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569화 (560/1,590)

# 569

회귀자 사용설명서 569화

미하일(1)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미하일 님.”

“차나 한잔 마시자는 군요. 정말로 한가하게 차나 마시자고 부르지는 않았을 거고, 당신들의 생각이 들어맞은 모양입니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결단이라고까지 말할 필요 있겠습니까. 연합, 공화국 그리고 정말로 대륙을 위하는 길이 뭔지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깨달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미하일 님의 명성에 금이 갈까 두렵습니다. 아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 자체가 죄스럽군요.”

“죽고 나면 모두 소용없는 것이지요. 명예나 명성 같은 것에는 집착하지 않은 지 제법 오래된 것 같습니다. 그 친구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당신들 역시 같군요.”

“…….”

“그 친구는 자신이 지켜야 할 명예에 모든 걸 걸었었죠. 목숨조차 명예와 이름을 위해 던질 수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저는 그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끝까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하하, 아마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바보 같다고 비웃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지금껏 쌓아올린 명성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할 정도로 이 일이 중요한 일이냐고, 그렇게 말하며 비웃을 게 분명합니다.”

“…….”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 대륙에서 살아왔습니다. 모험가라 불리는 당신들이 오기 전부터 이 대륙에 자리 잡아왔죠. 이 넓은 땅 곳곳에 제 고향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아끼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신들이 처음 대륙에 진입했을 때 말입니다만, 저는 당신들이 대륙을 발전시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신들은 이곳을 급속도로 발전시켰죠. 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죠.”

“…….”

“그 친구처럼… 저는 이기영 위원장이 대륙의 약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지만 그자는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

“이기영 그자가 내게 이곳을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왔을 때, 그자의 눈을 보고 반쯤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대륙의 약이 되기에 그자는 욕심이 너무 많아요. 이 멍청하고 작은 손거울을 보세요. 당신들 세상에는 이런 게 실제로 존재했다고 했었죠. 하지만 믿어지십니까?”

“…….”

“이 작은 물건이 이 대륙 전체를 컨트롤하고 있다는 게… 믿기십니까? 처음에는 먼발치에서 신기해하며 무서워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 작은 손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 없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왔어요. 사람들 대부분은 알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겠죠. 작지만 무한대로 넓은 이 공간에 수많은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고, 이기영 그자는 이걸 열어볼 수 있다는 것. 전 대륙이 감시당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에게 말입니다.”

“…….”

“이런 건 자유라고 할 수 없어요.”

“네.”

“이런 삶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대륙 전체가 한 사람한테 통제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예전에 그 친구가 흥미로운 소설을 설명해 준 적이 있었죠. 조지 오웰이라는 저명한 작가가 썼던 소설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그 소설 속에 나오는 공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개인이 전체를 통제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그자를 비판하는 언론까지도 그의 검수를 받고 미디어를 내보냅니다. 그자를 칭송하는 언론 역시 마찬가지고요.”

“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이기영 그자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이 전체의 자유를 통제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최소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아니요. 어차피 당신들은 공감하지 못하겠죠. 그 친구도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서로 가치 있는 게 다를 테니. 그 친구는 명예 때문에 죽고 저는 제 고집 때문에 죽겠군요.”

“미하일 님은 죽지 않을 겁니다. 죽는 것은 저희의 역할이지, 미하일 님의 역할이 아니에요.”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더라도 저는 죽을 겁니다. 교국에서 저를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는 곧바로 출발해야 하니 일단 밖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소식을 들고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

“…….”

“뜻대로 하겠습니다.”

한 발자국을 뒤로 물리자 조용히 책을 읽는 미하일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필요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괜스레 입안이 쓰다. 저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정말로 맞는 일인지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거였으면 애초부터 제안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자신들 역시 최악의 경우 그를 죽일 각오를 하고 그와 접선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번 일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었더라면 저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그런 주제에 갑자기 그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고, 걱정하고 있다니….

‘사람 일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아마 그가 너무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정답이 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는 것이 고작이리라.

‘복잡해.’

머릿속이 너무나도 복잡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 않아.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니까.”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욱더 확신을 얻었다고 말씀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 외에도 맞서 싸워야 할 이유를 알게 됐으니까요. 미하일 님 덕분에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네 말이 맞아.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지.”

“그렇죠? 지금 이 상태라면 대륙에 미래는 없을 거예요. 하나부터 열까지 그자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죠. 이제는 뭐가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이기영 명예추기경, 아니, 이제는 위원장. 그자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이들이 대륙에 얼마나 될까요. 아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아.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자가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언론과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자가 대륙의 해악을 끼치고 있는 바퀴벌레 같은 자라는 걸 누가 눈치챌 수 있겠어? 대륙에 악마를 소환하고, 신을 사칭하고 속이며 대륙인 전체를 기만하는 자라는 걸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겠어.”

“어째서 그런 자를 믿고 따르는 건지….”

“민중들의 우매함을 꾸짖기보다는 그자의 비열함을 곱씹는 게 맞아.”

“네, 그렇네요.”

“정확히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가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이 공사 자체가 의미 없는 행동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위기를 조장하고, 가상의 외부의 적을 끌어들여 대륙을 조금 더 컨트롤하기 쉽게 만드는 거죠. 손거울의 출시가 제법 교묘하다는 걸 보면 충분히 생각해 봄 직한 이야기라고 봐요. 구태여 파란 길드를 탈퇴하고 위원회로 자리를 옮긴 것 역시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 봐도 되고요. 보세요. 말 몇 마디 하면서 기사를 내보냈을 뿐인데 그자는 대륙의 중심이, 지도자가 되어 있어요. 내로라하는 권력자들 역시 그자의 눈치를 보고 있고, 그자의 뜻에 반하는 이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죠.”

“…….”

“대중들의 목소리와 자유의지도 모두 그에게 컨트롤되고 있어요. 온갖 미디어 매체들이 모두 그자의 손에 있고, 그자는 본인에게 유리한 정보를 꺼낼 수 있고, 숨길 수 있어요. 대륙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정보들 역시 열어볼 수 있죠. 이기영 그자가 능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자는 잘못된 지도자예요. 저 역시 한때는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들 중 하나였지만 당신들 그리고 미하일 님과의 만남이 제 눈을 뜨여준 것 같아요. 아마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 역시….”

“나는 그렇게 그럴듯한 가치로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야, 라파엘. 내 동료들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렇지 않아. 나를 움직이는 건 복수심이지 보기 좋게 만들어낸 가치가 아니야.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라.”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대륙의 진실에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달라지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목적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에 든 것이 다르다.

이전까지는 이들을 움직인 게 단순한 복수심이었다면, 지금은 책임감과 숭고함이라고 생각할 정도.

아마 그 누구보다 이들이 더 그 차이점을 깨닫고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단장님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다른 분들 모두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단순한 복수심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으니까. 이유가 어찌 됐건 저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요. 우리 결사단이 하려고 하는 일은 분명히 오랫동안 대륙에 기억될 거예요.”

“아니, 우리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테러범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할 거야.”

“듣기 안 좋은 말이네요. 테러범이라니. 그래도 나름대로의 정의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인데….”

“하핫.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라파엘.”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만약에 일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달라지는 건 없어. 기회를 기다리고 계속해서 움직일 뿐이야.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

“내가 아는 그자라면 분명히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 줄 거야.”

“…….”

“군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자는 책사가 아니야. 연기자고 사기꾼이지. 그자의 무대는 전장이나 집무실이 아니야. 무대지. 그게 바로 이기영이라는 놈의 본성이야. 가만히 앉아 있을 리가 없지. 이번 일 역시 그자에게는 홍보의 수단이 될 거야.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많을 거라고 느끼고 있을 테니까.”

“그럼 그 이후에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것밖에는 없어. 사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파란 길드를 탈퇴했다고 한들, 그자가 길드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대로니까. 하나둘 이쪽으로 모이고, 합동 훈련소에 있는 병력까지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결사단의 계획은 수포가 될 거야. 어쩌면 꼬리를 잡힐지도 모르지. 최대한 이번 기회를 잡을 수밖에 없어.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으니까.”

“…….”

“…….”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다른 방법은 없어. 그자의 수명이 다하기 전까지는 상황이 뒤바뀌지 않겠지.”

“그래도 뭔가 다른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잡지를 만들어 배포한다든가… 뜻이 맞는 이들을 모은다든가 하는 방향으로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인다면 언젠가는 대륙인들 역시… 알아줄 거예요. 분명히 알아줄 거예요. 결사단에 모인 사람들을 보세요. 꼭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할 필요는….”

“아니, 이 이상은 위험해. 이 1년 동안 너무 몸집이 커졌어. 지금까지 그자의 눈에 띄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것 정도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야. 조금이라도 몸을 일으켰다간 곧바로 군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게 분명해. 지금은 다른 방향을 생각하는 것보다 이미 계획되어 있는 걸 실행에 옮기는 게 맞아. 아마 미하일 님이 그자와 만남을 가지는 동안 이곳에 감찰대가 올 거다. 다른 이야기보다 이 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라파엘.”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이미 미하일 님도 한 배를 타셨으니까. 이제 와서 몸을 뒤로 돌렸다가는 모든 계획이… 크윽….”

“단, 단장. 괜찮으신거죠?”

“하아… 하아… 응,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걱정할 필요 없다, 라파엘.”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단장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원통하게 느껴진다.

결사단.

궁극적인 목표는 이기영 위원장으로부터 대륙을 완전 해방 시키는 것.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이들 이었지만 아직은 반정부 세력에 불과했다.

‘언젠가는 알아줄 거야.’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분명히 이들의 희생과 투쟁을 기억해줄 것이다.

흔들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