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8
회귀자 사용설명서 558화
우리 하얀이가 달라졌어요(2)
‘애먼 데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야?’
딱히 지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공부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머리를 환기시킬 때도 필요하지 않은가.
그 방법이 조금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니 굳이 난리를 칠 필요도 없다.
물론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방 안을 둘러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공부 잘하고 있나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고….’
이미 몇 번 확인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정확히 확인하고 싶어진다.
정하얀의 방이 성역인 것처럼 들어오지 못하고 문을 서성거리고 있는 할아버지 군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자 헐레벌떡 질문에 대답해 오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이 정도로 하는 겁니까?”
“네, 평소에도 오랜 시간을 수련에 쏟고 계십니다. 심할 때는 잠을 자지 않은 경우도 많으시고요. 허허.”
“으음….”
“마법에 대한 열정이 아주 대단하십니다. 혹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잘하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 아시다시피 마탑 같은 곳에 수련을 보낸 게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보유하고 또 관리하는 장소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로 보낸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혹시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아주 잘 적응하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조만간 커다란 성과를 안고 돌아가실 게 분명합니다. 파란 길드에서 마도 길드에 투자한 것과는 별개로 마도 길드 자체적으로도 프로그램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조금은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믿음이야 가지, 믿음은 가. 어떻게 믿음이 안 갈 수가 있겠어.’
비록 대형길드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마도 길드는 명실상부 마법의 천재들이 모인 집단이다.
특히 마도 길드의 마법사 육성 인프라와 커리큘럼에 수많은 마법사가 엄지를 추켜올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검은 백조는 물론, 붉은 용병 역시 마법사 육성에 관해서는 마탑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상황.
어디 두 곳뿐이랴. 많은 국가와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타국에서도 이곳, 마탑과의 파트너십을 요청하고 있었다.
우리 파란 길드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마도 길드가 최고의 마법사를 보유한 집단은 아니다. 하지만 대륙 최고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대륙의 격언 그대로였다.
물론 그 누가 정하얀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훌륭한 지도자가 아닌 훌륭한 시설과 안정적인 지원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멀리 볼 필요도 없다. 마탑은 1회 차의 정하얀을 육성해 낸 기관이었으니까.
“제가 조금 실례되는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코 마탑을 신뢰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이곳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이 들지 않는 게 이상하지요. 저희로서는 지금까지 잘 적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만… 음, 파란 부길드마스터께서 그렇게 느끼고 계시다면 아마 새로운 환경에 녹아들 시간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해볼 직할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이렇게 이기영 님께서 저희 마탑을 찾아와 주신 것도 인연인데, 어떻습니까?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오늘은 조금 들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잔하시면서….”
‘그래, 이런 사람들이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돈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물론 더 큰 돈이면 다룰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현재 마탑의 인프라가 자리 잡은 데에는 이런 열정적인 학자와 마법사들이 바탕이 되었으리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확히 4시간 후에 이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기준으로 차 한잔을 마시자는 소리가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굳이 공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이론 역시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학계가….”
“여기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정하얀 님께서는 공식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이건 지금껏 없었던 형태로 마법을 연구하고 계신 것 역시,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탑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모든 마법사는 시스템이 주는 편안한 지식에 매몰되고 있어요. 이대로 간다면 더 커다란 길로 향하기는 무리가 있을 겁니다. 발전하지 못하고 도태될 게 뻔하다, 이 말입니다.”
“마법의 바탕이 되는 지식 외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정하얀 님을 평범한 사람들의 카테고리 안에 묶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제 말뜻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고수하되,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하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인데….”
할아버지들의 끝나지 않은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연금술과 연금 마법에 대한 이해가 어쩌다가 이런 자리로 변모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서서히 열을 올리기 시작한 마법 영감들은 결국 처음의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마력의 원천, 원소 마법 출력의 증진 방향에 이어 비전투 마법에 필요성에 대해 논쟁을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야기의 주제는 지금까지 정립된 공식이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것.
아마 정하얀 때문에 새로 생긴 떡밥이 아닐까.
타 마법사들과 다르게 얘는 마법을 발현시킨 이후에 공식과 주문을 만드는 타입이었으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수학 문제의 답을 먼저 떠올린다는 식이다. 술식을 정립하는 것은 그 이후였고….
이해할 수 없는 규격 외의 존재 때문에 마법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논쟁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다.
본인들끼리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모습에 당장에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입을 여는 정하얀의 모습을 보고는 계속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대단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 같아요.”
라거나.
“그건 아니에요.”
정도가 전부였고 회의실에 마련된 커다란 보드에 마력으로 공식과 주문을 던지는 것이 고작.
겨우 그 정도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필기까지 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서로 갑론을박을 벌이는 것은 물론 정하얀과도 논쟁 아닌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하나같은 공통점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법 영감이 그녀를 친손녀처럼 바라보고 있다는 것.
마법 아저씨와 마법 아줌마들 역시 딸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정하얀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하얀도 익숙해 보이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정하얀의 1회 차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지금 보이는 분위기로 그녀의 1회 차를 대충 유추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리는 놈들이 있었겠지만 아마 마도 길드의 마탑은 이런 분위기였으리라.
매일매일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고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들 사이에서 지냈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본래 가지고 있는 소심함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겠지만, 마탑 안에서만 틀어박혀서 지냈던 시간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네.’
애초 마법 말고 다른 데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아직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었지만, 정하얀의 정체된 성장이 배경 때문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끄응… 그렇구만.”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손님도 계시고 하니… 어떻습니까. 이기영 님, 괜찮으시면 저녁까지 함께하시고 돌아가시는 건….”
‘싫어, 이 새끼들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저녁 식사는 위에서 하얀이와 함께 조촐하게 했으면 합니다.”
“허허허, 이거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아까부터 없었지.’
“하하….”
“그럼 따로 식사를 올려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금 탑의 꼭대기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떠셨어요?”
“글쎄….”
“하, 할아버지들이 말이 조금 많았죠. 박 할아버지랑 장 할아버지가 오, 오빠가 와서 조금 기분이 좋았나 봐요. 평소보다 더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전부 다 좋은 사람들 같더라.”
“그, 그렇죠?”
“분위기도 좋고… 수련할 수 있는 여건도 솔직히 파란 길드보다 더 괜찮은 것 같네. 일단 분위기 자체가 공부하는 분위기라서 마음에 들고.”
그래서 더욱더 모르겠다. 어째서 갑작스레 성장이 정체된 건지.
본인 역시 열심히 하려는 것 같고, 분위기도 좋다. 이전과 비교해도 고개를 끄덕일 환경이었고, 마력도 더 풍부하다.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면 했지, 멈출 수 상황은 아니었다.
‘떡밥을 한번 걸어볼까.’
뭔가 목적성이 결여된 것은 아닐까.
‘성과를 내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둘 사이에 있던 무언의 약속이 이제는 조금 흐릿해지기도 했었으니까.
매번 간만 보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익숙하게 스킨쉽을 해오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본인도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납치 사건 이후에는 기가 많이 죽어 위로차 응원을 보낸다는 게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팔짱을 끼고 몸을 붙여오고 있지 않은가.
마탑에 설치된 마력 엘리베이터를 타고 탑의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은 순식간.
방 안에 들어가 탑의 직원이 건네준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조금 더 두고 봐야 하나. 그래도 보상을 내거는 게 좋지 않을까.’
현재 배경을 보면 소소하게나마 성장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살짝 웃음을 내비치는 모습.
갑작스레 형성된 묘한 분위기에 긴장하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책상에 얹어져 있는 손에 괜스레 손을 포개자 움찔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별 쓸모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이 목에 고정된 느낌.
정확히는 외투를 전부 벗어서 드러난 쇄골 같았지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조금 무섭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다 기분이 좋네.”
“네, 열, 열심히 했어요. 진짜로 열심히 했어요. 와, 완전 열심히요.”
“나는 하얀이 이런 모습이 좋더라.”
“아? 아! 아!”
“매력적으로 느껴져.”
“아! 아!”
“조금은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아… 으!”
‘얘,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어.’
정하얀의 손등 위에 올려진 내 손을 살짝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손등을 간질이자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보인다.
뭔가 눈이 점점 무서워지는 것 같은 느낌. 살짝 열려 있었던 방문이 자연스럽게 철컥하고 닫힌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곳이니 누군가 문을 컨트롤한 것이 분명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너무 뻔한 거고.
혹시나 차희라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정하얀은 다직 경거망동하지 않고 있다.
원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차희라와는 다르다.
유니콘에게도 인증받은 자신의 반쪽짜리 순수함을 지키고 싶을 테니 먼저 움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리라.
손등에서 머물던 손은 어느새 팔뚝과 그녀의 목선을 타고 얼굴에 머무른다.
잔뜩 상기된 붉은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자 먼 곳에서도 들릴 만한 숨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무심코 내 손을 덥석 잡을 정도. 고통 때문에 잠깐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표정은 계속 유지한다.
‘난 지금 너에게 굉장한 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다.’ 정도로 해석해도 될 것 같았다.
정하얀도 처음 보여주는 내 표정에 오늘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였고.
하지만 그 기대가 산산조각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네? 네! 네!”
“지금은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니까.”
“아… 아… 아앗….”
“괜히 하얀이한테 영향을 주고 싶지는 않네.”
“아… 그, 그, 그렇지 않, 않, 않, 않, 않은… 데… 그렇지 않은데… 영향 같은 거 없, 없는데….”
“지금 같은 모습만 보여줬으면 좋겠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입술을 꽉 깨문 표정이 시야에 비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