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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71화 (562/1,590)

# 571

회귀자 사용설명서 571화

미하일(3)

서로 어색함을 푸는 데에는 간단한 게임만 한 게 없지 않은가.

체스 친구였던 조혜진이 합동 훈련장으로 휘릭 떠나간 이후에는, 집무실에 있는 비싼 체스판이 좀처럼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적당히 시간을 때울 수도 있으니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겨졌다.

괜스레 대륙의 공적이 되어 떠나가신 그분이 아릿하게나마 떠오르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어디까지나 친목 다지기의 일환이었고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처럼 필사적일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후 적당한 테이블에 앉아 반대편에 조용히 몸을 앉힌 미하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김현성이 훈련소에 틀어박히고 난 이후에 선물로 보내온 체스판 위에는 드워프들이 직접 세공한 체스말들이 즐비해 있다.

일반적인 말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기는 했지만, 게임을 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

고풍스럽고 약간의 판타지성이 가미된 저 모습을 보라. 판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가.

“선물로 받은 겁니다.”

안 물어봤다는 얼굴. 민망한 마음에 재빠르게 입을 열자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부터 두겠습니다.”

“예.”

‘확실히 이게 좋기는 좋아.’

숨 막힐 것 같은 어색함이 조금은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원래 이 나이대 남자들은 같이 게임 하면서 친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척 신중한 듯한 녀석의 표정. 조혜진과의 특훈으로 조금은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해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세?’

녀석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전황이 뒤집히기 시작.

어떻게든 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공격 포인트를 쌓고 있는 것도 판을 이끌어 나가는 것도 저 쪽이다.

뭐라고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딱 정석으로 강하다.

딱 본인 같은 이미지의 경기를 펼친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뭔가 멋들어지게 한 수를 두고 싶기는 했지만, 기왕 시작한 게임이니 이기고 싶다.

결국에는 개싸움으로 끌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폰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판에 변화가 오기는 한다.

어떻게든 공격 포인트를 올리고 막아내야 흐름을 끊어낼 수 있을 테니까.

폰들을 앞으로 내몰아 주요 지점에 있는 말들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폰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먹든 먹지 않든 간에 먹이로 던져보기도 하고 유혹해 보기도 한다.

상대 쪽에서 아무 희생 없이 포인트를 따내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것이다.

“폰을 잘 쓰시는 군요.”

‘꽤 강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수준 차이가 보이기는 하네.’

그동안 저명한 인사들을 상대로 많이 싸워서 승점을 따내 자신감이 상승했었는데, 이 새끼들이 접대 게임을 해준 모양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 같지만 폰은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하는 일이 없이 단순히 앞을 지키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반보다는 경기 후반에 더 활약하는 말일 겁니다. 위원장님은 너무 쉽게 폰을 던지시는 것 같습니다.”

“음….”

확실히 미하일은 폰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는다.

어떻게든 밀집시켜 방벽을 만들어 경기를 고착시키고 있었고, 어떨 때는 주요 말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밀집된 폰들을 그대로 끌고 가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포인트로 따지면 내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조혜진과의 차이점은 여기서, 딱 이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으리라.

조혜진은 쉽게 흔들린다. 본인이 원하는 진영을 만들기는 했지만, 개싸움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당황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입을 열며 도발하기 시작하면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그렇게 방벽을 흔들고 왕의 목까지 내려치는 게 나와 그녀의 경기에 정형화된 패턴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고 방패를 들어 계속해서 경기를 지연시키고 자신의 흐름으로 끌고 온다.

무척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낸 말의 숫자는 비슷하지만, 저 쪽이 구성한 방패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후반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왼쪽에 있는 방패가 부담스러워 지기 시작.

천천히 진군하고 있는 군단을 어떻게 막을 방도가 없다.

최대한 비비려고 햇지만 비벼지지 않는 것이 문제.

가짜 체크메이트를 넣어도 폰들은 전진했고, 희생을 감수하며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폰 하나가 끝까지 닿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

경기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는 승급이었다.

“퀸으로 승급하겠습니다.”

“네.”

사실상 경기는 여기에서 끝.

“체크메이트입니다.”

“졌군요.”

아슬아슬한 패배처럼 보였지만, 경기 내용으로만 보면 졸전이다.

“잘 두시는군요, 미하일 님.”

“그렇지 않습니다.”

‘니가 잘 두는 게 아니면 뭔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항상 이렇게 운이 좋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매 경기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매 경기 양상이 다를 테고 애초에 폰이 승급하는 그림은 좀처럼 나오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미하일이 강하다는 것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이거 부끄럽습니다. 조금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영 님께서도 충분히 강하십니다. 실제로 게임의 흐름상 제가 밀리는 그림이 많이 나왔으니까요.”

“문제점이 뭐라고 느끼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사실 문제점이라고 보기에도 힘들 수 있겠습니다만… 네,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게 가장 올바른 표현인 것 같습니다. 위원장님께서는 좋은 거래에 집착하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거래요?”

“예, 말들의 우선 순위를 매겨놓고 경기에 임하시는 느낌이라고 하면….”

“아.”

“물론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거래를 한다는 건 곧 내가 남들보다 높은 위치에 서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반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폰은 기반이고 중심입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내던져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시는 것처럼 구심점 역할을 해내기도 합니다. 아마 2할 정도만 더 신경을 써주셔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쉽게 경기를 풀어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되는 말이로군요. 확실히… 네, 뭐가 문제인지 잘 알겠습니다. 결과적으로 경기를 끝낸 건 퀸이기는 했지만, 중반까지는… 네, 아쉽군요. 그럼… 어떻습니까? 한 번 더 하시는 게. 아, 시간이 너무 늦었나요?”

“아마 몇 번을 더 하면 그대로 날을 새버릴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위원장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알고 계신 대로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인지라….”

‘아, 이 새끼 이기고 튀네.’

‘내가 이길 때까지는 여기서 못나가!’라고 졸렬하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다음 날을 생각하면 여기서 판을 접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한 판, 한 판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녀석의 말대로 몇 번 더 하다 보면 그대로 날을 새버릴 것이다.

나도 업무가 밀린 상황이었고, 미하일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

‘그래, 접자.’

“그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한 번 더 초대하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 님.”

“예,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식솔분들께 꼭 안부 전해주시고…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는 아내분도 함께 초대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하.”

“네, 감사히… 응하겠습니다.”

“따로 배웅은 드리지 않을 테니 잘 들어가세요.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이런 건….”

“제 마음이니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

“별것 아닙니다. 그저 선물이에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만큼 즐거운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안녕히….”

“아, 그리고 그리폰 기수는 저희 쪽에서 준비해 놨으니 편안하게 가시면 됩니다. 편안하게 말입니다.”

“…네.”

너무 부담을 준 건지 살짝은 불안한 얼굴로 문을 나서는 미하일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몇 가지만 빼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체스가 재미있었지.’

사람 역시 내가 생각한 이미지 그대로였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있어 보였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괜스레 체스판을 만지작거렸을 때였다.

‘간만이네.’

조혜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곧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당연지사.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곧바로 시야에 비쳤다.

평소대로 머리를 묶어 내버려 둔 모습, 날카로운 인상에 깔끔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조금 피곤해 보이기도 했는데 갑작스레 전화를 건 연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또 김현성에게 전언이라고 온 걸까 하는 생각에 입을 열자 화면 안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락 좀 종종 합시다. 전달 사항 있을 때면 연락하지 말고요.”

-바빠서 그렇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현성 씨가 또….”

-아뇨, 길드 마스터는 관계없이 그냥 안부 차 전화드린 겁니다. 또… 병력 인솔 건으로 보고드릴 내용도 있고요. 사실 통화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음… 체스 두셨습니까?

“오랜만에 손님이 와서요.”

-처참하게 깨지셨군요.

“내가 졌다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야 부길드마스터 실력을 생각하면 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대충 어떤 흐름으로 패배했는지 대충 눈에 보입니다. 흔들려고 했는데 흔들리지 않았군요.

“혜진 씨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죠.”

-네?

“가장 마지막에 뒀던 체스가 기억 안 나시나 봅니다. 아무것도 못 하고 와르르 무너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248승 246패. 전적으로 따지면 단연코 제가….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그러십니까. 최근 전적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내리 세 판을 깨지고 그대로 침몰한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그 뒤로 하자고 했지만, 꽁지 빠지게 도망친 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수준이 너무 낮은 사람과 하려고 하니 구미가 당길 턱이 있나요. 조금 더 발전하고 오라는 의미에서 쳐 낸 거지 도망친 게 아닙니다. 초보자랑 두기 싫은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푸… 푸흐흣.”

-…….

“푸흐흐흐흣.”

-이… 이이이익….

“푸흐흐하핫. 우쭈쭈, 우리 혜진이 그동안 실력 많이 늘었나?”

-그, 그렇게 그만 웃어요. 한 대 치고 싶습니다.

“치려면 체스로 쳐야지 폭력을 쓰려고 하면 쓰나. 이러니까 실력이 안 느는 겁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실력이 늘 턱이 있나.

-다시 한번 둬요. 그래, 다시 한번 두자. 무슨 사람이 1년 전 일을….

“푸흐하헤하허핳헷.”

-이번 인솔 때 같이 갈 겁니다. 두고 봅시다.

“응, 초보자랑 안 둬요.”

-이, 씨… 새끼… 너 이 새끼 진짜 죽었어….

“뭐라고요?”

-두고 봐, 진짜… 두고 보자고 찍 소리도 못하게 밟아줄 테니까.

“네, 다음 초보자.”

-뚝

기왕이면 이 패배의 아픔을 조혜진을 통해 잊고 싶었건만, 자신의 멘탈을 위해 곧바로 전화를 끊은 모양.

하지만 이미 흥분한 상태니 손쉽게 요리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나저나 보고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마 그건 이지혜를 통해서 오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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