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1
회귀자 사용설명서 581화
숭고한 희생(1)
‘너만은 살아남아라. 라파엘.’
단장….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절대로 너를 탓하는 것도 아니다, 라파엘. 엄밀히 말하면 너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개인적인 생각 때문이다. 나는… 나는 무서워. 나는 무섭다, 라파엘.’
단장님.
‘우리의 진짜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어질까… 그게 무섭다. 그저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계약자들이라고 생각할까… 그게 무섭다. 단 한 사람, 단 한 명도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까… 그게 너무 두려워. 그렇기에 네가 살았으면 한다. 너라도 살아남아 우리의 마지막을 지켜봐 줬으면 해. 힘든 일이겠지만, 네가 그 역할을 맡아줬으면 한다.’
그렇지 않아요, 단장님. 그런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모두는 아니겠지만, 분명 어딘가 에서는 분명히 저희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이 일을 기억하고 기리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결사단원들의 숭고한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분명 나타날 거예요.
‘아니, 우리는 악으로 기억될 거다. 일이 성공, 실패 여부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를 악으로 치부하며 저주할 거야.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일이야. 하지만 라파엘,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를 기억해 준다면… 그래, 이 의미 없는 위안이 분명 결사단원들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네가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끝까지 눈에 담고, 가슴 속에 담아 우리 이야기를 전해줬으면 좋겠어. 시작은 단순히 복수심으로 벌인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는 걸, 대륙의 정의를 위해서 싸운 이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기록해 줬으면 좋겠구나. 부탁한다.’
저도 같이 싸울 거예요, 단장님. 많은 동지의 죽음을… 단장님의 죽음을… 그저 지켜만 볼 수는 없어요.
‘마지막 부탁이다. 내 마지막 부탁이야.’
“…….”
“단장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조용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 숭고한 이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출발점은 서로 다르고 시작도 좋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옳은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저 결사단의 모습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어떠한 표현도 저들의 모습을 대변할 수 없으리라. 그 어떤 미사여구도 저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지 못하리라.
무기력하게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저주스러울 지경. 손은 떨려오고 식은땀이 흘러나온다.
감정이 흔들려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저도 모르게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폭발이 터질 때마다 절로 고개를 돌리고 싶다. 끝까지 저 격전을 바라볼 자신이 없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모두의 마지막을 바라보자. 그게 결사단원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였으니까.
“물러서지 마! 물러서지 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을 뻗는다면 분명히 닿을 수 있다. 지난날을 생각해라. 몸을 움직여!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지 생각하자.”
‘나도 저곳에 있었어야 했어요….’
다혈질의 성격이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건 전사 가브엔.
뒤늦게 합류했지만 결사단의 마법사로서 항상 중심이 되어 주었던 루시엘라.
빵을 훔쳐 범죄자로 낙인이 찍히기는 했지만, 사실은 힘든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공화국의 장발잔.
묵묵히 뒤에서 우리들을 서포트했었던 사제 시르비올라.
모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저들의 육체는 이미 옛날 옛적에 붕괴하기 시작했다. 몸으로 낼 수 있는 출력 따위는 한참 전에 넘어섰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모두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괴로울 것이다.
다리를 움직이는 게, 검을 휘두르는 게, 수인을 맺는 게, 심지어 커다란 목소리를 외치는 것까지 고통스러울 것이다.
대충 보기에도 눈에 보인다.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지옥불 같이 타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게 시야에 비친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악마와 계약한 이들이라며 욕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절대 악에 대항하려는 저들의 모습을 감히 누가 더럽다고 꾸짖을 수 있을까.
아마 그 누구도 저들의 숭고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분명히 알아줄 것이다.
저 격전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모두가 종국에는 결사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런 쳐죽일 놈들!”
“저 더러운 악마 계약자들 때문에 위원장님께서… 이기영 위원장님께서… 흐윽….”
“위원장님, 힘내세요. 제발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라!”
“기도하겠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이 시련을 벗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기도드립시다. 보잘것없는 저희를 위해 저항하고 계시는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기도드립시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적의가 느껴진 탓이다.
“저런 쳐죽일 악마 계약자 놈들! 대륙은 네놈들의 것이 아니다! 절대로 빛은 지지 않는다, 절대로!”
‘그게 아니야. 당신들이 응원해야 할 사람은 저 사기꾼이 아니야….’
“스스로 영혼을 팔아넘긴 저 역겨운 모습을 보게나.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야. 저런 연놈들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말세야, 말세. 아직도 악마 놈들이 이렇게 판을 치고 있으니 우리 위원장님께서 이 공사에 공을 들이는 것도 당연해. 이 모든 게 위원장님의 혜안이 아닌가. 저 더러운 악마 놈들이 우리가 만든 청사 일부를 무너뜨렸어!”
‘대륙을 위하는 것은 그가 아니야. 진정으로 대륙을 위하는 건… 우리… 우리 결사단이야.’
“힘내라, 조혜진! 머리통을 부숴 버려!”
“기도드립니다. 기도할게요. 꼭 명예추기경님을 지켜주세요, 조혜진 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싸울 수 있는 분은 직접 무기를 듭시다. 더 이상 위원장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네,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어요. 언제까지 위원장님의 뒤에서만 숨어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도… 미약한 힘이라도 보탠다면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자리에서 증명합시다, 여러분.”
‘당신들의 검이 향해야 하는 곳은 결사단원들이 아니야. 저 쳐죽일 사기꾼 자식이라고.’
“옳습니다. 미약한 힘이지만 우리도 싸울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꼭 대륙과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싸우겠습니다. 나아갑시다. 바라보지 말고 행동합시다.”
‘그게 아니야. 그게… 그게 아니라고.’
“저희가 가겠습니다, 위원장님!”
“올라가는 게 오히려 방해야. 지금 저 모습을 보게….”
“…….”
“혹여나 우리가 다칠까…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먼 곳에서 지켜보며 기도를 드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어설픈 힘이라도 보태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기회가 될 걸세. 어째서… 어째서 명예추기경님이 저 타락한 힘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단장님은 악마 계약자가 아니야.’
“저,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기도드리게나. 언제가 그렇듯 여신님께서는 명예추기경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기도드리세.”
울컥울컥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발과 손을 쉬지 않고 있는 단원동지들이 시야에 비친다.
이질적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 풍경과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풍경이 무척이나 이질적이다.
무엇이 정말로 정의인지 자신조차 헷갈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결사단원들을 빌어먹을 악마 놈들이라고, 저주받을 자식들이라고 매도하며 악의에 찬 욕설을 내뱉는 이들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장님과 결사단원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다.
명예추기경이 가지고 있는 비밀과 진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이들이다.
‘당신들이 뭘 알아.’
정말로 이런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나. 이런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자들을 위해서….
“어째서 싸워온 거야….”
한 명, 한 명 쓰러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어째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 그 많은 노고를 겪어온 거냐고….”
“잘한다!”
“믿고 있었습니다!”
“저 더러운 악마 계약자들을 전부 쓸어버리라니까!”
“조심하세요!”
지금 단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목소리들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힘내요, 단장.’
목소리가 닿을까. 닿을 수 있을까.
‘그런 더러운 사기꾼한테 지지 마세요. 절대로 지지 마요.’
“힘… 힘내요.”
‘쓰러지지 마세요.’
“힘내세요! 쓰러지지 마! 힘내세요!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군중 사이에 서서 커다란 목소리를 보내봤지만,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쳐죽일 놈들이 다시 일어선다. 비열한 악마 계약자 놈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어.”
“더러운 놈들… 어떻게 심장이 뚫려 있는데도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진짜 괴물들이구만….”
“검붉은 타액을 뱉어내는 꼬라지를 보게나. 혹여나 명예추기경님이 저 기운에 노출될까 두렵네.”
“저… 저 악마 놈들이 다시 일어서는 걸 보세요. 쓰려졌던 놈들도 전부 다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닿았을까. 정말로 목소리가 닿은 건가. 단원들을 다시 움직이고 있는 게 자신의 목소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아마 착각일 것이다. 수많은 군중 사이에 섞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단원들이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목이 터지라 외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닿을 거라고 믿고 지지를 보내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기적을….’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저 불쌍한 이들에게 기적을.
상처받고 버림받고 세상에 버림받은 저들에게 단 한 톨의 작은 기적을.
‘닿을 수 있기를.’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닿을 수 있기를.’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닿을 수 있기를!’
대륙의 절대 악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힘내… 힘내세요.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세요. 끄윽… 힘… 힘내세요. 끄윽… 힘내세요!”
“잘한다! 조혜진! 잘한다!”
“허어어엉… 힘내세요. 힘… 내세요.”
“기도드립시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위원장님을 위해 다 같이 목소리를 보냅시다.”
“허어어어어엉… 일어서세요. 끄윽…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들에게 작은 기적을….”
“위원장님께서 다시 일어서십니다. 조금만 더 응원합시다!”
“힘내세요!!!!!”
그 직후.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군중 속에 섞인 자신을 발견한 단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물에 가려진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미소를 보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응원을 보내줘 고맙다고 네 목소리를 틀림없이 들었다고 그러니 이제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 확실하게 눈에 보인다.
‘닿았어.’
“감사합니다.”
‘닿은 거야.’
“흐으윽… 감사합니다….”
다시금 몸을 일으켜 똑바로 검을 붙잡는 단장의 모습이, 서로 손을 붙잡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전해주는 단원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기세요, 꼭… 이기세요.”
이 길었던 여정의 마지막이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끝까지 지켜보자. 고개를 돌리지 말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자.
“꼭… 이기셔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