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0
회귀자 사용설명서 580화
악마 계약자(4)
“쿨럭”
“위원장님.”
“부길드마스터, 괜찮으신 겁니까?”
“네, 괜… 괜찮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주변을 살펴보자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위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래에 있는 군중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
어째서 갑작스레 청사에서 폭음이 들려왔는지, 커다란 망토로 몸을 휘감고 있는 결사대는 도대체 무엇인지, 어째서 이기영 위원장의 모습이 저렇게 변해 있는지, 스스로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청사의 밖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수많은 노동자가 아까까지만 해도 내게 환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당장 둠기화를 풀면 모든 게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굳이 급하게 일을 진행시킬 필요는 없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후에 뒷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만큼, 조금 다른 노선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대륙인들이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솔직히 이기영이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까지 대륙인들의 가슴 속에 박혀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건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건가.’
그만큼 청사 내에서 벌어지는 소음과 마력을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이야기가 되니, 미하일 자식이 일 하나는 제대로 처리한 셈이다.
심지어 그 사달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저 청사의 반쪽은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최소 전설 등급,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13인의 자살 특공대가 만든 거대한 폭발이었다.
일반적인 소재로 지어진 건물이었다면 부지 자체를 날리고도 남았으리라.
‘기뻐해야 되는 건지, 짜증 내야 하는 건지.’
재빨리 시선을 돌려보니 혁명 삼 남매는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 있다.
황급하게 뒤쪽으로 빠지는 걸 보니 본인들의 정체를 드러낸 이후에 합류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끝났네.’
현재의 전력으로도 녀석들과 어떻게든 비볐다는 걸 떠올려 보면 상황은 이미 정리된 거나 다름없다.
파란의 1군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합류한 이후에는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니, 그 이전에 녀석들은….
‘완전히 망해 버렸네.’
최대한 조용하게 일을 도모하고 싶었겠지만, 이미 대륙의 모든 사람이 현재 상황을 보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녀석들은 일의 실패를 가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싸워 대륙의 빛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보인 것만 봐도 그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싸움에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을 싸움에서, 쌍팔년도 영웅물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을 떠안고 가라앉아야 할 싸움이… 결국에는 모두가 바라보는 희극이 되어버렸다.
일이 점차 불리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 몇몇 이들은 벌써부터 똥 씹을 표정을 한 지 오래.
군사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 말은 했지만, 저들이 진청을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외침은 그저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발악이네요, 발악이에요.’
절벽 끝에 서 있는 일행들이 제발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제발 우리의 싸움에 정당성이 있음을 알아달라는 절규.
대의가 우리에게 있음을, 우리는 당신네들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바라봐 달라는 외침.
저렇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면 감성까지 악마에게 팔아넘기지 않은 모양이다.
이미 모든 걸 버릴 준비를 했다고 다짐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는 저들이 자신들의 편이 되어주길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다 가지려고 그래. 하나를 선택했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법인데, 안 그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선택받은 소수뿐이라는 걸 왜 모를까.
“악마에게 쓰인 독재자 이기영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만들어진 배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자의 진짜 목적은 대륙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며… 겨우 그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알려지지 않는 수많은 피를 만들었습니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지껄여 보세요.’
“라이오스의 악몽이라고 불리는 마법과 악마소환에 관련된 자 역시 공화국의 인물이 아닌 이기영 위원장입니다. 당시에 있었던 모든 현장을 은폐한 것도 이기영이며, 그 죄를 공화국의 진청에게 뒤집어씌운 것 또한 이기영입니다.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언데드를 이용해 아군 적군을 가리며 공격하지 않은 악마 또한 그자이며 손바닥만 한 물건으로 대륙 전체를 통제하고자 하는 이도 그자입니다.”
‘더 지껄여 봐.’
“눈을 뜨십시오. 같이 검을 들자고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날조로 만들어진 저 더러운 협잡꾼의 모습을 한 분이라도 너 많은 사람이 자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자는 악마입니다. 진짜 악마는 바로 이기영입니다. 저자야말로 여신이 말하는 대륙의 적이며 대륙의 위협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백번 외쳐봐라. 그게 먹히나.’
애초에 노선을 잘못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로만 백번 떠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설명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텐데 뭐….
할 말은 많았지만, 밸런스가 붕괴되는 것 같아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신 한 가지 노선으로 밀고 나가도록 하자.
“도망… 쿨럭… 도망치세요! 모두 이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어?”
“위험… 위험합니다. 콜록… 위험… 합니다.”
“뭐… 무슨 개짓거리를!”
“악마와 계약한…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무리입니다. 지금 당장 도망치세요. 어서 이 자리를 피해서… 멀리 달아나세요… 현재 5구역에 있는 모든 인원은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빠져나가세요!”
“너… 너!”
“쿨럭! 쿨럭!”
“부길드… 부길드마스터. 괜찮으신 겁니까!”
“위원장님! 위원장님!”
“지금 당장 모습을 바꾸세요. 부길드마스터. 더 이상은 위험할 겁니다.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
“더 이상은 괜찮습니다, 위원장님…. 저희는 괜찮으니 제발 그 저주받은 힘을 거둬주세요.”
“부길드마스터…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아니요. 최소한 저분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은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 조혜진마저 불안한 표정으로 만들 정도의 명연기.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한다는 어딘가의 격언은 언제나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 더욱더 명장면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지금 당장 위원장님을 보호해! 지금 당장!”
때마침 이지혜의 앙칼진 목소리 마저 들려온다.
상황판단을 못 하고 있었던 경비병들 역시 모조리 창을 들고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위원장님! 위원장님!”
“제기랄… 빌어먹을 악마 놈들… 기다리십시오, 위원장님. 제가 곧 달려가겠습니다.”
“올라오지 마! 올라오지 말고 등을 돌려 현장을 피하세요. 위험합니다. 저들은… 콜록… 이미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일반인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이기영, 이 더러운 사기꾼놈이! 그런 모습을 하고 그따위 말을 내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자격이 있지, 왜 없어요.’
“베니고어 여신님께… 용서를 구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몸보다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 한 분, 한 분이 더 소중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같이… 영혼을 팔아넘긴 이들은 절대로 이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대륙의 악마는 우리가 아니라 저놈이다. 이기영이야말로… 그야말로 진짜 위협이란 말이다!”
목이 터지라 외치고 있지만, 이미 대세가 된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저주받은 악마의 힘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끝까지 시민 집단들과 우리를 분리시키려는 빛은 그 어떤 색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다.
가빠지는 호흡을 계속해서 몰아쉬며, 주기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도 이마를 탁 칠 정도로 숭고한 모습.
메소드 연기에 들어갔기 때문인지 눈에서는 자꾸만 왈칵 눈물이 튀어나온다.
‘지켜야 해.’
지켜야 한다.
‘대륙을 저 악마 계약자들의 손에서 지켜내야 돼.’
속으로는 이미 나름대로 결심을 한 지 오래였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허억, 허억.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저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무리수가 아닐까 생각했었던 대사. 하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와 눈빛은 다르다.
단순히 말로만 지껄일 때보다 가끔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더 임팩트가 있지 않은가.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상처가 난 것만 같은 외관, 그 무엇보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한계를 맞이한 것 같다는 표정,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놀림.
오죽했으면 적 진영에서도 저런 목소리가 튀어나올까.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가브엔. 군중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다.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리는 오늘 우리가 할 일을 완수해야만 해. 그게 군사님이, 그리고 우리를 위해 희생된 동지들이 원하는 바일 거다.”
“하지만… 하지만… 단장!”
“여기서 우리는 악인이다. 누군가가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모두 다시 전투 준비한다. 이기영이 지쳐 있다. 당장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로 보이니까….”
‘저는 전혀 지치지 않았습니다, 단장님.’
“잘 들어라. 내 형제, 자매, 동지들이여. 적의 말에 동요하지 마라! 군중들의 반응에 동요하지 마라! 우리가 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바가 아닌가. 우리가 역사에 악인으로 기억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지금 당장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서 무너질 정도로 우리의 의지는 약하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단장….”
“개인적인 복수심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 신의 탈을 쓴 악마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의 희생과 결사를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검을 들어 올릴 이유는 충분하다. 대륙을 위해서 싸우자. 결사단 동지들아! 오랫동안 숨겨왔던 우리의 숙원을,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화를, 우리가 믿는 정의를 후회 없이 쏟아내자.”
“네, 단장.”
“네… 단장님.”
“한 명 정도는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단장.”
“처음에 제의해 왔을 때는 단장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지만, 솔직히 지금은 여기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단장.”
“어차피 아무 데도 갈 데가 없는 범죄자였던 게 바로 나요. 한번 정의를 위해 싸워보자는 말에 속아 얼떨결에 결사단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악인으로 기억될 팔자인가 봅니다.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함께했던 결사단 동지들을… 절대로…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그럼 한번 악인이 되어 봅시다, 단장. 우리한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결국에는 여기가 내 무덤이네요. 남자 잘못 만나서 이게 무슨 꼴이람.”
“단장… 저희는 언제나 단장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될 겁니다, 단장. 분명히….”
‘너네가 어떻게 천국을 가냐,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아.’
“모두… 모두… 고맙다.”
‘아… 얘네 진짜 감성팔이 너무 심한데….’
순간적으로 나도 속을 뻔하지 않았던가.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정의의 용사들처럼 기를 모으고 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보기 거북하다.
정의가 정말로 자신들에게 있을 거라고 믿는 것 역시 꼴 보기 싫다.
하지만 점점 본색을 드러내는 악마 계약자 무리의 모습에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충분.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비명과 함께 군중들의 뜨거운 응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원장님을 지켜! 대륙의 희망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 돼!”
“대륙의 빛을 지켜라!”
“위원장님! 이겨내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원기옥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모두의 힘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을까.
이미 한계에 다다른 비틀거리는 몸. 하지만 군중들의 응원은 나를 자리에서 기어코 일어나게 만든다.
대륙의 빛은 어떤 상황에서도 꺼지는 법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