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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83화 (574/1,590)

# 583

회귀자 사용설명서 583화

숭고한 희생(3)

만나면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얼굴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어서기 시작한다.

얼굴을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예전에 봤던 덩치 큰 돼지의 모습 그대로. 오히려 달라진 것은 녀석의 몸이다.

이미 화면을 통해 한차례 모습을 확인했지만, 이전보다 더 덩치가 커진 것 같은 느낌.

실제로 내 앞에 선 모습을 보니 확연히 차이가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 더 커진 것… 같은데. 옆으로만 늘어난 게 아니라 키도 조금 컸나?’

입으로는 내뱉지 않은 말이었지만 눈치가 빠른 건 여전한 모양이다.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최근에 키가 크고 있는 것 같다니까. 아,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일이 더 바쁜 상황이니까… 뻔한 질문이지만… 몸은 좀 괜찮은 거요?”

“그래, 괜찮다. 아직은… 괜찮아.”

“거, 괜한 질문을 한 모양이요. 괜찮을 리가 없는데…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빨리 신전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니까. 아무튼, 이런 방식의 재회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조금 드라마틱한 것 같아 나름 만족스럽구만… 오랜만에 형님 얼굴 보니까 솔직히 별별 생각이 다 들기도 하고… 사실은 만나자마자 거하게 한 번 껴안아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쉽기는 하지만 이렇게 곧바로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새끼야.’

“조금 더 뒤로 물러서는 게 좋을 거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 버티기가 꽤 빠듯하니까.”

계속해서 쏟아지는 공격을 거대한 방패로 막아내고 있는 모습은 솔직히 멋있다.

‘아, 이제는 이 새끼가 다 멋있어 보이네.’

전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만큼 악마 놈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이 폭발적인 탓이다.

‘전설 등급이랑 준신화 등급의 사이? 아니… 그건 너무 짜네. 준신화 등급 그 끝자락 정도는 되려나.’

대륙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빌런.

박덕구가 무언가를 막아내는 것의 스폐셜 리스트라고는 하지만, 결코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여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고….’

27군단 침공 당시에도 도노반을 상대로 혼자 시간을 끈 적이 있으니 이 정도는 막아내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놀랍기는 하다.

사실 사랑스러운 회귀자에 의해 그 생을 마감한 군단 반역자 도노반은 저 돼지를 진심으로 상대한 적이 없다.

정말로 죽이겠다는 의지를 담아 공격했다기보다는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노반이 형과 저 빌런은 품고 있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쪽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담은 공격, 저걸 받아내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돼지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완성이 됐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겨우 1년 만에 이 정도까지 올 수 있는 건가.’

전설 등급 근처에서 허덕이던 녀석이었다. 1년 동안 어딘가에서 기연이라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 기연이 그렇게 쉽게 발견될 리가 있나.’

이쯤 되면 지 혼자 먹으려고 슬쩍 해놓은 기연을 달려가 먹으려고 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사실….

‘강해지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뭐.’

그 말이 맞다.

옆에 있는 안기모가 이대로 가다간 병풍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는지 박덕구에게 버프를 쏟아내고 있는 중.

그와 동시에 상처 입을 이들을 향해 신성력을 뿜어내는 모습을 보니 수련의 성과가 있었던 것 같았다.

특히나 버퍼로서 몇 단계는 더 성장했다.

애초에 순수한 신성력으로는 엘레나와 선희영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성장 방향을 바꾼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안기모의 진짜 강점은 버퍼로서의 능력이 아니다.

탑 티어 전위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의 방어력과 공격력.

자신 역시 달라졌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는 듯이 조혜진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한차례 원거리 공격이 들어와 꽂힌 이후에는 다시금 커다란 괴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인… 다… 죽인….

박덕구는 방패를 몸에 딱 붙이며 이후 쏟아질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박덕구와 안기모의 등장에 친위대는 조금 포지션이 애매해지기는 했지만, 이윽고 할 일을 던져주는 반동분자의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놈만은… 죽이고… 말겠다. 네놈만은… 죽이겠….

흉물의 몸에서 흉물들이 분리되어 떨어지기 시작한 것.

점액질에 둘러싸인 채로 기괴하게 움직이는 놈들은 가까스로 인간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딱 그것뿐이었다.

두 발로 걷는 모습을 유지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존재라고 볼 수가 없다.

허리를 구부리고 팔을 늘어뜨린 모습이었고, 기괴한 촉수나 이해할 수 없는 신체기관을 달고 있는 녀석들까지 있다.

거대해진 악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잔챙이들은 헐떡거리는 소리를 내며 친위대를 향해 쏟아졌고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한 빛의 전사들은 놈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네놈만은… 네놈만은 죽이….

“지켜!”

-용서… 못… 군사님의….

“대열을 재정비한다. 위원장님에게는 손끝 하나도 대지 못하게 해!”

-절대로… 복수를….

콰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득!

콰직!

푸화아아악!

이미 처절한 격전이 되어버린 현장, 하지만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다.

성장하기 전 전이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적이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박덕구 메인탱, 조혜진 메인딜러, 안기모는 힐러 겸 보조탱커. 후위는 역병군주 이기영. 완벽한 구성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손발을 맞추어본 지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동작이 연계된다.

박덕구가 시선을 돌린 반대편에는 항상 조혜진이 위치해 있고 안기모는 항상 내 위치를 염두에 두고 전장으로 뛰어든다.

부족한 화력과 전체적인 상황을 컨트롤하는 것은 내 역할.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아군의 공격 패턴이 뒤바뀐다.

파티 사냥을 할 때 가장 필요한 덕목, 파란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이 아니었던가.

패턴이 고착화되면 털리는 것은 몬스터뿐만이 아니다. 파티나 공격대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인간과 인간의 전투에서도 고착화된 패턴을 버려주는 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얘네가 지난 시간 동안 배운 걸 까먹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나 박덕구가 잊어버린 것 같지 않아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스위치, 스위치.”

“알고 있다니까.”

“그다음 갑니다.”

“형님도 준비하쇼.”

“알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혼자가 되어버린 흉물을 몰아붙이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반드시… 죽이…겠….

몸을 키운 거대한 덩치로 팔을 휘두르며 불길한 마력을 뿜어대고는 있었지만, 그게 녀석이 할 수 있는 전부.

-피의 복수를….

김현성이나 정하얀 같은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마무리를 짓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다.

물론 생각할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거 이대로 마무리하는 게 맞나.’

에 대한 고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장면을 만들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뒤를 한번 캐봐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 정도까지 대륙의 실적을 전해줄 수 있는 악마가 있을까.

가능성은 낮지만, 이계신이 개입한 것은 아닐까.

미하일과 나탈리가 결사단의 내부 속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까.

만약 그 치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눈앞에 있는 새끼가 마지막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어려울 것 같기는 했지만, 생포하자면 생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이성은 완전히 먹힌 건가?’

겉모습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는 했지만, 자세히는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해서 주춤거리는 내 모습을 확인했는지 박덕구가 조그맣게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형님.”

“…….”

“형님의 케이스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요. 저들은 스스로 타락하는 것을 선택한 이들이요. 흔들릴 필요 없소. 형님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니요?”

‘아니, 그래서 그런 건 아닌데….’

“형님의 탓이 아니요….”

‘정말 그래서 그런 건 아니야, 이 새끼야.’

“그렇게 마음 쓸 필요는….”

‘그러니까 그거 아니라고, 이 새끼야.’

어떻게 생각해 봐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 있다.

시간이라도 끌어볼까 싶어 괜스레 힘든 척하며 머리를 부여잡은 것은 당연지사.

잠깐 동요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다.

‘살리는 게 맞겠는데.’

선택의 여지가 죽이는 것밖에 없다면 달라졌겠지만, 일단 제압한 이후에 대화 정도는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선다.

그 와중에 녀석이 흥분했는지 괴상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파란의 전위들을 뚫릴 수 있을 리 만무.

내 쪽으로 튄 것은 기껏해야 녀석의 피와 끈적한 점액질이 고작.

곧바로 닦아내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을 유지하는 게 더 처절한 그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저런 건 달려가 맞는 게 맞다.

기분은 나쁘지만, 딱히 육체에 이상이 생기는 종류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기왕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해줘라, 인마. 그게 사람들이 보기 좋잖아. 안 그래도 최근에 이런 장면이 너무 없다 싶어서 걱정했었다고.’

기대에 부응하듯 열심히 일해주고 있는 듯한 녀석.

‘조금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줘. 새끼야.’

흥분했는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뭔가 장내에 분위기가 급변했다는 생각이 든 것. 아니, 확실하게 변했다.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던 이들이 뭔가에 영향을 받은 듯 제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으니까.

박덕구와 안기모가 뭔가 불안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 뒤에서 느껴지는 것은 거대한 마력의 유동, 저절로 몸이 덜덜덜 떨려온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치솟아 올라 머리털이 쭈뼛쭈뼛 선다.

심지어 개소리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던 괴물 새끼 역시 조용한 목소리로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해 중얼거리기 시작.

-악… 악마….

‘아니야. 걔 악마 아니야.’

-악마… 악마다.

‘걔 악마 아니라고, 새끼야… 시바… 악마 같다고 생각하는 건 이해하는데… 악마는 아니야.’

도대체 무슨 얼굴을 하고 있길래 악마라는 말이 튀어나올까. 뒤를 돌아보기가 무섭다. 망설이고 있던 사이 터져 나온 목소리.

“죽어.”

거대한 마법이 놈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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