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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61화 (552/1,590)

# 561

회귀자 사용설명서 561화

씨앗 뿌리기(1)

“갑, 갑자기 왜, 왜, 왜, 왜요.”

“이런 말 꺼내기는 힘들지만, 이제 슬슬 집중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 하얀이도 공부에 조금 더 전념해야 할 때고….”

“…….”

“왜 그런지는 알고 있지?”

“네, 네. 당, 당연히… 당연히 알고 있죠,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바빴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바빠질 거야. 27군단 때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네… 그, 그렇죠… 그러면 안 되니까요.”

“하얀이랑 매일 붙어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힐 때까지는 서로 보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거든. 미리 대비하고 미리 움직여야 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후에 더 힘들어질 거야. 서로 힘들기는 하겠지만… 이해해 줄 수 있지?”

“…….”

“…….”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

아주 오랜만에 중노 상태로 진입하려는 것 같았기에 나 역시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미 정하얀에 대한 진단을 내리기는 했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 돌발행동을 해올지는 예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하얀 이라면 아마….

“이, 이, 이해할 수 있어요… 네. 이해할 수… 있어요.”

라고 대답해 올 것이다. 다시금 정하얀에게 시선을 고정하자 시야에 비친 것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 듯한 얼굴.

어떻게든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면에 힘을 주고 있는 상태였다.

자그마한 주먹을 꽉 쥔 채로 몸이 핸드폰 진동이라도 온 것처럼 부르르 떨리고 있다.

정신력이 몸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지만, 자꾸만 움찔거리는 것을 보니 조금 더 불안해진다.

‘권태기가 왔다고 둘러대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초장부터 너무 크게 대미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발언일 것이다.

정하얀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정이기는 했지만, 이별 같은 커다란 대미지를 주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게 만든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탑 위에 틀어박혀 1회 차 같은 선택을 할까 걱정되기도 했고….

이 정도만 해도 정하얀을 폭발시키기에 충분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래도 얼굴은 볼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나날들이 기약 없이 길게 느껴질 테니까.

달고 있는 목줄을 한꺼번에 풀어 재끼는 것보다 천천히 푸는 게 더 안전하다는 이야기다.

괜히 권태기 드립이라도 쳤다가는….

‘진짜 망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무엇보다 원인이 녀석들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정하얀의 분노를 그쪽에 향하게 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게 옳은 선택이었다.

“그, 그, 그래도….”

“아마 빠르면 이번 주 내로 북부로 향할 것 같아.”

“네? 이번 주요?”

“응,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너무 갑자기 결정되기도 했고 나도 경황이 없어서… 전진기지 시공이 내일부터 들어가거든. 계획도 계획이지만, 그쪽 국가를 중심으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라도 가서 잡아줘야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저도 그쪽에서 공부할 수 있는데… 이동도 할 수 있으니까. 더, 더, 더 편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얀이는 여기서 할 일이 있으니까.”

“할, 할 일, 할 일 있죠. 그래도… 가, 가끔 보러 가도 되, 되나요. 잠깐이라도….”

“일단 내가 따로 연락하기 전까지는 계속 린델에 있으면 좋겠는데.”

“그… 건 너무….”

‘가혹하지.’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지구에서부터 정하얀에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면 굉장히 미안한 이야기다.

물론 정하얀은 더 이상 내게 버림받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떠도는 불안감을 치워 버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런 그녀가 애잔하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거고.

슬쩍 팔을 벌리자 허겁지겁 달려들어 와 꽉 껴안아 오는 정하얀이 눈에 보였다.

그녀가 힘을 준 곳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았지만,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끄윽끄윽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에 마치 군대 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해외유학을 떠난다든가.

드라마 속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신파의 서글픔이 있었지만, 사실 일이 바빠진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침 타이밍이 좋았어.’

어차피 슬슬 북부로 움직이려고 했었던 타이밍, 정하얀까지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정하얀을 데려가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동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는 불편한 점이 더 많을 것이다.

대충 씨앗을 뿌려놓고, 코인에 재산을 박아두고 존버하는 게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약해지려고 꿈틀거리는 마음을 애써 집어넣은 이후 살짝 정하얀을 밀어내려고 해봤지만, 역시나 밀려나지 않는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하얀이도 힘내야지.”

‘그래도 너는 일주일에 한 번은 봤었잖아.’

“끄윽… 네.”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김미영 팀장님한테 꼭 문의하고 편지나 영상 정도는 보낼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끄으윽… 끄윽… 히끅… 네.”

“나도 헤어지기 싫어, 하얀아.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히끅… 네에… 그,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대충 마무리되고….”

“네.”

“네 수련이 끝났을 때.”

“수, 수련이 언제 끝나는데요.”

“그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거야. 너도 알고 있지?”

“네… 네… 히끅.”

“배웅은 안 해줘도 되니까. 빨리 탑으로 들어가도 돼.”

“그래도….”

“괜찮아. 내가 데려다줄게.”

“끄으으윽….”

‘그래도 잘 참아주고 있네. 진짜 놀랍다. 놀라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본인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초조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기왕이면 이 모든 게 그 바깥 신인가 뭔가 때문이라고 느끼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하얀의 성장에 불이 붙을 테니까.

‘아마….’

내가 만족할 정도가 될 때까지 성장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게 첫 번째.

곧바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하는 게 두 번째.

이걸로 정하얀의 성장에 불이 붙는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겠지만….’

반쯤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었던 성장이 겨우 그 정도로 활기를 되찾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커다란 벽에 막힌 것처럼 본인이 가장 답답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으니 일주일이 지난 후에는 조금만 더 하면 공부를 끝낼 수 있다고, 금방 만날 수 있다고 다짐하고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 차도 없이 한 달, 두 달,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다면 본인이 더 초조해하지 않을까.

참고 있었던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올 것이고 결국에는 외부에서 원인을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 와중에 오빠와 만날 수 없다는 초조함과 이 상황을 만들어낸 이들에게 분노를 보내는 것은 물론 어쩌면 새로운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기에는 조금 불안한데….’

기왕이면 가까이서 정하얀의 차도를 체크하고 신경 써주고 싶지만 나 역시 그녀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 연, 연락할게요.”

“응, 그래. 바로 들어가, 하얀아.”

“네… 네.”

“주기적으로 영상은 꼭 보내고.”

“네, 꼭 보낼게요. 꼭, 꼭, 꼭이요. 끄윽… 꼭이요.”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은 정하얀뿐만이 아니다.

끝까지 헤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정하얀을 반 정도는 억지로 마탑에 넣은 이후에 나 역시 짐을 챙기기 위해 길드로 향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끄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발걸음을 돌리기가 힘들었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길드로 돌아오자 괜스레 조용한 파란 길드가 나를 반겼다. 뭔가 횅한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도 횅하다.

김현성과 조혜진이 대륙 합동 훈련 때문에 파견을 나가 있는 상태였으니까.

애초에 인원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몇 명이 빠진 것만으로도 확 티가 난다.

그렇게 막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바깥으로 나오는 박덕구와 안기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정이라도 가는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짐을 들고 나오는 모습에 궁금증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슬쩍 물어보려고 했지만, 박덕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어왔다.

“어, 형님. 이제 북부로 가는 거요?”

“너도 따라가려고?”

“아니, 그런 게 아니요.”

“그럼 뭐야?”

“그냥, 뭔가 정체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말이요.”

“원정이라도 가게? 보고된 던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모 씨랑 겨우 둘이 나가? 삼대 길드에 파견 인원 신청한 건 맞고? 인선은 어떻게 돼? 붉은 용병이랑 검은 백조가 여유가 된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원정 같은 게 아니요. 그냥 겸사겸사 세상 좀 둘러보려고 가는 거지.”

“그게 뭔 개소리야. 지금이 얼마나.”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고 있는데 놀러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니니까 걱정 좀 넣어두쇼. 그냥 점점 한계치가 보이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니까. 너무 여기서 안전하게만 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요. 아까 형님이 말했던 것처럼… 형님이랑 길드마스터 형씨 그리고 우리 누님 품 안에서만 자라왔다는 게 팍 하고 느껴져서….”

“…….”

“형님 입장에서는 우습겠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한 계단 더 올라가기 위해 수행을 떠나는 거라니까. 마침 형씨도 계속 합동 훈련에 신경 쓰고 있는 상태고, 누님도 마탑에 있고, 형님도 곧 북부로 떠나니까… 심지어 파란 길드도 탈퇴해야 하는 거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 같아서….”

“…….”

“옛날에 그 못난 동생은 아니요,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쇼.”

“…….”

“…….”

“걱정은 안 한다. 뭐, 네 문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코멘트하기도 애매하고… 일단은… 응. 그래. 뭐, 잘 다녀와. 잊지 말고,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아니요.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팍 하고 새겨 놨으니까. 그만 말해도 된다니까.”

“기모 씨도 잘 다녀오세요.”

“하하하, 네, 부길드마스터.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다고 느껴지면 바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가시죠, 덕구 씨.”

‘다들 생각이 없는 건 아니네.’

이제 숟가락을 떠 밥을 먹여줘야 할 정도로 병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본인이 어떻게 해야 성장할 수 있는지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걱정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아.’

존버해 놓기 좋은 코인이기는 하다. 애초에 박덕구 같은 경우에는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본인 스스로 답을 찾는 게 더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너무 뿔뿔이 흩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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