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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82화 (573/1,590)

# 582

회귀자 사용설명서 582화

숭고한 희생(2)

정확한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왠지 악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새끼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자신들이 정의라고 믿고 있는 놈들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꺼림칙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지금 저들이 보여주는 모습 자체가 클리셰의 왕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외면받았지만 본인들이 정의라고 믿는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끈끈한 동료애와 더불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박수를 쳐줄 만하다.

종국에는 본인들의 정의를 관철시키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짓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나는 클리셰의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   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몸을 뒤로 뺄 준비도 되어 있고… 무엇보다….

‘질 리가 없지.’

대륙의 빛이 꺼질 리가 없다.

‘나도 노력 좀 해야겠네. 저게 메소드 연기지. 나도 아직 멀었다니까.’

정말로 본인들이 정의라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우스운 모습이다.

누가 봐도 더럽고 혐오스러운 악마의 모습을 한 이들이 저런 뜨거운 눈빛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저런 모습으로 자신들을 알아달라고 외친다고 한들 대중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은발을 휘날리는 둠기영의 모습과는 다분히 비주얼적 차이가 존재한다.

입에서 흉물스러운 타액을 흘리고, 붉은 안광을 뿌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정의의 용사라기보다는 악마의 후예.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하나둘 처절하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이 밸런스를 이어나간다.

“힘내… 힘내세요. 힘내세요!”

“힘내라! 이기영 명예추기경!”

“힘내세요. 끄윽… 힘… 힘내세요. 끄윽… 힘내세요!”

“잘한다! 조혜진! 잘한다!”

“허어어엉… 힘내세요. 힘…내세요.”

“기도드립시다. 명예추기경님을 위해, 위원장님을 위해 다 같이 목소리를 보냅시다.”

“허어어어어엉… 일어서세요. 끄윽… 신이시여… 제발… 제발 그들에게 작은 한 톨의 기적을….”

“위원장님께서 다시 일어서십니다. 조금만 더 응원합시다!”

“힘내세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응원 소리에 기분이 무척 좋아진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뭔가 분위기가 뒤바뀐 적 진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들 들었나.”

“네, 단장.”

“힘내자.”

“네.”

“분명히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오직 이날만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기도록 하자.”

“하하, 단장… 저는 이미 틀린 것 같습니다. 단장님, 부디… 천천히 올라오시길.”

“그동안 고마웠다, 시르비올라.”

“미약한 힘이지만, 단장이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짊어지마.”

“제 힘도 받아주세요.”

“짊어지마.”

“단장… 제 삶은… 의미가 있었던 걸까요.”

“당연히.”

“감사… 합니다.”

한 놈, 한 놈 쓰러질 때마다 딜레이가 제법 길다.

게다가 각성 비스무리한 것도 하는 것 같은 느낌. 점차 마력이 증폭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마음의 눈으로 확인해 보기에도 결사단의 단장은 제법 물이 올라왔다.

육신은 이미 한계를 맞은 것 같았지만, 기운 자체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

아마 본인이 가장 잘 느끼고 있지 않을까.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임무에 성공할 수 있다고,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모두가 동료들 덕분이고 모두 자신들을 응원한 이들 덕분이라고.

믿음과 신뢰, 동료애와 정의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라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분명히 저런 종류의 각성 케이스는 존재한다. 박덕구 같은 경우도 있었으니까.

깨달음 같은 내적 성장에 의한 스텟 상승도 있었고, 심지어 위기 상황이라고 느껴지면 폭발적으로 스텟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각성에 대한 체계적 논문이 매 분기 튀어나오고 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하지만 저 악마 계약자들이 경우는 전혀 다른 경우.

저런 놈들이 동료애 몇 번 보여줬다고 각성하는 것처럼 각성이 쉬웠다면, 원정길에 올라갔다 죽는 녀석들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관련 논문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각성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

나 역시 이전부터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논문 작성자를 파란으로 스카웃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신적인 성장이 기반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각성에 의해 갑작스럽게 성장해야 할 육체에 알맞은 정신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다.

당연히 놈들에게 그런 정신력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놈들에게 정신적인 성장을 비롯한 정상적인 성장 따위는 없다.

이미 악마와 계약해 옛날 옛적에 자신들의 한계를 넘어버린 이들, 놈들이 보통의 방법으로 성장한다고 가정해도 지금과 같은 힘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성장한다고? 개 같은 소리지. 개 같은 소리야.’

“부길드마스터… 저건….”

‘혜진아, 동요하면 안 된다.’

“콜록, 아마도… 악마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네?”

“악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실적으로 사용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이너스 감정이 곧 그들의 힘이자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세상에 대한 분노… 그리고 복수심과 열등감과 같은 감정이… 아마 저 단장이라는 녀석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너희 들으라고 하는 말 맞아. 이 새끼들아, 정말로 대륙을 지키고 싶은 숭고한 감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지?’

“그들 역시 불쌍한 자들일지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다니….”

‘혜진아, 왜 그래. 나 알고 보면 따듯한 사람이야.’

“저도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들 역시 불쌍한 자들이에요. 악마소환사 진청에게… 세뇌된 이들이 아닙니까. 여러 가지로 뒤섞인 저 추악한 감정 덩어리들을 보세요. 그리고 저 감정 덩어리로 인해 뒤바뀐 녀석들의 모습도….”

“위원장님, 저런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콜록… 리안 씨. 그저 후회가 될 뿐입니다. 저들은 조금 더 빨리 만났더라면… 어쩌면 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복수심과 열등감, 분노도 가득 찬 추악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위원장님….”

‘이 반동분자 놈들아.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다. 전부 다 맞는 말이거든. 정말로 너희가 동료애 때문에 각성이라도 한 것 같아? 그런 일을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일이야. 이미 악마랑 계약한 새끼들이 사명감 때문에 새로운 힘을 얻어?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니까. 똑똑히 귓구멍 열고 듣자. 다 너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들이니까.’

“위원장님, 괜찮으신 겁니까.”

“네. 괜찮습니다, 리안 씨.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에 서 있는 빛.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게 당연했다.

조혜진이 악어의 눈물을 눈치챌까 걱정됐지만,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

아마 그녀 역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을 것이다.

최근 어느 정도 호감도가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나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도 했으니, 아마 제정신으로 눈물을 봐도 그럴듯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아마 내가 그들에게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악어의 눈물에 반응한 것은 악마 계약의 반동분자.

“저… 때려죽일… 때려죽일 가증스러운 놈이….”

‘가증스러운 건 너희지. 내가 흘리는 것만 악어의 눈물이 아니잖아, 이 악마 계약자 새끼들아.’

“자기 동료들의 힘까지 먹어 치우는 저 모습을 보세요. 함께 뜻을 해온 동지들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저렇게까지 되어버렸는지.”

평소였다면 눈물 즙까지 뽑아낼 수 있는 장면까지 폄하해 버리는 쓰레기 같은 발언.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안광은 점점 붉어지고, 입에서 흐르고 있는 타액들도 더욱더 진득해지고 있다.

‘어우. 찐득찐득하겠다, 저거.’

“이 가증스러운 놈… 죽여 버리겠다. 기필코… 기필코 네놈만은 죽여 버리고 말겠어. 반드시 찢어 죽여. 군사님과 눈을 감은 동료들의 원혼을 위로하겠다.”

“정말로 위로하고 싶은 게 그들의 원혼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분노인지를 잘 생각해 보세요… 콜록… 당신은 지금 악마에게 휘둘리고 있는 겁니다. 진청과 악마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세상에 커다란 증오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 때문에 어두운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눈동자에서 조금이지만… 억눌려 있는 순수함이 보입니다.”

“…….”

“눈을 감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정말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게 대륙을 위하는 게 맞아? 그래서 악마랑 계약까지 하셨어요?’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들여다보세요. 콜록….”

‘그거 아닐 텐데… 내가 보기에 너는 그렇게 숭고한 사람은 아니야.’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다시 한번… 떠올려 보세요.”

‘단순한 복수심이잖아, 개자식아. 아니면 열등감일 수도 있고… 나야 솔직히 뭐 알 바 아니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

“…….”

‘너는 정의의 아군도 아니고, 대륙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클리셰의 희생양도 아니야.’

“…….”

‘그냥… 추악한 괴물이지.’

아침 이슬처럼 맑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녀석이 볼 수 있게 비릿한 미소를 입에 담는다.

군중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녀석에게는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놈을 도발하고 있다. 이게 정의를 표방하는 너희의 진짜 모습이라고,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놈들이라고 비웃고 있다.

이지혜가 살아 움직이는 도발 토템으로 불렀던, 내 표정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녀석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놈이… 네놈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타락하지는 않았다. 우리 결사단 동지들을 모욕하는 언사는 절대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때려죽일 놈.”

“…….”

“네놈만은 죽인다. 기필코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 버리겠다. 기필코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네놈만은 죽일 것이다, 더러운 사기꾼 자식….”

‘그래, 맞아. 이게 네놈들 포지션이라고.’

“아니, 절대로 편하게 죽게 만들지 않겠다. 네놈의 팔다리를 자르고 돼지우리로 던져, 가축들과 함께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 간사한 혓바닥을 뽑고 군사님을 비웃었던 눈 역시 억겁의 불로 태울 것이다, 이 역겨운 기만자야. 대륙을 속이고 있는 악마 자식!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반드시이!!”

‘반응 좋네요.’

문제가 있다면 내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았다는 것.

동료의 마력까지 빨아들이기 시작한 녀석은 어느새 인간의 껍질까지 벗고 있다. 피부가 벗겨지고 그 안에 있는 살점이 드러난다.

보라색의 울긋불긋한 살점들은 점점 팽창하면서 녀석의 살가죽까지 뚫고 나오기 시작한다.

덩치는 점점 커다래지고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괴물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외관, 더러운 점액질이 뚝뚝 떨어지는 녀석의 몸을 보니 입맛이 다 떨어진다.

단언컨대 놈은 지금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악마에게 잡아먹힌 것은 물론,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아마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괴물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죽여… 죽일 테다. 반드시… 죽여 버릴… 복수를….

‘뭐 저렇게 변해. 아니, 저렇게 변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이렇게 강해진 거야.’

이 자식과 계약한 악마가 도대체 누굴까. 어떤 놈이길래. 소환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이 정도나 되는 힘을 전해줄 수 있는 걸까.

‘생각해 봄직 한데….’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녀석.

커다란 기운이 녀석의 입에 모이고, 곧 거대한 기운이 전방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뼈의 방패를 만들었지만 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아차 싶었지만 이내 전방을 가로막는 존재의 등장에 굳이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쇼. 내가 형님의 방패가 될 테니까.”

어딘가에서 많이 들어본 대사.

“그럼 저는 뭐라고 하면 되는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

박덕구와 안기모.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쏟아졌던 공격을 커다란 방패로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는 모습은….

‘성장했구나. 진짜로 성장했네. 너 어떻게 성장한 거야, 진짜.’

정말로 거대한 방패를 떠올리게 했다.

“정말로 오랜만이요, 형님. 보고 싶었다니까.”

“그래, 오랜만이다.”

‘이 돼지 새끼야.’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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