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0
회귀자 사용설명서 570화
미하일(2)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오랜만입니다. 미하일 님. 도통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도 일이 제법 바빴던 터라….”
“제가 먼저 찾았어야 했는데… 정말로 죄송합니다.”
“일단 앉으시죠.”
“네.”
“차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없는 종류는 없으니, 드시고 싶으신 것 아무거나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전부 다 괜찮습니다. 기왕이면 위원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차를 들고 싶군요.”
“그렇다면… 아, 이게 좋겠군요. 북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딸기로 만든 차입니다. 조금 달기는 하다만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고요. 이미 드셔보셨을 수도 있을 테지만… 굳이 하나를 추천해 준다고 하면 이걸 선택하고 싶습니다. 요즘 제가 빠져 있는 터라… 분명히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감사히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감사하시니 제가 더 민망하네요. 그래서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셨습니까.”
“매일 같습니다. 아마 위원장님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남는 시간에는 신문이나 책을 읽고는 합니다. 물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딱 그 시간까지입니다. 아무래도 현장의 규모가 상당히 크니… 마치 도시를 운영하는 느낌이더군요. 노동자들의 숫자만 해도 웬만한 소도시를 뛰어넘을 정도니까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고 삶의 터전이 되어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현장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미하일 님. 특히나 1번 대부터 3번대까지는 거의 대도시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니까요.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의 즐길 거리, 먹을거리, 놀 거리, 감히 말씀 드리건대 웬만한 소도시보다도 나을 겁니다. 애초에 도시 계획을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아 기분이 좋더군요.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을 꽁꽁 남겨두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돈을 벌고, 소비하고, 세금을 내고, 또 그 세금으로 다른 일에도 임할 수 있고 그게 경제가 돌아가는 생리가 아니겠습니까.”
“네, 위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저는 경제에 무지합니다.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시장이 형성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발상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정말로 믿을 수 있는 분들에게 현장을 맡긴 겁니다.”
“예.”
“단순히 건설 책임자를 원했다면 미하일 님에게 연락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종족 차별적 발언으로 들리시겠지만 저어기 드워프들에게나 맡겼겠죠. 현장 책임의 구성을 건설자가 아니라 행정가들에게 드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건설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만 보고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나 빠져나갔는지 모든 걸 알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아주 사소한 문제까지 전부요. 그래서 미하일 님을 부른 겁니다.”
“예.”
“혹시나 미하일 님이 오해하시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
“저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만약 제가 당신의 능력을 의심했다면 그 중요한 자리에 당신을 앉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하일 님께 맡긴 거예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요. 미하일 님을 꾸짖거나 압박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흘려 들으셔도 되고요. 쓸데없이 흥분한 것 같아서 민망하군요. 뭐, 그래서 혹시 이와 관련해서 다른 할 말은 없으십니까?”
“죄송합니다만, 정확히 무슨 말씀을 듣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현장의 작업이 늦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기는 하나, 충분히 빠른 속도입니다. 물론 내부적인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만, 이는 충분히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고를 드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음….”
“…….”
“…….”
천천히 얼굴을 살펴보자 평소와 같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솔직하게 말했다고 해야 되나?’
현장에서 일어나는 파업, 태업과 같은 작은 문제들을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어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해결할 수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당연하게도 미하일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 말이 맞기는 해.’
권력 구도에서 밀려날까 말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다른 추측이 더 설득력 있다.
대륙에 내놓으라고 하는 행정가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
작은 문제가 생겼다고 한들,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는 거다.
실제로 시위가 일어나 개판을 치는 종류의 사건이 터졌다면 당연히 보고하는 게 맞겠지만 이제 막 문제가 생긴 시점이 아닌가.
모양새가 조금 우스워져 괜히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될 정도.
부하 직원을 믿지 못해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하고, 또 보고하라는 상사와 다를 바 없이 비칠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얼굴이 붉어진다.
내 사람이 아니지만, 이쪽이 픽한 사람이기도 했고… 믿고 맡긴 만큼 그만큼의 신뢰도 보여줬어야 했다.
‘고작 파업이니까.’
물론 가능성을 완전히 떠나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차례 정도는 물러서도 상관없는 상황처럼 비쳤다.
어차피 일이 어찌 됐건 간에 결과는 이지혜가 들고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봤자, 그림만 더 이상해질 것이다.
미하일이 원인이 아니라면 더욱더.
‘지혜 누나가 싫어하겠는데.’
정말로 노동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면 오히려 미하일을 보듬어주는 게 옳다.
괜스레 한차례 얼굴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얼굴, 멋들어지게 기른 수염과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 다소 딱딱한 것처럼 보이는 것 같은 외관, 누가 봐도 지식인 같아 보이는 외관은 괜스레 신뢰감이 느껴진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보고에 누락된 내용에 대해서는 이후에 시간이 날 때 언질을 주는 것이 나으리라.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쁘신데 붙잡아 두는 건 아닌지 죄송합니다만… 제가 꼭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일은? 이제 1년이 지났는데, 조금은 적응이 되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직 적응하는 중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조금 민망합니다만, 확실히 쉽지만은 않더군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도시의 형태를 띠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로 당황스러운 상황에 많이 마주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훌륭히 이끌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요.”
“음,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시니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을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달리는 와중에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미하일 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현장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부분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네? 어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렇… 군요.”
“본래 인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인간은 다수에 포함되어 있고 싶어 해요. 자신이 비주류라고,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경우도 다르지 않은 것 같더군요. 다수에 포함되어 있어야 인간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직면한 문제나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더욱더요.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소수에 포함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겁니다.”
“…….”
“저는 그게 인간의 습성이라고 봅니다. 만약 내부적인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제 말을 참고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마음속에 새겨듣겠습니다.”
“뭐, 알아서 잘 해주실 테니… 참고만 해주셔도 됩니다. 자꾸만 말씀드리는 것 같아서 저도 민망합니다만, 절대로 미하일 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조금…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 고쳐야지, 고쳐야지 하는데 제대로 고쳐지지 않더군요.”
“…….”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일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도 좀 하면서 말입니다.”
“예.”
그렇게 자리에 앉은 이후에는 곧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만약 혼자였다면 금방 끝날 식사였겠지만, 내가 녀석을 대접하고 싶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식사였던 만큼 조금은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했다는 거에 대한 사과이기도 했지만, 아마 녀석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테니까.
“아내분은 잘 지내십니까?”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혹여나 이곳 생활에 불편함을 겪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잘 지내고 계신 모양이군요.”
“…….”
‘얘는 왜 호응을 안 해?’
뭔가 살짝 불편한 얼굴, 최근에 가정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킹리적 갓심이 들기는 한다.
싫은 주제를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지만, 생각보다 그 내용이 금방 소진된다는 게 문제.
확실히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이라 그런지 매사에 진지하고 재미가 없다. 무슨 농담을 해도 피식 웃는 걸로 끝이고….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이야.’
하지만 탐이 나는 타입이기도 하다.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인원들은 언제 여기로 들어오는 겁니까?”
“아마 한 달 뒤 정도면 병력이 배치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렇군요….”
“미친놈처럼 보이실 거라는 거 압니다. 갑자기 대륙의 북쪽으로 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전진기지를 만든다는 게 정상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히 뭔가 다른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원장님.”
“하하, 괜찮습니다. 베니고어 님의 예언이라고는 하나, 아직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은 이야기일 테니까요. 미하일 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실 거라는 거 압니다.”
“아니요, 저는….”
“굳이 부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로는 이해해도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의구심이 남아 있을 겁니다. 제가 미하일 님이었어도 같은 걸 느꼈을 거예요. 지금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직은 먼 곳에 있을 위협일 테니… 대부분이 그럴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걸 적으로 삼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
“위협은 실존합니다. 제 목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이건 진실입니다.”
“…….”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은 전부 헛짓거리가 아니게 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 더 힘내주세요. 정말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단언컨대 좋은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별별 이야기를 다 했지만, 아직까지 뭔가 어색함이 남아 있는 상황.
기왕 여기까지 부른 만큼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일과 대화할 거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확실히 어색하기는 하다.
아무 계획 없이 너무 막무가내로 부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밥 먹었으니까, 이제 그만 가’라고 내치기도 애매한 상황… 식사도 끝나고 대화도 끝났건만 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고 있었다.
미하일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왠지 모를 숨 막히는 어색함. 녀석도 이 어색함이 싫은 모양인지. 천천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괜찮으시다면 체스라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나랑 게임 한 사람은 꼭 그 끝이 별로 좋지 않던데….’
하지만 괜찮은 제안처럼 느껴지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