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5
회귀자 사용설명서 585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2)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땀으로 젖은 얼굴.
정하얀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을 보면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9개월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항상 같은 길이를 유지했던 머리카락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동굴에 처박혀 수련에 용을 쓰기는 한 모양.
마음의 눈으로 확인한 정보창에서도 스탯 자체가 성장해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다급해 보이는 눈빛, 들어오자마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영 씨,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럼 알아볼 수 있지, 새끼야. 무슨 그런 걸 물어봐. 그럼 잊었을까 봐.
둠기영의 모습을 너무 오랜 상태로 유지하다 보니 쓸데없는 게 다 걱정됐던 모양이다.
일단 보여지는 모습 자체는 평소대로의 김현성 그대로였다.
‘잘생기기는 오지게 잘생겼네.’
배우 뺨치게 생긴 얼굴도 여전했고 무엇보다 죄책감에 가득 얼룩진 얼굴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당연하지만 저 죄책감이 어디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죄책감이 없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진짜.’
조혜진을 통해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고,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무려 9개월 동안 잠수를 탄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상황이지 않았던가.
그 기간 동안 사건이 터졌고, 결국 빛기영이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더러운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능욕당한 것은 물론, 둠기화까지 터뜨리며 고생이랑 개고생은 전부 다 한 상황.
그 결과로 이렇게 나흘이나 기절했으니 오죽할까.
애초에 김현성만 있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 아니었던가.
나보다 녀석이 그걸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을 굳게 먹고 폐관수련에 들어간 녀석의 심정은 이해했지만, 이미 사건은 터졌고, 버스는 떠났다.
빛기영은 상처 받았고 가슴이 많이 아프다.
반가운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아나기는 했지만 이 마음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노선을 취해야 이 새끼가 스스로 거리를 벌릴지 고민됐기 때문이다.
잘 타일러 다시 폐관 수련으로 보내 버리는 게 좋을까 싶기도 했지만….
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끌고 다녀야 돼.’
괜히 또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어가기보다는 지금 딱 선을 긋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느낌.
미안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뒤처리를 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숨을 크게 들이마신 이후에 한마디 내뱉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요.”
“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
“농담입니다.”
하지만 가시가 있는 농담이기도 했다. 조금은 충격 받은 것 같은 얼굴, 침울해지는 표정, 나라라도 잃은 것 같은 탄식.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하지 말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동공이 흔들리는 게 시야에 비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니요. 전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바쁘시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 무엇보다 수련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굳이 여기서 이러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연락할 시간도 없었는데… 다시 수련하셔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현성 씨.”
“그게 아니라… 제가.”
“예정됐던 시간까지 삼 개월 정도가 더 남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요. 그… 어느 정도는 성과를 봐서… 이제는 괜찮… 괜찮…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괜찮으니 어서 빨리 수련하러 가세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진심을 담은 목소리였다.
평소답지 않게 이죽거리는 듯한 목소리 이기도 했고… 단언컨대 김현성이 충격 받을 거라는 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현성아. 미안하기는 한데… 괜히 여기 뒷정리 같이 하겠다고 비비지 말고, 빨리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그게 맞아. 나도 나대로 스케줄이 있고 해결해야 할 일도 있는데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너무 불편해진다고.’
“수… 련은 전부 끝났습니다.”
‘수련에 끝이 어디 있어, 이 새끼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몸 상태도 이제는 정상이고… 사건도 전부 해결됐으니까요.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더 강해지셔야죠. 자, 어서 수련하러 가세요.”
‘무슨 지금 와서 걱정을 하고 그래. 그만 걱정하고 어서 가서 네 할 일 하자.’
“아니요. 정말로 수련은 끝났습니다. 지금부터는… 네, 합동 훈련소에 있던 병력도 전부 기지로 옮겨야 하니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몸은 이제 전부 회복되신 겁니까?”
“네, 아무 문제없이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사실 상처가 큰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도… 체력 저하가 원인 이었으니까요. 걱정하시는 만큼 크게 다치거나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혜진 씨와 같이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아… 네, 아마 오고 있을 겁니다.”
둘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을 버리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도착한 조혜진이 들어오는 게 눈에 보인다.
조심스레 열려 있었던 문을 닫고 들어오는 모습. 깨어난 내 모습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띈다.
“일어나셨군요.”
“아! 여기 앉으세요, 혜진 씨!”
“아… 네.”
‘이게 누구야. 우리 파란 길드의 자랑, 파란 길드의 희망, 우리 혜진이 왔어?’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뭐야, 당신. 갑자기 왜 이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리로 오세요.”
순간적으로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봤지만, 반응이 그다지 시원치 않다.
하지만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키야… 우리 영웅이 오셨어요. 영웅이 오셨어. 대륙의 빛을 구한 1등 공신이 오셨어요.’
혁명 삼남매가 바깥에서 혁명에 가담하고 있을 때 단신의 몸으로 이쪽을 구하러 온 영웅.
회귀자가 본인의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때 위협을 미리 깨닫고 있었던 용사.
상산의 조자룡을 떠올릴 정도로 아름답고 멋있었던 그 모습을 잊을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대접해 주는 것이 옳다.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탁탁 두드리자 소름이 돋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백번이라도 더 칭찬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기 차도 조금 드세요, 혜진 씨.”
“별로… 괜찮습니다.”
독이라도 탄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치.
하지만 슬그머니 김현성 쪽을 바라보자 순순히 차를 받아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혜진이가 많이 영악해졌네.’
눈치 없는 조혜진도 이제는 깨닫고 있다.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 친하게 지낼 때면 김현성이 은근슬쩍 질투를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할 정도로 친절한 이쪽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기분 나쁜 표정은 그만해 주세요’라고 따져오지 않았을까.
냉큼 자리에 앉는 것은 물론, 홀짝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까지 완벽히 내가 바라고 있었던 포지션이었다.
‘이쯤 되면 코치도 필요 없겠다, 야.’
아무것도 몰랐던 바보가 어느새 이 정도나 성장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동안 체스를 두며 했던 조언들이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된 것이 분명하리라.
김현성은 살짝 불편한 얼굴. 뭔가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딱히 다른 코멘트를 해줄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본인이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저기 그러니까….”
며칠 내로 집안에 가방이 하나 더 생길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보이는 모습에 조금 챙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 찰나 차례대로 길드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은 허겁지겁 뛰어오는 정하얀부터.
“오, 오빠… 끄윽… 오빠아….”
약속의 한 달보다는 조금 더 빠르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가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잠깐 동안 박살이 난 5구역이 눈에 밟히기는 했지만, 일단 꽉 안아주는 게 옳다.
“흐어어어어어엉…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그래. 잘 참았다, 하얀아. 네가 여기까지 한 게 어디야. 성벽은 박살 났어도 화력 하나는 기가 막히더라. 그거 평범한 소재 아니었는데.’
그 누구보다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또 한 명.
‘소라야… 그래. 너도 고생했지.’
순수한 마음으로 한 번 안아주고 싶어 가까이 오라 손짓 했지만, 뭔가의 위협을 느낀 모양인지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선희영이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보고 싶었어요.”
라고 말해왔기 때문에 조용히 등을 두드려 주는 것으로 마무리.
안기모와도 포옹을 한 번 해야 했고 어느새 껴 있는 김창렬 역시 슬쩍 등을 두드려 줬다.
아무래도 길드원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인사를 나누는 게 일이다.
엘레나는 아까 한 번 했으니 건너뛰고 이다음은 유아영.
“부길드마스터.”
“많이 얻어왔습니까?”
“네, 덕분에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확실히 직업이 뒤바뀐 게 보인다.
‘그래, 그래, 우리 소중한 대장장이. 그동안 드워프들 사이에서 부대끼면서 열심히 했네.’
박덕구의 그녀 황정연까지.
“길드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보너스 주시는 거예요?”
“물론이죠.”
별로 포옹하고 싶지 않다는 김예리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안아주는 모습.
이후에 커다란 덩치를 한 돼지가 내 몸을 꽉 껴안는 것이 느껴진다.
뼈가 부러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힘 조절은 하고 있는 모양.
훌쩍 거리는 것을 보니 눈물이 찔끔 튀어나온 것 같았다.
원체 정이 많은 녀석이니 이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이런 모습을 보이니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도 고생 많았다.”
“형님이 제일 고생 많았지.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지금부터 일은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님은 그냥 침대에만 누워 있으쇼.”
‘그런 소리는 웬만하면 하지 말자.’
길드원들과 다 한 번씩 인사를 주고 받은 이후에 남은 사람이 한 명,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김현성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른 척 넘어가고는 싶기는 했지만, 다른 길드원들이 보기에 그리 좋은 장면은 아니다.
슬그머니 눈빛을 보내자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 등을 두드려 주는 걸로 짧은 인사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그런 말은 얘들 없을 때 좀 해. 쟤네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그대로요.”
“네….”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시간 두자. 얼마 안 걸릴 거야. 이번 일이 다 처리하고 술 한잔 같이해 줄게.’
내 속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현성의 얼굴이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는 것.
잠깐 거리를 두자는 뉘앙스로 계속 입을 열었으니, 아마 본인이 직접 밀착 마크하는 경우는 없을 것 같았다.
보여주기 식 호위로는 조혜진이나 정하얀, 시간이 난다면 희라 누나한테 부탁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괜스레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아… 오랜만에 만나서 분위기가 좀 훈훈해지는데… 여기서 바로 일 이야기하면 너무 정 없어 보이나.’
미하일, 나탈리, 혹은 그 밖에 남아 있는 잔당들이 있었는지, 만약 있다면 제대로 생포는 한 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혜 누나를 불러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