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7
회귀자 사용설명서 567화
1년 이후의 대륙 (5)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뭔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는 했다.
한소라와 정하얀이 생각보다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정하얀을 컨트롤 하는 데 그녀가 도움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정하얀이 극대노 상태로 진입한 순간 터지는 폭탄을 어느 정도 제어해 줄 수 인물, 애초 극대노까지 흘러가지 않게 잘 조절해 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다.
대륙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 외줄 타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예전에 내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
필사적으로 정하얀의 화를 가라앉히려 설득하거나, 어떻게든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노력하는 모습에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던가.
술만 퍼마시면 개가 되는 친구를 다독여 주고 챙겨주는 소중한 사람, 그게 바로 현재의 한소라의 포지션이었다.
나, 박덕구, 김현성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은 정하얀이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할 수준까지 왔으니….
사실 한소라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고 판단해도 될 것이다.
물론 항상 그렇듯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위협받는 일까지는….
‘일어나지는 않겠지, 뭐. 사실 생명 수당도 위로금 차원이니까.’
수당까지 합치면 길드 내에서 받아가는 연봉 순위도 최상위에 가깝다.
나를 제외하면 린델 내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이지 않을까.
이것저것 전부 따지고 들어가자,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던 죄책감이 어느새 등껍질에 숨은 거북이처럼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한 달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 한차례 살아갈 힘을 얻어갈 것이 분명, 물론 그녀보다 더 자극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 달 동안 많이 성장하려나?’
혹시나 다시 이전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마지막 스퍼트를 올릴 게 분명했다.
이런 단기간 내에 얼마나 성장할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를 지켜보면….
‘한 계단 정도는 더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대상이 정하얀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생각이기도 했지만, 포괄적으로 봤을 때는 배부른 생각이다.
겨우 한 계단이지만 그 계단을 오르기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하는 마법사들이 대다수라는 걸 떠올려 보면 지금의 성장세도 비정상에 가깝다.
그래도 기왕이면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팍팍 올라가면 좋겠다는 희망 사항이야 있었지만, 흘러넘쳐 터지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코스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맞다.
아무튼 간에 정하얀 생각은 여기에서 끝.
정확히 한 달 후에는 부르지 않아도 이쪽으로 달려올 테니, 그때 즈음 박덕구와 함께 해후를 즐기면 될 것 같았다.
‘다들 잘 지내려나 몰라.’
엘레나와 유아영은 한 번 연락했었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김창렬과도 연락을 주고받았었다.
선희영과 황정연 그리고 앞서 통화를 마친 김미영 팀장은 업무차 얼굴을 본 적도 있었고, 길드에 남은 인원들과도 거의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하얀과 한소라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차례 만났고, 김현성 대신 대륙 합동 훈련소의 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조혜진 역시 업무차 미팅한 적이 있었다.
연락이 끊긴 것은 박덕구와 김현성, 길드원은 아니지만, 차희라가 전부.
특히 김현성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딱 9개월 전이다.
훈련소의 기틀을 잡아놓은 이후에 본인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얘가 참 독하기는 해.’
굳이 연락을 끊으면서까지 처박힐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집중하기가 힘들어 연락드리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해올 당시에 얼마나 황당했던가.
막 관리 위원회에 위원장으로 추대됐을 시점이었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웠다.
간혹 조혜진을 통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전해오기는 했지만….
정말로 9개월 동안 검만 휘두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기도 했고, 실제로 내려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전혀 새로운 짐이 녀석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이었다.
이전처럼 그 짐을 버거워하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의외로 멘탈이 약한 녀석이니 잘 견디고 있을지 걱정이 생기기는 한다.
성장이 침체되거나 본인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점점 자기 생각에 매몰될 수도 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락을 넣었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있는 53구역이었다.
“아, 저 이 위원장입니다. 그러니까….”
-네, 여, 영광입니다. 53건설 구역의 마이클 웨인이라고 합니다. 이기영 위원장님. 이렇게 따로 연락을 주실 줄은… 영,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개발 계획 발표가 있었을 때 자리에서 한 번 뵀었죠. 언제 한번 연락하려고 생각은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무 바빠져서 제대로 찾아뵙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쪽은 조금 어떻습니까?”
-갑작스레 몬스터들이 나타나서 조금 당황했습니다만, 다행히 박덕구 님과 안기모 님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몬스터들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벽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인명 피해도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작업에는 차질이 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도록… 노력을….
“괜찮다니 다행이군요. 그보다 김미영 팀장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지금 자리에 있습니까?”
-네, 그, 그런데 지금은….
“…….”
-사냥하신 몬스터 대금을 치르신 후에 곧바로 길을 떠나셨습니다. 김미영 팀장님에게 언질을 받은 대로 여신의 손거울을 드리고 저희 쪽에서도 모시려고 했지만, 그… 필요 없다고 말씀하시고는….
“아….”
-죄송합니다. 이, 이걸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하셔서… 저로서도 어떻게 막을 수가….
“아니요, 후우, 괜찮습니다. 뭐, 웨인 님 입장도 이해합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마시고 후처리에 집중해 주세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어느 쪽으로 간다는 말은 있었습니까?”
-최북단으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위원장님이 계신 장소가 아닐지….
“음, 뭐, 그렇겠군요.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위원회 측에서도 따로 지원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영광이었습니다.
“네.”
뚝
“아, 왠지 불안하더라니. 이 돼지 새끼 진짜….”
최북단까지 올라오기는 할 것이다. 그 와중에 어느 곳으로 샐까 불안한 것이 문제.
바로 떠났다고 하니 유랑을 즐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오지랖이 넓은 녀석이니 이 마을, 저 마을에 들를 때마다 마을 촌장과 상점 주인 아주머니의 퀘스트를 도맡아 할지도 모른다.
곰이 나타났는데 해결 좀 해달라거나, 마을에 땔감이 부족한데 좀 구해주면 좋겠다는 쓸모없는 퀘스트 말이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
‘업무도 해야 되는데.’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도 잡히지 않는데 쓸데없이 안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 코트.’
방한 기능이 달린 두꺼운 코트를 입고 본격적으로 밖을 나서자,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직원들이 인사를 해왔다.
뒤쪽에서는 곧바로 박리안을 비롯한 경호대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서자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성벽 그리고 그 위에 달라붙어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기술자들이었다.
정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성벽이 높다. 성벽 중간중간에 세워진 마탑은 더욱더 높았고.
아직 완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마력석으로 쌓아 올린 성벽은 대충 보기에도 높고 굳건해 보인다.
이 모든 걸 1년 안에 올렸다고 생각하니 절로 박수가 나왔다. 물론 이 장소는 이 정도의 모습은 보여줘야만 한다.
‘여기가 1차 방어선이니까.’
사실상 가장 중요한 장소라 봐도 될 것이다.
‘박덕구 이 새끼는 성벽을 쌓고 싶으면 여기나 조금 도와주지.’
아직도 작업이 한창인 장내가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나조차 이 정도로까지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차 방어선 이외의 지역들은 작업이 느렸지만, 물량을 이쪽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중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공사가 원활하게 진행된 가장 큰 이유가 복지 때문이라는 것에는 그 누구도 반대 의견이 없을 것이다.
일당도 세고 보험도 된다. 추운 환경을 고려해 온도 마법도 유지해 주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기술자와 노동자들을 대우해 주고 있으니 속도가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착취하고 채찍질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더욱더 잘해주고 있는 상황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앞으로 한 6개월 정도면 되려나.’
그 정도 시점이 지나면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 너무 무난한 게 조금 불안하기는 한데….’
딱히 사건이 일어날 건더기가 없었지만, 그래도 너무 원활하게 잘 풀리고 있다는 게 왠지 불안했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왜 이렇게 근심 걱정이 많은 얼굴이에요?”
“그냥저냥. 뭐, 오늘은 따로 할 일 없지? 준비는 다 됐어?”
“합동 훈련소에서 인원들 들여오는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거의 다 됐어요. 주거 시설이랑 편의 시설도 마련해 놨고. 병력도 순조롭게 출발한 것 같던데요. 곧 병력이 들어오지 않을까 싶어요.”
“음….”
“훈련소 인원들까지 들어오면 더 도시처럼 보이겠네요. 여기는….”
“노동자랑 기술자 숫자도 많고, 얘네들한테 전부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인력도 만만치 않으니까. 뭐, 이미 도시화 됐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근처 구역까지 합치면 웬만한 왕국 정도는 될걸. 이미 시장도 형성됐고, 치안도 신경 써야 되는 수준까지 왔으니까.”
“아직까지는 잘 버텨주고 있는 것 같은데, 조금 혼란스럽기는 하겠네요. 조금 걱정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걱정될 게 있어?”
“여러 가지 있죠. 당장 노동자 파업 문제만 봐도 그렇지 않아요?”
“파업 문제야 매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일이야. 실제로 크게 일어난 적도 없었으니까.”
“아뇨, 아뇨. 너무 쉽게 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요. 일부 기술자들은 웬만한 모험가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런데도 파업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정신 상태가 썩어 문드러진 거예요. 이미 지들끼리는 노조를 만들어야 하네, 어쩌네, 이런 소리를 하고 있을 정도니까. 이 대규모 공사가 꽤 비전이 좋은 것 같으니 귀족노조 한번 해보고 싶다는 심산인가… 6구역 작업 속도가 다른 지역보다 느린 게 대놓고 태업하고 있어서래요.”
“거기 어디서 관리하고 있지? 파업 노조 어쩌고 하는 애들, 베니고어 넷 채팅 로그 확인해 봤어?”
“깨끗해요. 저도 처음에는 누가 의도적으로 흔든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표면적으로 드러난 세력 중에서는 위원회와 반목하고 있는 애들이 없지만, 가장 꼭대기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거든요.”
“흠….”
“오빠가 보고서와 문서들도 보고받은 것과 현장의 상황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 하는지 알겠네.”
“각 구역 건설 책임자들 입장에서도 태업 문제나 파업 문제 혹은 조금 커다란 사건이 터져도 필사적으로 덮고 싶어 할 걸요. 이기영 위원장에게 잘못 보이면 인생 꼬일 수도 있으니까. 본인들이 맡은 구역은 안전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척. 옛날 우리나라 군 고위 간부들 생각하면 딱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무슨 일이 터져도 부대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딱 그 짝 아니에요?”
이지혜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구두로 보고받은 53구역의 웨인 역시 건설 현장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정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몬스터 웨이브를 맞고도 공사 중이던 현장에 이상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박덕구와 안기모가 있었으니 크게 망가지진 않았겠지만, 책임자 입장에서는 그 작은 흠도 자신의 커리어에 흠집이 될까 두려울 게 뻔하다.
‘예전에 왕들이 바보가 되는 이유가 있어.’
이지혜가 아니었다면, 눈과 귀가 닫힌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파업이라, 파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