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3
회귀자 사용설명서 553화
복수의 동기(2)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튜토리얼 스토리 이후로 이것저것 두서없이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판단하는 게 맞다.
어쩌면 배려가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표면적으로 정하얀과 나는 연인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면전에 대고 ‘아, 당신 여자친구가 1회차에는 웬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 속아서 말이야. 자살했었어. 얼마나 처참했었는지 말이야… 막 학대당한 흔적 같은 것도 보이더라고’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1회 차 때의 일은 지금과는 다르지만, 진청쓰레기가 정하얀을 농락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긴 침묵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
“…….”
“그래서였군요. 그래서….”
“네?”
“진청과 처음 만났을 당시에 그가 하얀이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따로 쪽지까지 전해줬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는 그저 마법적인 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네, 기영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다시 한번 더 그자에게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은 그자의 특기였으니까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자… 자신의 방에서 약을 마시고 죽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다른 외상은 없었고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암, 암살당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만….”
‘아이고… 현성아. 그렇게 형을 배려해 주고 싶었어?’
“발견된 편지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정하얀은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었다. 녀석이 저렇게 이야기를 각색한 것을 보니 나를 배려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최대한 조심하고 있는 듯한 모습, 학대당한 흔적에 대해서는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오해는 풀렸다고 봐도 되는 거지?’
1회차의 이기영은 튜토리얼 던전에서 죽었다.
혹시나 이기영이 가면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김현성의 의심은 완전히 걷히다 못해,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내가 악마들에게 납치당했던 시점부터 의심이 풀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쾌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진청, 그자는….”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인류 최대의 적이기도 했고요.”
“혹시 희라 누나 역시.”
“용병 여왕님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 됐습니다. 물론 붉은 용병에서 그렇게 발표했을 뿐이지 아마 전쟁 도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진청 그자의 손에… 말입니다. 혜진 씨도… 다른 많은 동료도 전부… 죽었습니다. 전부 그자 때문에….”
“후우… 기분이 이상하군요. 분명히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분위기를 무섭게 만들었군요.”
“아니요. 오히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에 무거운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이 정도는 견뎌낼 수 있습니다. 물론 찝찝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회차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이야기니까요. 하얀이도 희라 누나도 지금은 모두… 네, 돌아가면 한 번 꼭 안아주고 싶군요. 한데. 그 악마소환사는 도대체….”
“목적은 아마도 인류에 대한 복수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는 인류의 적이었고 1회차에 위험을 가져온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도시 하나를 전염병으로 물들이기도 했고, 전쟁에서 아군을 감염시킨 채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아….”
“살인마 정진호를 버린 것처럼 그자는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고 버리고 또 이용하고 버리며 대륙 전체를 기만했습니다. 동기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을 수 없더군요.”
‘찾아보려고 했었어? 그걸 또? 그래서… 그랬던 거야?’
괜스레 똥줄이 타 허겁지겁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동기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마 그런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겠죠. 현성 씨 같은 사람이라면 특히요.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
“선천적으로 어딘가 망가진 인간일 겁니다. 싸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같은 부류로요. 아니, 그보다 더 지독하고 악독한 인간이었겠죠. 그자는 그저 조금 더 악독하고 타인의 고통과 공포를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자들은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아마 모든 게 연기였을 겁니다. 타인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겁니다. 인류에 대한 증오와 복수, 그런 캐릭터를 연기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진청의 공화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어째서 라이오스에 악마를 소환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더군요. 저도 처음에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이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단지 자신의 쾌락과 유희를 위해 평화롭게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이들을 전쟁터로 내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쓰레기 같은 놈이지, 정말.’
“하지만 아니더군요. 동기 따위는… 이유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
“그자는 그런 인간입니다. 네, 그냥 그런 인간이었을 뿐이에요.”
“겨우…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보인다. 입술과 팔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당했던, 자신이 겪어왔던 그 모든 게 한 쓰레기의 악의와도 같은 취미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다.
얼마나 황당할지, 또 얼마만큼의 분노를 느끼고 있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또 많은 전투가 있었고,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녀석의 동료들, 또 많은 인류가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통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것 때문에….”
희생당해야 했고 고통스럽게 죽어가야 했다. 동기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김현성은 허탈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김현성의 감정에는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김현성의 입장이었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한 가지 의문점은 김현성에게 정말로 걸리는 게 없냐는 것.
김현성과 파란 길드가 내가 본 박덕구의 죽음에 정말로 관여하지 않았느냐는 점이었다. 당시 박덕구는 가면쓰레기를 지키기 위해 죽었다.
그게 가면쓰레기가 대륙에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 시발점이었고….
파란 길드와 김현성 역시 가면 쓰레기의 목표에 있었을 것이리라.
‘오해가 있었던 건가.’
확실한 것은 이야기를 전부 다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차차 들을 수 있겠지, 뭐.’
지금은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졸린다. 포션으로 버티려고 해봤지만, 어느새 솔솔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느낌.
일단 분노에 점점 빠지고 있는 김현성부터 깨우도록 하자. 가장 궁금했던 것 하나만 더 듣고 말이다.
내가 먼저 최종 빌런에 대한 걸 물어볼 수가 없으니 슬금슬금 빌드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큰 가닥만 잡자. 그 안에 수록된 다른 이야기들은 다시 들을 기회가 있겠지, 뭐.
아직도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현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자 예상대로 녀석은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진정하셔도 됩니다.”
“네, 그렇죠, 네.”
“그자는 이미 죽었고 자신의 죗값을 치렀습니다. 물론 저는 현성 씨처럼 1회 차를 겪지 못해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현성 씨가 걱정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전부 끝난 겁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은 어느새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이쪽에 말을 건넨다.
“아니요. 사실… 사실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살인마 정진호도, 이설호와 이토 소우타도, 진청도, 지금은 모두 없지만, 모든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기영 씨에게 제가 회귀했다고 고백한 것은 제 마음속에 있는 짐을 던져 버리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위협에 함께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 그걸 기다렸다, 현성아. 그걸 기다렸어. 전부 끝내고 행복해져야지, 우리.’
“그러고 보니 베니고어 님께서.”
“네, 위협은 실존합니다.”
“…….”
“…….”
“바깥 신의 파편.”
“바깥 신의 파편?”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은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입니다. 파도의 웜홀에서 선희영 씨가 목격한 아우터 갓의 일부로 어째서 대륙에 오게 된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 목적도 자세히 알 수는 없었고요.”
“…….”
“그자는 인간을 증오했지만, 대륙을 자신의 관리하에 두려고 했었습니다. 개체 수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겁니다. 이건 1회 차의 제가 진청, 그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습니다만….”
‘어?’
김현성의 말을 듣던 중에 생각난 의문 한 가지.
인류는….
‘전멸하지 않았나?’
무의식 세계에서 김현성은 회귀 직전 혼자 남아 만신창이가 된 대륙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생존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녀석 역시 그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류의 개체 수를 유지하고 싶다는 바깥 신의 뜻과는 대조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당장 떠오른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 첫 번째는 바깥 신의 진짜 목적이 대륙에 멸망이었던 경우다.
‘얘도 완벽하지 않은 거야.’
신도 완벽하지는 않다. 베니고어는 그 사실을 항상 내게 강조했다.
바깥의 신 역시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도들을 모아야 했고 더 큰 신성을 가져야 했다.
파편이라고 했으니 본인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대륙의 생명체들을 삼킬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고, 자기편을 만들어 인류를 이간질해 싸우게 했을 것이다.
신성이 모이고 인류의 개체 수가 안정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곧바로 먹튀.
꿀꺽 대륙을 삼킨 이후, 자신을 믿었던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다른 대륙으로 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바깥 신의 진짜 목적이 관리에 있었던 경우다.
‘이것도 그럴듯하지.’
만약 내가 바깥 세계의 신이라면 대륙을 관리하는 것에 어떤 동경을 품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더욱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녀석일 테니 대륙 하나 붙잡고 신 놀이라도 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어째서 대륙이 그 지경이 됐느냐에 대한 것. 가능성은 작지만… 어쩌면….
‘가면쓰레기가 바깥 신 통수까지 날려 버린 건 아니겠지?’
애초에 인류를 증오하고 복수하려고 했던 가면 쓰레기가 외부 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며 충성심을 보일 거라는 건 상상하기가 힘들다.
실제로 가면쓰레기는 여단에 가입했을 당시, 썩어빠진 모든 인간에 대한 복수라는 주제를 타이틀로 내걸고 입단했었고….
행보나 분위기를 보면 복수심을 완전히 버린 것 같지도 않았다.
바깥의 신은 관리와 유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면 쓰레기가 생각했던 것은 인류의 파멸.
어쩌면 뒤를 핥아주는 척하다가 소중한 바깥 신의 대륙에 똥을 투척하는 방법으로 뒤통수를 때렸을지도 모른다.
일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했을 가능성도 존재하고.
만약 두 번째 가설이 들어맞는다면….
‘이 새끼, 진짜 난 놈이네.’
이쯤 되면 뒤통수 후려치기의 장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