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7
회귀자 사용설명서 577화
악마 계약자(1)
‘계약한 게 맞아.’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답변을 바라고 던진 대사가 아니었지만, 곧바로 대답해 오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력의 방어막을 붙잡으며 이를 가는 녀석의 얼굴이 괜스레 더 무섭게 다가온다.
“그래, 네놈을 죽이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넘겼지.”
“…….”
“우리의 목숨. 그리고 영혼과 자존심까지 모두 다 팔아넘겼다. 네놈 하나는 죽이기 위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분노에 찬 숨소리도.
“왜 아직도 빛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지금 당신들의 행동이 진청 군사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건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의 명예를 되찾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군사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야. 그 더러운 입으로 군사님의 이름을 부르지 마….”
“진청 군사는 악마소환사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프라이드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군사님의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담지 마!!”
“제가 누구 이름을 부르던 그게 무슨 상관이랍니까.”
“이 쓰레기 같은 독재자 놈이!”
‘안 그래도 이후에 뒤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판을 깔아주니 너무나도 감사할 지경이네.’
“죽어어어!”
친위대 몇이 입을 여는 녀석의 온몸에 칼을 쑤셔 넣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보호막을 두드리는 모습, 어느 악마랑 어떤 계약을 한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메이저 군단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당연히 벨리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27군단에게서 느껴졌던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죽음까지 초월한 상태의 힘을 내려주는 걸 보면 아마….
‘더 상위는 아니겠지?’
어떤 악마와 어떻게 계약했는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얘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하다.
아무것도 없이 들이박아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이쪽과 자신들의 전력 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무언가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저기까지 닿은 것 같았다.
그 선택이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순간적으로 커다란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저것보다 나은 게 없었으니까.
어차피 청사 건물 내에서 이기영의 죽음을 도모하자는 계획이었을 게 분명하다.
굳이 밖에 있는 대륙인들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알게 되든, 아니든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계획이 성공으로 끝나든 실패로 끝나든 간에 이 자식들이 죽는 건 확정된 이야기였으니까.
이후 본인들의 평판이 어떻게 될 거라는 건 신경 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목숨과 영혼까지 걸었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다.
계약에는 대가가 따른다. 심지어 소환에도 마찬가지다.
나야 조금 특수한 경우라고는 하지만 다른 이들까지 그런 종류의 특혜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애초 정하얀의 마력이 아니면 메이저 군단급의 소환이 불가능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소환 의식에서도 뭔가를 희생했을 것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실적 하나는 확실히 채워서 갔겠네.’
대가로 건 것은 영혼과 목숨, 얻은 것은 일반적으로 죽지 않는 신체와 상위 모험가를 상회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힘.
‘결사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전부 다 계약한 건 아니고….’
아마 간부급에 해당하는 놈들과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녀석들만이 저런 종류의 힘을 받았을 것이다.
‘이거 머리 아파지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은근슬쩍 불안감이 치솟기 시작한다.
강아지 새끼들인 줄 알았던 녀석들이 알고 보니 늑대, 아니, 어쩌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
지금 가진 전력만으로 이곳을 안전하게 나갈 수 있을지, 나조차도 확신이 서지 않은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박리안과 친위대가 유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로서도 본인들 능력 이상의 일은 해줄 수가 없다.
언제나 무표정이었던 쌍검의 박리안 역시 조금은 불안한 얼굴, 혹시라도 본인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초조함이 그녀의 얼굴에 깃든다.
계속해서 맞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계속해서 친위대와 나를 이끌고 이동하고는 있었지만, 상처가 쌓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한참 동안 유지될 것 같았던 보호막 역시 자살 폭탄 테러에 그 수명이 다하고 있었고, 우리가 몸을 피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몰이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느끼고 있기는 합니다만… 딱히 방도가 없어 보이는군요.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저… 부길드마스터.”
“네?”
“이렇게 된 이상 부길드마스터만이라도….”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이곳에서 덫에 걸려 죽는 상황이 아니니까요. 최소한 여기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위험한 보험이기는 하지만, 보험이 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마세요. 말씀드렸던 대로 최대한 이동하는 시간을 늦춰봅시다. 상처나 체력은 조금 괜찮습니까?”
“그렇게 좋은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솔직해서 좋네요.”
곧바로 빛 폭탄 물약을 손 위에 띄우자 화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폭음이 걷히는 것은 물론, 앞을 가로막았던 언데드들이 곧바로 빛이 되어 사라진다.
‘눈 부시다, 눈이 부셔.’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범위가 넓은 만큼 통로를 따라 끊임없이 뻗어가는 거대한 빛.
잠깐 제동이 걸렸던 친위대들의 상처와 체력이 일순간에 모두 회복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등급이 아깝지 않은 임팩트가 있지 않은가.
악마 계약자 놈들까지 싸그리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해봤지만,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기운이 녀석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저항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영향이 없다.
‘상위 악마가 맞나 보네.’
온건파가 나를 적대할 리 없을 테니, 아마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놈이 분명하리라.
잠깐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조금 움츠리게 될 거라는 계산 역시 미스, 빛 폭탄 물약에 사용 제한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애새끼들의 눈빛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을 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물약을 뺏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무 빠르게 쓴 건가.’
하지만 아끼다 똥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거 안 좋은데.’
이 새끼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 그대로 판이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
간부급에 해당되는 악마 계약자 놈들은 확실히 빛 폭탄을 경계하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 역시 빛 폭탄 물약을 전부 빼낸 이후에 들어오기 위함일지도 모르고….
아니, 어떻게 생각해도 목적이 그거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녀석들이 마지막 무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물약을 전부 빼놓겠다, 이거네.”
“방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외부에 연락은 되고 있습니까?”
“아니요, 닿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공화국과의 전투에서 악마소환사가 사용했던 방해 전파가 있는 모양이군요.”
“네, 정확히 전파가 퍼져나오는 위치를 찾으려고 하고 있지만….”
‘지금 와서 동선을 바꾸는 건 말도 안 되지. 아, 이거 짜증 나는데….’
“…….”
“계속 밀어! 최대한 체력을 소진 시켜라! 최대한!”
“지원 부대! 지원 부대!”
“전방 막아… 전, 아아아아악!”
“이 더러운 놈! 쓰레기 같은 놈! 대륙의 암!”
“절대로 물러서지 마라. 겁먹지 마라! 군사님을 생각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군사님을 생각해라.”
“결사단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지만 결코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저 독재자와 함께 눈을 감을 것이다. 움직여라!”
“악마랑 계약한 반역자 놈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요. 누가 정의고 누가 악인지, 어느 쪽이 빛이고 어느 쪽이 어둠인지… 분간조차 못 하고 있군요. 자각하셔야 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어요, 악마 계약자 여러분들.”
‘반응이 별로 없네.’
수뇌부들은 조금 더 냉정해졌다.
‘안 좋은데….’
다시 한번 꽉 막혀 버린 상황,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다시 한번 빛 폭탄 물약을 사용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까 괜히 썼나. 하….’
화아아아아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뻗어 나가는 빛.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지만 다시 한번 빈자리를 메우는 인간과 상급 언데드들이 보인다.
계속해서 몰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저항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아직 둠기화라는 패와 빛 폭탄 물약이 한 발 더 남아 있었지만, 수적 열세에다가 분위기를 타고 있는 적 병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밀어붙여라! 조금만 더!”
정신없이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이 개자식들이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단 이 청사의 구조가 익숙하지 않다는 게 첫 번째 패착.
물량을 견딜 수 없다는 게 두 번째 패착.
몰이당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범의 아가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녀석들이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시점.
‘시바….’
누가 봐도 악마랑 계약한 모습인 악마 계약자 놈들이 커다란 동공에서 나를 둘러싸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중2병이라도 걸렸는지 커다란 망토를 입고 있는 모습은 가관, 이 사달을 만든 개자식들이 전부 이 자리에 있다.
‘미하일, 나탈리만 빼고.’
“드디어….”
친위대는 점점 더 내게 가까이 붙기 시작했지만, 딱히 방도를 찾을 수가 없는 모양인지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 묘한 대치를 끝내는 것은 저쪽.
곧바로 공격해 올 거라고 예상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지 입을 열어왔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더러운 사기꾼 자식.”
“방금까지 터져 나왔던 빛을 보지 못했나 봅니다. 사기꾼 자식이라는 말은 조금 가슴 아픈데… 저는 신에게 선택받은 신의 사자입니다. 눈으로 직접 거대한 빛을 마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기꾼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당신들이지, 제가 아니에요.”
“네가 어째서 빛의 힘을 사용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곳에 있는 전부가 네가 쓰레기 같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악마랑 계약까지 하셨나 봅니다.”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그에게 힘을 빌린 건 너를 죽이기 위해서지, 다른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범죄자와 악인도 원래 그럴듯한 사연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아무리 눈물 빼는 사연이 있어도 범죄자는 결국 범죄자라는 거. 당신들이 믿고 따르는 진청 군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유야 어찌 됐건 그는 전범이고, 본인이 저지른 정당한 죗값을 치른 겁니다.”
“더러운 사기꾼 자식! 네놈이 정말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보이는 게 너무나도 명확하지 않습니까. 빛과 어둠, 정의와 악. 1㎞ 떨어진 곳에서 봐도 당신들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여요. 눈은 붉어져 있고, 신체는 뒤틀려서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데, 누가 당신네들을 대륙을 위해 결사한 단원들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회개하세요. 어차피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저는 죽지 않을 테니까.”
“웃기지 마라! 네놈의 그 검은 속을 모를 것 같으냐. 진짜 악마는 네놈이다. 그 사이하고 더러운 입으로 민중들을 속이고 기만한 네놈의 그 혓바닥이야말로 진짜 악마야. 빛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네 그 더러운 계획을 우리가 정녕 모를 줄 알았더냐. 다른 대륙인들은 모를 수 있어도, 우리는… 우리만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 이 대륙은 네놈의 무대가 아니야. 이 대륙에 살아가는 이들 역시 네놈의 장기말이 아니란 말이다.”
“뭘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륙을 지배하려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지키기 위해 있는 거라는 걸 왜 몰라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 쓰레기 같은 자식. 그 더러운 혓바닥을 더 이상 놀리지 못하게 뽑아버리겠다.”
“대륙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악마와 계약한 사특한 무리들이 날뛰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아… 위대한 베니고어시여. 부디 제 선택을 용서해 주시길.”
‘선택의 여지가 없겠는네….’
천천히 전방을 바라보자 이쪽을 둘러싼 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다는 듯이 옳은 건 자신들이라는 듯이 느끼고 있는 모습들도 눈에 띈다.
“부길드마스터… 그건….”
“알고 있습니다. 세 시간.”
[준신화 등급의 특성 직업 전환이 발동됩니다.]
[빛의 연금술사를 서브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어둠의 역병군주를 메인 클래스로 전환합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뼈의 무덤”
주문을 외우자 거대한 뼈의 가시가 사방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