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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66화 (557/1,590)

# 566

회귀자 사용설명서 566화

1년 이후의 대륙(4)

‘받지 말까.’

받으면 꼼짝없이 전화기에 붙들려 있게 될 것 같아 슬쩍 고민하던 찰나, 이윽고 잠잠해진 여신의 손거울이 시야에 비쳤다.

물론 그동안의 경험상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예상대로 연속해서 새로운 메시지 들이 올라온다. 어떻게 보면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하얀: 전화 안 받으시네요.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시죠?]

[정하얀: 지금 한창 바쁠 시간인데 괜히 연락드렸나 보다. 이거 안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정하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랜만에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정하얀: 지금 다른 여자랑 같이 있는 건 아니죠?]

[정하얀: 위에 문자는 잘못 보낸 거예요. 다른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정하얀: 왜 연락 안 받아요?]

[정하얀: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정하얀: 전화 좀 주세요.]

[정하얀: 이제 끝난 거 맞죠? 그쪽으로 가도 되는 거죠? 지금 가도 되나요?]

[정하얀: 아니에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정하얀: 너무 힘들어요. 잠깐만 전화하면 안 될까요?]

[정하얀: 지금 뭐 하고 계세요? 뭐 하세요? 일하고 있나 보다.]

[정하얀: 여보세요.]

[정하얀: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다.]

수십 개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솔직히 답을 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병이 도진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한소라까지 메시지를 보내온다. 얘는 정하얀보다 더 필사적인 것 같다. 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한소라: 제발 전화 좀 받아주세요. 부탁드려요. 부길드마스터님, 제발… 정하얀 님 전화 좀 받아주세요. 제발, 제발요. 아니면 답장이라도 해주세요. 이거 읽고 계시죠? 읽고 계신 거 맞죠?]

[한소라: 딱 한 번만 받아주세요. 너무 무서워요.]

‘얘는 진짜 힘들기는 할 거야.’

포상금이라도 많이 때려주는 게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례였다.

실제로 지난 1년간 한소라에게 위로금 차원으로 보낸 생명 수당의 액수도 상당하지 않았던가.

로또에 당첨됐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골드가 한소라의 생명 수당으로 빠져나갔다.

물론 본인은 필요 없다고, 이런 것 필요 없으니까 제발 어떻게든 해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대노 상태에 접어든 정하얀 옆에 한소라가 없는 건 이제는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몇 번이나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누가 보기에도 아슬아슬 해 보였던 적이 많았으니까. 한소라가 중간에서 적절히 조율자 역할을 해준 것이 유효했다.

“얘가 야밤에 전화해서 제발 와달라고 울부짖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발 와주세요. 제발, 제, 제발요. 지금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끄윽, 제발요…. 지금 안 오시면 안 돼요. 큰일 날 것 같아요. 빨리 오셔야 돼요.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제발, 제발, 제발 부길드마스터. 딱 한 번만…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한 번만 살려… 흐윽…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좀 살려달라고… 제발… 이 씨발 쓰레기 새끼야아아아…’

라는 영통을 받았을 때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제발 와달라고 외치는 한소라의 얼굴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한소라의 전화 한 통에 나보트 위원의 거울 호수는 물론이거니와 린델과 대륙이 무사할 수 있었으니 그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극대노 상태에 접어들기 전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준 것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만약 타이밍이 조금 늦었더라면 제2의 27군단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1년 동안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계획은 실패한 상태.

하지만 정하얀의 성장이 물꼬를 텄다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성장이 예전에 있었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단 하나를 밟고 올라섰다는 거에 커다란 의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성장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뭐.’

계획이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1년 동안 저런 식으로 정하얀을 마주한 건 딱 2번이다.

1개월을 참아내도 대단하다, 엄지를 추켜올릴 정도인데 6개월 이상을 참아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아예 얼굴도 보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고 싶었지만, 이 줄다리기를 그딴 식으로 나 몰라라 운영했다가는 순식간에 극한 상황에 처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정확히 어떤 상태에 처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요청했던 영상 편지 역시 커다란 역할을 해줬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괜스레 이전에 보내왔던 영상을 터치하자 상대적으로 밝은 1년 전 정하얀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빠. 잘 지, 지내시죠? 저도 잘 지내요. 갑자기 이렇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오늘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거든요. 탑 안에 있는 책들도 엄청 많이 읽었어요. 새로운 마법들도 많이 만들었고요.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어요. 네, 참아야죠. 전, 전,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

-마탑 할아버지들도 전부 깜짝 놀, 놀, 놀랐어요. 이런 마법은 처음 본다면서요. 잘 지내고 계신 거 맞죠? 정말 너,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로요. 이만 줄일게요. 오빠도 바, 바쁘실 테니까요.

그래도 이때까지는 잘 버텨주나 싶었지.

-잘 지내시죠? 가, 갑자기 또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잠깐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제가 사흘 전에 말씀드린 거 기억하시나요?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시연회 중인데… 다른 길드에서도 전부 보, 보고 싶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요. 사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할, 할아버지들이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막 그러셨거든요. 일주일 전이랑 비교하면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 실력이 는 것 같다고 막 칭찬해 줬어요. 사실 여기에서 공부하는 게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니깐요. 거짓말이 아니라 정, 정말로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 그렇죠?

-네, 정하얀 님 말씀이 맞습니다. 허허허, 사실 이전까지 만드신 마법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충분히 획기적인 방식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하냐구!!!

-아… 죄, 죄송….

-아무튼, 지금부터 보여드릴게요. 깜, 깜짝 놀라실 거예요.

-…….

-…….

-…….

-보셨나요? 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편, 편지 말고 꼭 영상으로 보내주세요, 꼭이요. 정말로 보고 싶어요. 매일 매일 보다가 안 보니까 더 그, 그런 것 같아요.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사실 이때까지도 괜찮았다. 조금 날이 선 것 같은 모습에 마탑의 할아버지들이 당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문제가 되는 건 이 이후부터.

자신의 성장을 어필하는 저런 종류의 영상을 약 수십 개 정도 보낸 이후에도 성과가 없자. 조금씩 조금씩 피폐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상 편지 속 정하얀은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방 뒤쪽의 모습은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

내가 알고 있던 정하얀의 방이 아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책들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벽에는 손톱자국이 난무해 있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구석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소라가 아니었을까.

당시 머리가 산발이 되어 있는 정하얀보다 고양이 앞의 쥐 신세가 된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오, 오, 오늘도… 네, 오늘도 영상… 보, 보, 보내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정말 너무요.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너무… 끄윽… 그,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이제 한 번 정도는 만났으면 좋겠다. 진짜… 진짜 싫어. 진짜 너무 싫어요. 오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소, 소라 씨도 그렇데요. 그렇죠?

-네, 네, 맞아요. 정하얀 님… 정하얀 님 말씀이 맞아요, 부길드마스터. 이, 이제는 슬슬 와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정하얀 님께서도 많이 성장하셨고요. 바쁘신 건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길… 길드에 한 번은 들려주셔야.

-소, 소라 씨도 같은 마음이래요. 빨, 빨, 빨, 빨리 와주세요.

-네, 네! 부길드마스터. 제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그, 그리고 제가 저번에 따로 드렸던 말씀 말인데요… 그… 그것도 좀 어떻게… 다시….

-따, 따로 뭘 말했어요?

-아니요. 정하얀 님… 이건 그러니까.

-뭐, 뭐라고 했, 했는데?

-업무적인 일, 업무적인 일… 흐윽… 업무적인 일이었어요. 어어어엉… 엉… 정말이에요.

-뚝.

이후에 보내온 영상에서도 정하얀의 상태가 점점 가관으로 치닫고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었을까.

그나마 저건 양반이다. 오랜만에 보내온 정하얀의 영상 편지는 다른 내용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냥….

-죽….

-…….

-너… 보고… 그, 그러… 면 안 돼. 아, 그게… 응. 그게 좋겠… 아… 죽….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해오는 것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한 번은 터져야 하는 게 맞지만, 지금은 터지면 안 되는 타이밍이라고 판단, 곧바로 짐을 싸고 마탑으로 들어가 정하얀과의 해후를 즐길 수 있었다.

울고불고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달라붙어 와 다시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3일.

그다음에 얼굴을 본 게 그로부터 4개월 뒤였다.

그러니까 한소라의 전화를 받고 출동했을 때가 약 2개월 전이라는 거다.

‘점점 더 짧아지네… 슬슬 여기로 부르는 게 맞나?’

폭발하는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는 상황, 그만큼 성장하고 있어 기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나라고 걱정되지 않을 수 있을까.

거대한 폭탄이 터지는 시기를 계속해서 늦추고 늦춰,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던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매일 같이 수백 개씩 오는 문자 폭탄도 그랬고 한소라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도 신경이 쓰인다.

이런 시기를 한 번 겪을 때마다 정하얀이 소소한 성장을 보인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아.’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칠지에 대한 불안감은 분명히 있었다. 오늘만 해도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지 않았던가.

물론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얘를 이대로 놔두는 것도 문제긴 문제다.

마침 박덕구도 발견한 타이밍이기도 하니 슬슬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안 그래도 대륙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인원 일부가 넘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실정이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연속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정하얀의 동영상이 꺼지고 영통이 연결되는 것은 순식간.

1초도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수락을 눌렀는지, 곧바로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오… 오빠. 오빠! 무슨 일이세요?

‘무슨 일이긴… 네가 불렀잖아.’

-문, 문자 보셨구나. 제… 제가 조금 많이 보냈나요? 일, 일하시는 데 방해됐을 것 같은데….

‘방해가 되기야 했지. 방해가 안 될 수가 있겠어.’

“아니야. 마침 쉬고 있는 상태였고. 어때 공부는 잘돼가?”

-네, 조, 조금 전까지 계속 연습하고 있, 있, 있었어요. 소라 씨랑 같이요.

‘조금 전까지 문자 보내고 있었잖아.’

“내가 괜히 전화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갑자기 미안해지는데….”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네. 저도 딱 쉬려고 했었던 타이밍이라. 네… 그, 그, 그런 타이밍이라….

‘하얀이는… 진짜 변한 게 없네.’

행동이 아니라 생김새도 그렇다. 어깨까지 오던 머리카락이 조금 더 길어졌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정상인 것 같은 외관이다.

메시지 폭탄을 날렸을 때는 항상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핏발이 선 눈으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며 말을 더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척이나 깔끔한 모습으로 통화에 임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더 시간을 줘도 괜찮을 거라고 여겨졌다.

-소라 씨도 같이 쉬고 있었어요. 여, 여, 여기요.

하지만 정하얀이 비춘 한소라의 상태를 본 이후에는, 저 모습이 급하게 셋팅된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핏기가 사라진 듯한 얼굴, 저도 모르게 오돌오돌 떨리는 몸과 이 세상 두려움을 모두 담은 것 같은 눈.

연쇄 살인마 혹은 영화 속에 나오는 귀신과 밀폐된 공간에 갇힌 피해자의 모습 그 자체.

아마 전화가 오기 전까지 저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리라.

-안… 녕… 안녕하세요. 네, 정하얀 님 말씀대로 계속 마법 공부 중이었어요. 부길드마스터.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지난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는 듯한 모습.

하지만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은 계속해서 SOS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건 분명히 도와달라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 그, 그 그렇죠?

이윽고 다시금 화면에 비친 정하얀의 눈동자는 솔직히 말해 무섭다.

결국, 생각해 뒀던 말을 입에 담자, 곧바로 반응해 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한 달 후에 이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이제 슬슬 나도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물론 하얀이가 괜찮으면 거기서 조금 저 지내도 되지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 아, 아니에요. 갈게요. 빨, 빨, 빨리 갈게요. 빨리….

“응, 그 대신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해야 돼. 지난번이랑 비교했을 때 제대로 달라진 게 없으면 내가 하얀이 공부를 방해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해할 수 있지?”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자. 우리….’

-네, 네, 이, 이해할 수 있어요. 끄윽… 이해할 수 있어요. 히끅, 끄윽, 살았다. 히끅, 드디어 끝났어. 흐어어엉… 히끅, 드디어… 끄윽, 살았어. 열, 열심히 하고 바로 갈, 갈게요. 뛰어갈게요. 끄윽.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동안 서러웠는지 눈물을 터뜨리는 정하얀.

그리고 그 옆에서 함께 눈물을 터뜨리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신이시여… 흐윽,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한소라 역시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돈 많이 줄게, 소라야. 진짜….’

조금이지만 죄책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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