다. 제 입으로 먼저 이야기 드려도 되지만, 아이템의 답례를 드리고 싶어서… 기대하셔도 될 겁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 시리즈, 또 발견됐나 보네.’
잔뜩 기대하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다지 기대가 되지는 않는다.
어차피 최근에 발견된 놈들은 별다른 기능이 없는, 그놈이 그놈인 녀석들이었고, 디자인 자체도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김현성이 가장 처음에 선물한 무한의 가방 같은 종류도 이미 전시장에 넘치고 넘친다.
그나마 의의가 있는 건 빈 장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놈을 찾을 수 있다는 것 하나. 그래도 일단 기대된다는 표정 정도는 보여주자.
주변 갤러리들의 분위기도 조금 환기해야 했으니까.
계속 애매한 분위기를 잡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해 최대한 밝은 모습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굳이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어나기는 한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셰프가 혼을 갈아 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메인도 완벽하고 와인도 완벽하다. 저 종업원도 서비스가 확실하고….
마치 린델이나 교국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좋아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어느새 평소와 같이 대화를 나누게 된다. 뭐, 사업 이야기부터 길드 내 이야기.
평소 김현성과 하던 잡담으로 1시간 정도를 보내자, 식사가 끝난 이후 경매장 안으로 들어와 있었고, 별 기대 하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괜찮은 기능의 컬렉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상승의 가방-전설 등급]
[전설적인 사냥꾼이자 가죽 세공의 장인,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수 세기 전에 만들어놓은 가방 시리즈 중에서도 역작으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정체불명의 가죽을 장인이 직접 마감한 이 가방은 모험가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편한 것은 물론, 방어구와도 같은 내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보관 확장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방 안에 보관하고 있는 물품은 일정 시간이 지난 이후, 페널티 없이 등급이 상승합니다. 등급을 상승시킬 수 없는 경우 아이템 효과를 올려줍니다. 마력 스텟을 3 올려주는 부가 기능이 있습니다.]
‘개 씨바….’
무한의 가방처럼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가방 안에 보관하고 있는 물품의 등급을 상승시켜 주는 가방이란다.
‘씨바, 이거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물론 준신화 등급의 빛 폭탄 물약을 상승시켜 신화 등급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겠지만 그게 어딘가.
전설 등급의 용 숨결 물약의 효과를 아주 조금만 더 올릴 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 가치가 차고 넘친다.
촉매나 다른 영웅 등급의 물약들 역시 마찬가지. 용도에 따라서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전설 등급 중에서도….’
최상위라고 분류할 수 있는 아이템. 어느 정도 아이템 욕심에 초탈해 있었지만, 저 정도라면 눈이 돌아갈 만하지 않은가.
‘다른 직군도 충분히 쓸 만한 가방이야.’
이를테면 화살을 보관하는 궁수, 독을 보관하고 싶은 암살자, 나처럼 생산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직군.
굳이 김현성이 아니더라도 내가 내 돈을 털어서 구입할 기분이 들 만한 퀄리티였다.
‘시바… 가방, 괜히 안 들고 왔네.’
현금은 모조리 그쪽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제발 김현성이 저걸 구입할 만한 현금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초조한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곧바로 사회자는 본격적으로 경매를 진행하기 시작. 확실히 초장부터 붙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지금 보니 같은 교국 8좌에 자리한 궁수도 눈에 보였고, 어디서 돈깨나 있다고 하는 놈들은 죄다 집결해 있는 상태.
김현성과 내가 있는 걸 보고는 제법 초조한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는데, 열정적으로 팻말을 들어 올리며 가격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점점 더 불어나는 가격에 김현성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서린다.
아마 본인이 예상했던 금액을 훨씬 웃돌거나 가져온 현금이 아슬아슬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경매장에서는 가져온 금액으로만 경매에 참가할 수 있으니까.
김현성도 계속해서 팻말을 들어 올리고 미친 듯이 튀어나가기 시작하는 가방의 가격은 이미 한화 50억을 돌파하고 있었다.
‘바람잡이 새끼들, 시바.’
작전 경매의 일환인지 일부로 가격을 계속 높이는 놈들도 눈에 보인다.
“5만 골드입니다. 더 이상 없으십니까?”
“…….”
“네. 23번 참가자분께서 6만 골드.”
‘현성아, 너 시바 큰 거 몇십 장 정도는 들고 다니지?’
“11번 참가자분께서 30만 골드….”
‘너무 올랐는데… 하….’
점점 더 초조해지는 내 얼굴을 봤는지, 김현성은 단호하게 팻말을 들어 올렸고
“아… 네, 28번 참가자분께서 100만… 골드… 100만 골드로… 더 이상 없으시면 낙찰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아무리 괜찮은 아이템이라고는 하나 현실적이지는 않은 가격.
‘김현성… 너 이 새끼….’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작은 앙금이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 역시나 진심을 담은 사과는 언제나 통하는 법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