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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44화 (535/1,590)

# 544

회귀자 사용설명서 544화

고백(1)

‘크으으으.’

“괜찮습니다. 이건 너무….”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로 기영 씨에게 필요한 물건일 테니까요.”

‘아니, 이 사람이 내가 이런 거로 흔들릴 사람인 줄 아는가! 다시 넣어두게. 허허, 거 참….’

“하지만….”

“꼭 필요하실 겁니다. 펜던트의 답례이기도 하니 너무 마음에 두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만, 크흠.’

내가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선물이라는 건 언제 받아도 기분 좋은 법이다.

별 쓸모없는 물건을 받아도 그러할진대 가치 있는 물건을 받으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흥얼흥얼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 맨 처음 무한의 가방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인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차원의 바다에서 봤던 귀걸이나 묘약보다 훨씬 내게 적합한 아이템.

적어도 나에게는 현기트나 트윈 헤드 하얀기영이 되는 것보다는 이 상승의 가방이 가치가 더 높다.

‘마이 프레셔스….’

마치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김현성 역시 내 몸이 달아올라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경매장에서 구입한 아이템을 그 자리에서 받은 것만 해도 녀석이 얼마나 저걸 주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경매장 관리인들도 많이 당황했겠네.’

낙찰 이후에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받는 게 보통이었지만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느낀 모양이다.

‘이래서 오자고 했고만.’

제발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한국인의 미덕으로 삼 세 번 정도의 거절을 한 이후에는 결국 슬그머니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감사합니다.”

‘네가 왜 감사하냐. 내가 더 감사하지….’

선물을 받은 놈보다 선물을 준 놈이 더 감사해하는 초유의 상황.

오늘 무한의 가방을 메고 오지 않아 조금은 어색했던 손과 허리가 비로소 완전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 이 양반이 무한의 가방을 내놓은 이후에 완성한 작품이라 추정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인지 심지어 디자인 자체도 더 고풍스럽다.

괜스레 툭툭 새로운 신상을 두드려보자 그제야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같은 기분.

무한의 가방에 비해 수납 공간이 무척 좁을 거로 생각했지만, 간이 연금 키트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넓다.

‘연금 키트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겠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숨기고 싶었지만 숨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계속해서 튀어나오려는 웃음소리에 김현성 이 새끼는 성공했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분명히 사람 마음을 돈과 선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로 기억했는데….

녀석도 거친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느낀 게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탐욕스러운 모습은 빛기영과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후, 선물의 가격보다는 마음이 전해져서 기분이 좋았다는 말로 버무리면 고개를 사정없이 끄덕일 게 분명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라도 어떤 놈이 가방에 손을 댈까 품에 안은 채로 길을 걷는 중.

이미 날이 어두컴컴해졌지만, 김현성은 아직도 돌아갈 생각이 없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번에는 반드시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나 역시 조금은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해, 시바. 마음 단단히 먹은 거야.’

생각해 보면 그동안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이쪽이 먼저 슬쩍 떠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느낄 정도로 김현성의 고백 타이밍은 계속해서 늦어져만 왔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후, 뭐라도 깎는 노인처럼 조심스럽게 접근했었던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일일 연속극 드라마처럼 서로가 엇갈리기가 수십 번.

박덕구의 등장과 계속해서 터지는 사건 그리고 PTSD를 앓고 있는 김현성 본인의 문제로 인해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원래 이런 데서는 계속 참는 놈이 이기는 거야.’

먼저 애가 타서 섣부르게 달려들었다가는 나가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정설.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김현성이 얼마나 떨리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술에 취하지도 않은 녀석이지만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회귀자가 호텔 바로 장소를 옮긴 거고….

앞서 일어났던 이벤트는 모두가 빌드업이었고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 진짜라는 걸 아는지 긴장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다른 대화를 나누면서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동공, 떨리는 입술.

뭘 상상하는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이지 않을까.

‘만약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고, 만약 믿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을까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김현성이 다른 마음을 먹고 이기영에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내 마음속에 피어나는 상황을 가정하면 아마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으리라.

다른 것도 아니라 무려 회귀다. 지금의 인생이 2회 차란다.

별별 거지 같은 일이 모두 벌어지는 이 대륙에서도 믿기 힘든 이야기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가 저딴 소리를 해온다면 미친놈이라 매도하며 돌을 던지지 않을까.

물론 나는 이미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김현성은 숨도 못 쉴 정도의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짝 도와줘야겠네.’

마력으로 모든 소리가 차단된 장소에서 슬그머니 입을 열자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아뇨. 아니… 그러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제가 오해했다면 죄송하지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있지만. 네. 일단은 아까 식당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먼저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말고, 이 새끼야.’

빠른 민첩만큼 회피력도 높다.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부분이었고요. 그러한 제 태도가 기영 씨에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었습니다.”

“…….”

“기영 씨를 믿지 못하는 건 결단코 아닙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믿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현재 기영 씨의 상태가 너무 걱정돼서 제가 그만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기영 씨를 믿지 못해서 가둬둔 것도 아니었고요. 오해할 만하신 상황이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건대 기영 씨가 상상하시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기영 씨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지, 기영 씨로부터 외부를 보호하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말은 좀 와닿는다. 형 감동했다, 현성아.’

“저를 이렇게 믿어주셨는데 같은 믿음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렇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꼭 제 사과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곧바로 말을 꺼내오지는 못하고 슬쩍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별개로 이번 사과의 내용은 나쁘지 않다.

상승의 가방으로 인해 풀렸던 마음이 한 번 더 김현성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전해졌을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한 모습. 마치 형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김현성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은 해줘야죠.’

“아니요. 저도 죄송합니다.”

“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으시다는 거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제가 조금 더 죄송해지네요.”

“아니요. 무조건 제 잘못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

“이전에도 한 번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공화국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 거리를 조금 두고 있었던 적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너 이 새끼야. 너 그랬었잖아. 그래서 내가 시바, 연방으로 갈까 말까, 생쇼 했던 거였고.’

“그건….”

물론 김현성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다. 굳이 콕 짚으라면 놈의 잘못이 맞기는 하지만 PTSD 발작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마음속에서 켕기는 게 없을 리 만무.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제법 재미있었다.

“잠, 잠깐 그랬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네. 물론 지금의 현성 씨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에는 조금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연방으로 이적하는 걸 고려해 봤을 정도로요.”

‘현성아, 표정 풀어라.’

“아마 그것 때문에 차원의 바다에서도 조금 더 민감하게 반응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순한 화풀이였던 것 같습니다.”

“아뇨. 이건 제 잘못….”

“죄송합니다.”

미안하다는 놈 앞에서 더 미안하다고 사과하기. 이것보다 더 민망한 상황도 찾아보기 힘들다.

안절부절못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조금 가슴 아프기야 하지만 일이 전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이 포지션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사과하시면 제가 너무 난처합니다. 당시에 분명히… 거리를 뒀었던 건… 네, 그… 사실… 이지만… 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은 그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입 열자.’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옛날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 같아서 저도 조금 민망….”

“아니요! 아니. 옛날이야기를 꺼내자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어째서 전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후회가… 네, 실제로 후회하기도 했고요. 얼마나 제가 멍청한 생각을 했었는지, 얼마나 제가 어리석었는지 기영 씨가 없는 동안 많이 생각하고 후회했습니다.”

“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신을 믿고 신뢰하고 있어요. 당신이 저를 신뢰하고 믿어주시는 만큼 저도 기영 씨를 믿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제가 기영 씨를 그 누구보다 믿고 있다는 겁니다.”

너무 훌륭한 자세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

대화가 얼마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렇게까지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있는 모습이다.

정확히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아마 무의식 세계에서 나와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때의 빛기영이 보여줬던 모습은 말 그대로 믿음의 정석이었으니까.

‘믿기영이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어떤 말을 꺼내야 이 기나긴 줄다리기를 끝낼 수 있을지 대충이지만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와 같다. 김현성이 무의식 세계에 갇혔을 때를 떠올리고 있다면 당시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면 되겠지, 뭐.

마지막에 헤어질 때 보여줬던 미소를 그대로 선보이도록 하자. 대사도 똑같은 거로 준비하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짊어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 너무 초조해 보여.’

“그리고.”

“…….”

“저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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