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2
회귀자 사용설명서 572화
미하일(4)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도대체 나를 이곳까지 부른 목적이 뭐지.’
안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악마 같은 자, 아니, 악마의 화신이라는 표현도 부족하지 않은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눈, 전부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그리고 의미심장한 대사들.
다시 한번 방금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보자 자연스럽게 몸이 떨려왔다.
결사단이라고 불리는 이들 덕분에 그자가 어떤 심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륙에 어떤 일들을 일으켜 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결사단과 만나기 전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들이 내게 접촉해 올 리 없었을 테니까.
현재 대륙에서 악마소환사라고 불리는 그자와 작은 인연을 맺었었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그들이 움직였을 리가 없다.
결사단이 목숨을 걸었던 만큼 나 역시 목숨을 걸었다.
이번 일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 생각했고, 그자에게 대항하면 곧 처참한 말로만이 기다릴 뿐이라는 사실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후우….”
모든 게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식솔분들께 꼭 안부 전해주시고…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는 아내분도 함께 초대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하.’
협박이었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연코 협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저는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만약 제가 당신의 능력을 의심했다면 그 중요한 자리에 당신을 앉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하일 님께 맡긴 거예요.’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는 표현도 너무나도 의미심장하다.
결사단은 파란 길드가 떨어진 이후에는 꼬리를 밟힌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 대륙에 그들의 영향력이 전부 뻗치고 있다는 걸 떠올려보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야, 아직 결사단의 존재가 드러났을 리가 없어.’
그들만큼 자신도 현재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런 종류의 정황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그런 말들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기영 위원장이 결사단과 그들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면 저 의미심장한 대사들은 온전히 자신을 향해 쏟아진 악의일지도 모른다.
현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경고였고, 지금의 상황을 빠르게 처리하라는 위협이었다.
기회를 한 번 더 준다는 것 아닐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아니, 애초에….
‘기회를 주기는 한 건가?’
그에게 대항하다 점차 사라져 간 이들을 생각하면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런 말로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돌려보낸 것 역시 기만이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한 작은 의식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될 이를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것이 분명하리라.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기영 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전부 알 수 있었으니까.
전 파란 길드의 중역들, 교국의 황제와 황녀, 악마숭배자라고 불리는 교국의 검사와 공화국의 군사, 라이오스에서 일어났던 악마소환 사태와 공화국의 언데드들, 27군단 소환 사태, 그 외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죽음.
양보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적에게는 절대로 자비를 내리지 않는다.
‘목숨을 잃는 게 두려운 게 아니야.’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절대로 죽는 것이 두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내 아내는?’
자신만 믿고 따라와 준 사랑스러운 아내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 따위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자신이 가려고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인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 넓지 않은 집무실에 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린 것도 벌써 수 시간째.
머리를 부여잡아 봤지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신념을 저버리는 것이 맞는 건지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결사단을 저버린다면….’
운이 좋으면 다시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 역시 옳은 선택일까. 대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행동하는 이들을 배신하는 것 행동을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단 말인가.
“신이시여… 신이시여….”
라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을 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것.
순간 암살자에 대한 가능성을 떠올려 서랍 속에 든 단검을 집어 들었지만, 시야에 비친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여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랑스러운 아내, 나탈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오래 계신 것 같아서….”
“…….”
“일에 방해가 될 거라는 건 알지만, 걱정이 돼서 찾아와 봤어요. 괜찮으신 건가요? 오늘 이기영 위원장님을 뵙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니야,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오늘 이야기한 문제를 처리하느라… 그래서… 걱정 많았지? 먼저 들어가 있어. 곧 들어갈게….”
“하지만… 요즘….”
“정말이야, 여보. 별일 아니니까.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얼굴이 아니세요. 최근에 너무 무리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정말로 말씀해 주시지 않을 건가요?”
“…….”
“정말로….”
“…….”
“후우,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당신.”
“아니야, 이건….”
“긴장도 풀 겸… 와인이나 한잔하는 게 어떠신가요? 예전처럼….”
“지금은 그럴 기분이….”
“마침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보내오신 선물 중에 특별한 와인이 있더라고요.”
“그건… 건드리지 마, 나탈리. 건드리지….”
“왠지 이러고 계실 것 같아서 제가 직접….”
“제길!”
툭.
쨍그랑!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제기랄! 혹시나 마신 건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신이시여. 신이시여. 제길, 거기에 놔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제길, 제길, 신이시여….”
“…….”
“빨리 뭐라고 대답 좀 해… 정말로 마시진 않은 거지?”
“역시….”
“뭐?”
“제가… 제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뭐… 지금….”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지 또 어째서 망설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항상 같이 있을 수는 없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까….”
“…….”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
“신념을 굽히지 않고 항상 올곧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당신을 사랑해요.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건지, 무엇이 당신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지 잘 알고 있어요. 그 이유가 제가 생각한 것과 같다면, 부디 돌아보지 마시고 나아가셨으면 해요.”
“…….”
“저는 짐이 되기 위해서 당신 곁에 있는 게 아니에요. 함께 걷기 위해서 곁에 있는 거랍니다. 다른 곳으로 저를 보내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신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제 안전을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함께 걸으셨으면 해요. 만약 제가 당신과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당신 역시 저를 도우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평생 함께 걷자고 약속했잖아요?”
“나탈….”
“이만 들어가 볼게요. 제가 한 말은 진심이에요, 여보. 고민하지 마시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향해 나아가세요. 그게 내가 아는 미하일이라는 사람이니까.”
철컥.
물끄러미 고개를 내려 바라본 바닥에는 잔이 깨진 흔적과 함께 와인이 맺히고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어봤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회할지 후회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그건 끝에 다다른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신념.”
그래, 신념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자.
* * *
“신념이 밥을 먹여줘? 아니면 뭐 돈을 벌어다 줘. 나는 그런 거에 매달리는 사람들 딱 질색이더라고. 짜증 나네, 진짜.”
괜스레 불평불만을 쏟아내자 이지혜가 툭 하고 말을 던져왔다.
사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다시금 불발이라는 소식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녀도 왠지 모르게 예상했다는 얼굴을 하는 걸 보니 결과는 큰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김현성도 그런 스타일 아닌가?”
“현성이 빼고. 그리고 걔는 은근슬쩍 타협할 줄도 알아, 타협장인이라고. 그래서… 누나 말은 결국 그 늙은 영감들이 고집부리고 있다 이거네? 하여튼 드워프 영감들 고집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니, 무슨 마법의 도움을 안 받는다고 난리야?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는데.”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계속 저희 뜻을 밀어붙이기도 조금 그래요. 애초에 마력석이라서… 드워프 영감님들의 주장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시간 안에는 맞출 수 있다고도 하니…….”
“아….”
“드워프 건설 역사상 마법으로 건물을 올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그럴 바에는 엘프들과 함께 작업해 달라고 하네요. 이건 저희 쪽에서 살짝 양보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속도만 맞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그리고 실제로 작업도 빠르고… 무엇보다 장인 정신을 가지고 임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더 이상 그쪽 영감님들 상대하기 지쳐요. 오빠가 한번 가봐요.”
“나는 드워프들하고는 안 맞아.”
“그쪽에서는 오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럼 할 수 없죠, 뭐.”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보자. 나중에 덕구라도 한번 보내봐야지.”
“아, 왠지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네요. 아무튼, 다음 보고 들으셔야죠, 이제 메인인데.”
‘그래, 이게 메인이지.’
“오빠는 조금 어땠어요?”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괜찮았다고 대답하고 싶다. 생각보다 크게 켕기는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부적인 문제는 본인이 해결한다고 호언장담했고, 선물도 받고 서로 하하 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잘 마무리 지었다.
‘체스도 뒀으니까.’
이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졌다고 하는 게 옳다. 나중에 한번 보자고 했으니 아마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내 의견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좀 어땠어?”
“글쎄요?”
“응?”
“딱히 뭔가가 발견되지는 않았어요.”
“왠지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근데 한 번 더 찾아보려고요.”
“……?”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니까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조금 답답해서요. 정확하게 콕 찝어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쪽 현장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예요. 실제로… 파업까지는 아니지만, 태업이 진행 중이기도 했고….”
“응.”
“노동자 대우 자체가 다른 지역이랑 차이가 있더라고요.”
“…….”
“한 가지만 확실하게 말할게요. 미하일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기는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해요.”
“…….”
‘사랑했다, 미하일. 시바….’
잠깐이나마 우정을 나눴던 체스판이 괜스레 눈에 밟혀왔다.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따뜻하고 깊이 있던 대화들도.
‘이 개새끼.’
“뒤져보면 분명히 구린 구석이 나올 거예요. 아니, 저희보다 그쪽 내부에서 먼저 터져 나올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