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6
회귀자 사용설명서 556화
준비(3)
린델로 돌아온 지 시간이 약간 흘렀다. 파란 길드의 휴가 아닌 휴가는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헤르엔에서 다시 거울호수로 넘어온 이후에는 주변 탐사를 끝마친 길드원들과 함께 다시금 휴가다운 휴가를 즐겼다.
물론 나와 김현성은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드문드문 여러 가지 계획을 의논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김현성 입장에서는 지고 있던 짐을 함께 들 사람이 나타나 줬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
물론 무의식 세계에서 이미 커다란 짐을 벗어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혼자만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은 물론, 홀로 그 일을 맞이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해 보였으니까.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일을 함께 계획할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얼굴을 굳힐 때가 대부분 이었지만, 적어도 휴식 시간이나 다른 일정들을 지낼 때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욱더 좋았고 재미없는 농담을 던져올 정도였다. 정말로 재미없는 농담 말이다.
‘만날 때마다 술을 사라고 하는 고유 직업군이 새로 발견됐다고 하더군요. 뭔지 아십니까?’
‘네?’
‘마술사입니다.’
‘아….’
녀석의 농담에 웃어주는 것은 기껏해야 조혜진이 고작.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아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김예리마저 억지웃음을 지어주는 정도였으니 어련할까. 진심으로 이 새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게 된다.
어쩌다가 이런 유머 감각을 가지게 됐는지 1회 차를 다시 한번 열어보고 싶다.
가슴 아프게 재미없는 농담이 녀석의 황폐한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녀석이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진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간에 파란 길드는 린델로 돌아와 다시금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정하얀과 엘레나는 물론 선희영과도 함께 뱃놀이를 즐겼고 예정됐던 차희라와도 꽤나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재충전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힘겨운 상황이기도 했다.
때마침 베니고어 강림 자작극을 벌인 터라 그 힘겨움이 표면적으로 드러났다는 소소한 이득도 봤지만, 온종일 잠들어 있는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일어난 이후가 더 피곤하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베니고어의 예언이 전 대륙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잠깐 긴장이 풀렸었던 대륙의 국가와 길드들은 다시금 초긴장 상태로 들어갔고, 그만큼 많은 우려의 목소리와 계산 외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혼란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 상정 범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패닉에 빠진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다소 자극적인 예언에 대륙 종말론을 설파하는 이들이 나타났고,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지만, 범죄율이 소폭 상승했다.
교국과 공화국, 라이오스나 대륙 연합은 스스로를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72군단과 벨리알에 의해 쑥대밭이 된 연방 쪽과 그 외 빈곤 지역, 중앙 권력 기관과 멀어진 소외 국가들의 경우에는 누가 봐도 심각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종말의 때는 언제인가.]
[무책임한 베니고어와 대륙의 신들, 그들은 우리를 버렸다.]
[어째서 이 모든 고통을 우리가 감내해야만 하나.]
자극적인 찌라시가 쏟아져 나왔다. 대륙에 종말이 올 거라며 광장에서 외치는 미친 자식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언짢았던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악마 맛을 제대로 본 연방민들이야 이해가 갔지만, 소외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한숨이 다 튀어나올 정도.
교국 내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과 대륙 전체를 환기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사과 박스에 썩은 사과 하나가 들어가면 전체가 썩는다는 건 알고 있는 거죠, 오빠?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면 밀어버리는 게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어요. 일이 터져도 ‘다 죽을 거야!’라고 외치며 방방 뛰어다닐 놈들인데 저게 도움이 되겠어요? 장담하는 데 가만히 놔두면 다른 곳들도 전부 다 썩게 만들 걸요.’
1회차의 가면녀답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섬뜩하고 쓰레기 같은 한마디를 내뱉은 이지혜.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혼란을 겪고 있는 녀석들 역시 품고 가야 총알받이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우터 갓이 들어오면 녀석에게 기대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나약한 이들이었지만, 그 전까지는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 이들이었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에는 신성을, 벨리알 군단에는 실적을 주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쪽이 둠기영 모드를 유지할 수 있는 만큼 27군단의 힘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박수를 칠 만한 상황이었고 결정적으로 혼란을 느끼는 이들 역시 머지않은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시간을 내서라도 한 번 방문해야지 어쩌겠어.’
어차피 북부로 이동해 전진기지를 만들 예정이니 소외 국가들을 중심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물론 이 모든 일정은 원하는 자리에 취임하고 난 이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인선이 혼란을 겪고 있는 상황.
끊임없이 후보들이 자리에 오르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자격이 있는가를 논한다면 애매한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차희라조차 후보에 올랐다가 경질되지 않았던가.
다소 날이 선 일침이었지만, 전투가 일어났을 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희라 본인은 조금 상처받지 않았을까.
언론에서는 매번 누가 보호 관리 위원회에 자리 잡을 인물로 적합한지 떠들어댔고, 자연히 대륙인들과 모험가들 사이에서의 갈등 역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라 대륙 전체를 관리하는 자리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다.
소국의 국가 지도자들은 한 발자국 물러난 상태로 관망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지만, 그들이라고 관심이 없을까.
대륙 전체를 주무를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갖는 자리다.
누가 오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만큼 그들 역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에 이득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꼭대기 위에 앉는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하다는 거다.
이런 배경이 깔려 있으니 소외 국가나 상대적으로 약한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물론, 교국이나 공화국을 포함한 강대국에게도 이 공석에 들어갈 인선이 가장 뜨거운 감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같은 적을 위해 힘을 모은다는 뜻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인간들이다.
어떤 이는 이번 기회를 통해 국력 증대를 도모하고자 했고, 어떤 이는 길드를 키우려고 했다.
어떤 이는 종말론을 설파하는 이들을 활용해 정치적 이점을 얻으려고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정말로 종말이 찾아올지 의심했다.
모두의 생각은 달랐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균형.’
바로 균형이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를 더 벌어지지 않게 만드는 균형, 다시 말해 이 균형을 유지해 줄 수 있는 투명한 인간이다.
이 위협을 통해 타국이 이득을 챙기는 것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인물.
욕심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오직 대륙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움직여 줄 인물.
투명하고 깨끗하고,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을 인물.
지성과 무력을 겸비하며, 이런 종류의 경험을 가진 인물이었다.
균형을 유지하는데 가장 적합한 이가 누구일지는 뻔하지 않은가.
시대는 빛기영을 원하고 있었다.
‘시대가 나를 원하고 있쟈나….’
물론 이런 배경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는 했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 악마들에 의해 타락했던 이를 중역으로 올리는 것에 대한 찬반여론이 있었으니까.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정말로 적합한가 묻는다면 나는 소신 있게 ‘NO’라고 외칠 것이다. -공화국 신문 / 저는 절대로 자살할 마음이 없습니다.]
라는 칼럼이 나올 정도. 물론 녀석은 소신 있게 독이 든 홍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건강 상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제는 더 이상 명예추기경을 혹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이기영 명예추기경에게 이런 직책을 맡겨도 되는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기도 했고….
그간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보여준 아웃풋은 결코 나쁘지 않았지만, 대륙을 관리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지 않은가.
하지만 여론은 점차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중앙 정부를 비롯해 군부와 길드 지도자, 그 누구에게도 이런 자리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권력자들의 입장.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도자가 아닌 ‘중재자’였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으니 가장 공정하고, 깨끗해 보이는 놈을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
그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지지기반이 대단했다.
-당연히 이기영 명예추기경입니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오직 이기영 명예추기경님만이 대륙의 균형을 유지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중앙 정부의 그 썩어빠진 새끼들이 뭘 알어! 도대체 뭘 아느냐고!
-너무 불쌍해. 명예추기경님이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좋겠어…. 5년 만이라도. 너무 불쌍하잖아….
-우리 어머니가 이기영 님은 안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저는 강력하게 지지할 겁니다. 시대는 명예추기경님을 원하고 계십니다.
린델로 중앙 정부의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일이 이제는 당연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아직도 생각이 없으십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더 어울릴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여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가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자질을 의심하겠습니까. 오스칼 님께서 만류하시기는 했지만, 다른 국가 지도자들 대부분이 명예추기경님을 원하고 계십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지지와 대형 길드의 길드 마스터들도 같은 심정이고요. 대륙인들과 모험가들, 종교 지도자와 국가 지도자들, 소외 계층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명예추기경님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맡을 수 없는 자리일 겁니다.”
“하지만….”
“부디 다시금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분이 명예추기경님을 바라고 계십니다. 이 대륙을 이끌어 나갈 인사로 명예추기경님보다 적합한 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려야지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삼고초려가 아니라 칠고초려라고도 할 만했다.
물론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옳지!’ 하고 들어가고는 싶었지만, 본인이 원해서 들어간 그림과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그림은 다르지 않은가.
보여주기용 쇼였지만 본래 대중은 이런 보여주기용 액션에 반응한다. 사람들의 애가 탈수록 이쪽의 주가는 점점 더 올라갈 수밖에 없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계획했던 일이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관리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발탁, 이후 대륙 전체를 관리하며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고 북부에 전진기지를 건설한다.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계획이었지만….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영 씨는 직책을 맡지 않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배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동이 걸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새끼야….’
길드 내에서 반대 여론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것. 심지어 김현성 이 새끼가 가장 앞장서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파란 길드를 나가야 하니까.’
표면적으로 모든 지위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명예추기경이라는 직책이야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어떤 한 집단에 편의를 봐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당연히 집단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게 되고 이기영 친위대 역시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아마 따로 경호 부대가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본인이 픽하지 않은 경호 부대에 나의 안전을 맡기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새끼도 이게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
단순히 땡깡을 부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부적인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
“…….”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정하얀의 성장이 완전히 정체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