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2
회귀자 사용설명서 562화
씨앗 뿌리기(2)
‘이거 혹시 내가 파란 길드 탈퇴하는 거랑 관계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박덕구에 이어 엘레나까지 잠깐 파란 길드를 떠나 있겠다는 말을 꺼내왔기 때문이다.
사실 중소 규모 길드나 파티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딱히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게 되는 것 말이다.
길드의 핵심 멤버가 탈퇴한다거나, 각자의 원정길이 달라 잠깐 찢어졌을 경우, 끈적거리던 관계가 천천히 멀어지고, 서로 연락도 뜸해지다가 해체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물론 통신 체계가 발달한 지금은 그런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파란 길드도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에서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오지 않는가.
엄밀히 따지면 김현성의 지분보다 내 지분이 더 높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하얀, 박덕구는 물론 선희영과 엘레나, 대장장이 유아영과 연기 잘하는 안기모 역시 김현성이 아닌 내가 영입한 이들이다.
유아영와 안기모는 모르겠지만, 특히 앞서 말한 넷은 내가 파란 길드를 나간다면 따라 나갈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기 때문에 엘레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이유를 전해 들은 이후에 고개를 끄덕이기야 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합리적인 이야기였으니까.
“잠깐 왕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
“세계수와 병력 차출 문제로 아버님께 말씀드릴 내용이 있어서요. 무엇보다 그쪽에 있는 게 제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 그랬죠. 확실히 세계수 근처에 있는 것과 없는 건 차이가 제법 크니….”
“심지어 엘룬 님께서도 이대로라면 커다란 위협을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쳐 오셨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파란 길드에 계속 계셨다면 무리해서라도 남아 있고 싶지만, 길드를 탈퇴하시고 대륙 관리에 더 집중하신다고 하니, 저 역시 힘을 키우기 위해 세계수 근처에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있는 게 왕국의 지원을 끌어내기에도 더 유리할 거고….”
“네, 엘레나 님 생각이 맞을 겁니다.”
“길드를 탈퇴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실 테니까요. 하지만 막상 가려고 하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네요. 지금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안 보고 살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어요.”
“…….”
“고맙습니다, 이기영 님. 품이 따뜻하네요.”
“정확히 언제 떠나시는 겁니까?”
“곧바로 떠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영 씨도 같이요.”
“아….”
“네, 드워프 공방에 가는 게 도움이 되실 것 같다고… 가는 방향이 같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네.’
“본래는 이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일 필요는 없지만, 기영 님이 없는 파란 길드에 남아 있는 게 너무 슬플 것 같아서… 일이 전부 끝나면 꼭 위로 올라가도록 할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유아영은 드워프들한테 보내려고 했지만. 영향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닌가?’
그녀들로서도 고심하고 고심했던 이야기, 그중 가장 베스트라고 여겨진 결정이었으리라.
세계수와 친숙한 엘프의 특성상 여기에 있는 것과 거기에 있는 것 중 뭐가 더 효율이 뛰어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버림받기는 했지만, 엘레나는 엘룬의 딸이기도 하니 신전이 위치한 그곳에서 신성력을 늘리는 게 더 효과적이다.
광물을 다루는 유아영이야 드워프들과 함께 망치질하는 게 당연한 거고.
대륙 전체에 질 좋은 무기들을 보급해야 하는 만큼 지금보다 더 큰 규모의 대형 공방이 필요했다.
아무리 파란 길드에서 유아영의 공방에 돈을 쏟아부었다고 한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대장 기술 인프라를 쌓아온 드워프들과 같을까.
본인이 더 성장하고 날개를 펴기 위해서라도 유아영은 하루라도 빨리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길드를 떠난 직후에 나온 이야기라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엘레나와 유아영이 이종족 연합 쪽으로 내려가는 건 백번 옳은 선택이었다.
‘확실히….’
“조금 길드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겠군요. 덕구와 기모 씨도 방금 길드를 나섰는데….”
“아, 이거 죄송하네요. 저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부적인 일은 김미영 팀장님이 전부 처리해 주고 계시니까요. 합동 훈련 같은 경우에는 혜진 씨가 많이 힘써주시는 상황이고, 엘레나 님은 다시 왕국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섭섭하게 느껴지겠지만…. 네, 엘레나 님을 위해서요.”
“말씀이라도 같이 북부로 가자고 했으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을 텐데… 아쉽네요.”
“중요한 일이니까요.”
“후훗. 네, 중요한 일이죠.”
엘레나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입술에 잠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후 배시시 웃고 있는 엘레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끝까지 울고불고하던 정하얀과는 다분히 대조적인 모습.
하지만 그녀도 눈물을 참을 수는 없는지 급하게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기왕이면 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모습까지 보면 정말로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네, 알겠습니다. 엘레나 님, 가끔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네,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할게요.”
그렇게 엘레나와 유아영 역시 잠깐 파란 길드에 자리를 비우게 됐다.
‘이거 조금 찝찝하네. 아니… 정말로 싱숭생숭해.’
김현성과 조혜진이 대륙 합동 훈련으로 파란 길드를 비웠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렇게 큰 빈자리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김현성이야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최근에는 본인 역시 수련의 필요성을 느낀 모양인지 본격적으로 틀어박혔지만, 그래도 조혜진이 종종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어쩌면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한 거일 수도 있고….’
나 역시 이런저런 일로 바빠지면서 주변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잠깐 앉아 멈춰서 있게 되니 빈자리가 확 하고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길드가 조용했구나.’
싶고….
‘그동안 잘 만나지도 못했네.’
라는 생각을 괜스레 떠올리게 된다. 물론 길드가 조용해진 것에는 박덕구가 떠난 게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정하얀도 마탑에 가 있고….’
외부인이지만 길드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차희라 역시 폐관 수련인지 뭔지를 해야 한다면서 사전 고지도 없이 동굴에 틀어박혔다.
그녀답기는 했지만 뒤늦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그럼 지금 길드에 남아 있는 게 누구야?’
김예리와 김창렬은 뭘 하는지 매번 밖으로 나가 있으니 딱 하고 꼬집을 수 있는 사람은 선희영이 끝이었다.
심지어….
‘얘도 자기 일 하느라 바쁘니까.’
솔직히 내가 이런 부분까지 걱정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본래 어디를 가더라도 소속감이라는 것에 크게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내가 파란 길드에 꽤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내리꽂혔다.
단순히 길드의 전력 저하를 걱정하기 이전에 길드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떨어질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희한해.’
함께 목숨을 걸고 사선을 헤쳐 나왔다는 사실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마 이곳 사람들에게 제법 정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지냈다는 사실도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감성적으로 판단했다면, 파란 길드원들이 흩어지는 걸 최대한 배제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서로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다른 상황이었으니까.
앞서 떠올렸던 것처럼 길드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박덕구는 파란 길드의 품 안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안기모는 그런 박덕구를 따라나서는 게 본인에게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녀석은 성직자였지만, 전위에 서는 타입이니 박덕구에게 배울 게 있겠지.
엘레나는 세계수의 보호 아래서 힘을 키우자 했고, 유아영도 드워프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하얀도 그렇다. 지금은 본인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정하얀이라면 스스로 마탑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모두 바보가 아닌 만큼 인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내리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든 거고.
대륙 합동 훈련이나 북부 전진기지 시공,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등 현재 대륙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별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어와 꽂혔을 것이다.
굳이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엘레나가 왕국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그런 정치적인 도움을 주기 위함이리라.
‘기뻐해야 하는 게 맞네.’
기분 좋아야 하는 게 맞다. 이것 역시 씨앗 뿌리기의 일환이었으니까.
그렇게 엘레나를 보내고 난 후, 나 역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전에 일에 더 집중하는 게 옳다.
떠나기 전에 선희영, 황정연과 조금 시간을 보내고, 곧바로 길드를 나서기 시작했다.
이쪽과 함께 북부로 떠나는 인원은 이기영 친위대의 박리안과 수행원 몇 명이 끝.
물론 북부로 함께 가는 인원은 전원이 파란 길드 탈퇴를 마친 상태였다.
아예 혼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걸 길드에서 허락해 줄 리 없다.
김현성은 쌍검의 박리안을 비롯한 몇몇을 뽑아내게 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언제 어디서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보험차 괜찮을 것 같기도 했고, 실제로 사건이 터질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막 밖을 나가자 의외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북부로 가는 거예요?”
“응, 준비는 미리미리 해야지. 그나저나 바쁘다면서, 누나. 찾아가도 모른 척할 때는 언제고… 위원회 발족 때문에 밥 먹을 시간도 없는 거 아니었어?”
“그래도 내 님이 멀리 떠난다는데 얼굴은 한 번 봐야 하지 않겠어요?”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북부로 올 거 아니야?”
“3개월은 걸릴 거예요.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고… 이쪽에도 책임자는 있어야 하니까. 김미영 팀장님이 있기는 하지만, 그분도 요즘 다른 일들로 바쁘시잖아요.”
“뭐, 그렇지.”
“생각보다 빨리 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얀 씨 때문이에요?”
“아냐, 아냐. 그런 것도 있기는 한데, 왠지 감이 안 좋거든.”
“시간 많이 남아 있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일단은 그렇게 보고 있기는 해.”
“준비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뭐. 그나저나 외롭겠네요. 그래도 인원이 많은 검은 백조야 몇 명 빠져도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데, 파란 길드는 몇 명 빠지니까 완전히 텅텅 빈 것 같기도 하고….”
“뭐,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까.”
“실제로 보는 거랑 편지나 영상으로 보는 거랑 같나요.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나 봐. 인제 그만 가봐요.”
“…….”
“…….”
“이건 선물이고요. 어차피 보온 마법을 달고 살 테지만 북부는 춥다더라. 그럼 나중에 또 보자고요, 파트너.”
“고마워, 파트너.”
‘조금 기분이 이상하네.’
딱 그런 기분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하네.’
확실히.
정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하얀이는 괜찮으려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