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6
회귀자 사용설명서 586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3)
무려 1년 만의 해후.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기절해 있었던 나흘 동안은 이렇게 다 같이 모일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 말이 끊이지 않는다.
‘아니, 잘 보니까 그런 것 같지도 않네.’
모두가 모이지는 않았지만, 이미 몇몇은 만나 식사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매번 만나지는 못했을 거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뿔뿔이 흩어져 있던 이들이 1년 만에 모였다고 한들, 각자가 가지고 있었던 임무나 책임까지 놓고 온 것은 아니다.
황정연과 선희영은 여전히 파란의 업무를 맡고 있는 상태였고, 김현성과 조혜진 역시 합동 훈련소를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김창렬이나 김예리 같은 경우도 여유롭지는 않다. 직업적 특성이 있었던 만큼 여러 가지 임무를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
심지어 엘레나도 이종족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여유로운 건 정하얀과 박덕구 정도가 전부다.
사실 이 트롤러들에게 다른 걸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배가 아파온다.
첩보 임무를 맡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고… 그렇다고 행정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하얀, 얘는 딱 보니까 여기로 온 이후에는 훈련을 따로 한 것 같지도 않다.
진작에 다른 일을 가르쳤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얘네한테는 뭘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없다.
아마 다른 길드원들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명을 프리로 내버려 두지 않았을까.
‘하얀이한테는 길드 일을 조금 가르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여기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사고를 칠 때 한 번 정도는 더 이쪽의 생각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나 기각….
아마 내가 불안해서 가만히 있지 못할 것이다.
정하얀에 대해서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그녀로 인해 붕괴된 제5구역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이후의 상황이 다시금 궁금해진 것은 당연지사. 빨리 이지혜를 만나 뒤처리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다.
다들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밀린 일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어봤지만, 밀려 있는 업무는 무리해서라도 스탑하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오늘 하루는 어울리자.’
아픈 척 길드원들을 물리고 싶기도 했지만,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벌떡 일어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걸 어필하는 게 더 이롭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니 곧바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부축하기 위해 김현성을 포함한 몇몇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정하얀이었다.
허겁지겁 달려와 옆자리를 차지한 모습은 알 수 없는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
그 모습을 본 돼지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어왔다.
“역시 우리 형님 챙겨주는 사람은 누님밖에 없다니까. 그나저나 움직여도 괜찮은 거요?”
“물론, 체력이 조금 떨어진 것만 빼면 별문제 없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엘레나 님?”
“네…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서 더 무슨 사족을 붙이려고 그래. 그냥 거기까지만 해. 괜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 밥이나 먹자.’
“조금 출출한 것 같군요.”
라고 말하면서 김현성을 빤히 쳐다보기.
사실 내가 식사를 권해도 별로 상관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란의 길드마스터는 김현성이 아닌가.
무엇보다 현재는 파란 길드 소속이 아니기도 하니 작은 부분이라도 녀석이 권하고 제안하고 통제하는 것이 맞다.
예상했던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모두 함께 간단한 식사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이라니까. 그럼 오늘 다 같이 술 한잔하는 거요?”
“내일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저녁때니까요.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슬슬 움직이도록 하죠.”
“알겠다니까. 형님, 몸이 괜찮은 거면… 형님도 한잔할 수 있는 거요?”
“아니요, 기영 씨는….”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
“…….”
순간 모두의 시선이 엘레나에게 고정된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프 공주.
괜스레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이런 날 같이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다.
박덕구는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중.
얘는 왜 신난 건지 모르겠지만 정하얀 역시 텐션이 올라간 것 같았다.
‘나도 좋기는 하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나 역시 길드원들이 반갑다.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붙어 있는 정하얀도 반갑고, 매번 시끄럽다고 느껴졌던 박덕구의 목소리도 반갑다.
안기모의 실없는 농담이나 적절히 분위기에 호응하는 유아영의 리액션도 마찬가지.
마음속으로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길드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오랜만에 뭉친 길드원들은 곧바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냥 평상복으로 나가기로 했다.
깔끔하게 그냥 하얀색 티에 청바지. 식당도 멀지 않아 금방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혜진 씨만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까? 아니, 그보다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
“사실… 체스 두려고 갔었습니다.”
“아….”
‘마음이 통한 건 아니었구나.’
“맨 처음은 여기로 먼저 왔었지만, 다른 현장으로 떠났다더군요. 곧바로 그리폰을 타고 청사로 곧바로 찾아간 겁니다. 당연하지만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고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혜진 누님 말이 맞다니까. 나는 그때 아래에 있었는데. 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거 아니요. 그냥 뭐 협상이나 다른 이야기를 진행 중인 줄로만 알았지. 갑자기 청사가 와르르 무너졌을 때는 정말로 간 떨어질 뻔했다는 거 아니요. 그때 본 형님 모습을 보고는 한 번 더 심장이 떨어질 뻔했고. 그렇지 않소. 기모 형씨?”
“운이 좋았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예리 씨와 덕구 씨와 함께 자리해 있어서….”
“이런 게 다 운명인 거 아니요.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는 걸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가 아니요. 베니고어 여신님이 우리를 그쪽으로 인도한 거요.”
‘기도도 안 하는 놈이 무슨….’
“예리는 뭐 하고 있었는데?”
김현성과 함께 뒤따라오고 있는 김예리를 바라보자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덕구 아저씨가, 잡아야 한다고 했어.”
“누굴?”
“혹시 도망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청사 주변을 잘 봐달라고 해서.”
‘키야…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박덕구의 성장에는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그래서 잡았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손으로 작게 브이 자를 그린 모습을 보니 성과가 있기는 있는 모양.
속으로 작게나마 ‘김예리 나이스.’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과 나탈리가 현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만무. 두 반동분자들은 물론 남아 있는 결사단원들도 잡아 넣어놨을지도 모른다.
“미하일이랑 나탈리는….”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브이자를 한 번 더 그리는 김예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고, 장한 것아… 덕구야 너도 잘했다. 진짜, 잘했어.’
“그나저나 형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요?”
“매일 똑같았지 뭐. 업무 보고… 가끔 혼자서 와인 한잔하고… 또 업무 하고… 너는 뭐했는데?”
“나야,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 아니요. 떠나기 전에는 1년이 무척 짧은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무척 길었다니까. 나랑 기모 형씨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설명하지도 못할 거요. 달랑 둘이서 던전에 들어가서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니까.”
“그것도 있었지만, 식량도 부족해서 큰일이었습니다. 여행 중간에 자금이 떨어지기도 했고요. 길드에 도움을 받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금 부끄러워서… 중간중간 들려 일을 하기도 했었는데 생각보다 대우가 괜찮더군요.”
“베니고어 넷에서 봤어요. 리플도 많이 달렸던데.”
대화에 갑작스레 끼어든 것은 황정연이었다.
‘그래, 너는 그거 많이 할 것 같았어.’
베니고어 넷에서 사는 것처럼 상주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린델에서 조치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근처 숲에 자리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대로 북부 쪽으로 밀고 들어갈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뭐예요. 덕구 씨랑 기모 씨 덕분에 피해도 별로 없었고, 엄청 안심했어요. 아 린델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그 이야기를 드리려면 정확히 8개월 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정연이 저런 상태로 변할 때면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좋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박덕구와 안기모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자 이야기를 주고받는 유아영과 김창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조금 방법이 거칠기는 했지만, 확실히 많은 걸 가르쳐 주셨어요. 기초부터 배우는 게 처음에는 불만이었는데… 시스템이 알려주는 지식 외의 것을 얻은 것 같아서….”
“그렇군.”
“한번 보실래요?”
“…….”
저기서는 드워프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유아영의 이야기가 한창.
아까까지만 해도 멀지 않은 거리에서 걷고 있었던 조혜진은 어느새 슬쩍 떨어져 선희영과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업무적인 이야기인 것 같았다.
‘쟤네 둘은 여기 와서도 일, 못 버리네.’
아주 훈훈한 모습. 이것저것 다양한 주제로 상대를 바꿔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밀린 회포를 푼다.
나 역시 간만에 진심으로 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음식이 나온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거울 연어 아니에요?”
‘아 저거 진짜 개 맛있었는데.’
입이 짧은 내 혀와 위장을 위로해 주는 음식.
그동안 식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반가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게 왜 여기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다.
화이트 와인 한 잔도 분위기를 띄우는 데 딱이었고… 오랜만에 회식다운 회식을 하는 것 같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는 거 아니요! 어이! 그 손 놓으라니까!”
자기 모험담을 풀어내는 녀석도 있었고, 침을 튀기며 토론하고 있는 이들도 보인다.
“딱 한 잔만 더 드세요. 오, 오, 오빠.”
“아… 뭐.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조금만 더요. 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니야. 아직 조금 남아 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짠 할까?”
“네, 네, 네.”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지?”
“네… 조금은… 힘들었기는 했는데….”
한소라의 얼굴만 봐도 정하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눈에 보인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저 얼굴에는 지난 1년 사이에 일어났던 온갖 고난과 시련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즐거웠던 한때.
그 와중에도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하는 김현성을 보니 이쪽의 작은 계획이 성공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당분간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맴돌지 않을까.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1년 만에 만난 길드원들이 회포를 푸는 것은 새벽 2시 정도로 마무리.
실없는 이야기들이 많기도 했지만, 뜻깊었던 자리였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으리라.
그렇게 다음 날 아침. 타이밍 좋게 나를 찾아온 이지혜가 입을 열어왔다.
“어젯밤은 재미있었어요?”
“뭐. 응, 그럭저럭.”
“방문 앞에 가방이랑 편지 있던데… 누가 보낸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안에 넣어뒀어요. 오빠가 기절하듯 잠자고 있었을 때 처리한 목록 정리한 문서는 여기 있고… 베니고어 넷 반응은 여기에 있고… 피해 규모랑 현재 상황 정리한 건, 그 뒷장이네요. 아쉽지만 미하일 입에서 나온 정보는 따로 없었어요. 곧 죽어도 오빠랑 이야기하고 싶다지 뭐예요?”
“끄응….”
“뭐 해요. 일할 시간이라고요, 일. 이 양반이 술은 얼마나 퍼마신 거야. 빨리 일어나요. 그동안 푹 쉬었잖아요.”
‘그래, 지금 일어난다, 지혜야.’
나 역시 기다렸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