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4
회귀자 사용설명서 594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1)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였지만, 깔끔하게 잘 정리된 장내. 던전이라기보다는 연구소라는 표현이 어울리리라.
살짝 시선을 돌려 주변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생각보다 건질 게 많겠는데.’
찐빵 안에 들어 있는 단팥이 전부 빠진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규모 역시 예상하던 것보다 더 크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쓸 만한 것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촉매로 쓸 수 있는 것들이라던가. 널려져 있는 연구 일지라던가.
흑마법을 기반으로 한 아티팩트들도 보였고, 심지어는 몬스터 생체 실험의 흔적들도 보인다.
등급 역시 천차만별, 영웅 등급으로 표기된 것들이 흔하게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무척 고무적이다.
‘뭐, 당연한 건가.’
평범한 재능으로 군단장급의 악마를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벨리알을 소환한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떠올리면, 별다른 재능이 없었던 녀석들이 군단장급의 악마들을 소환할 수 있을 리 만무.
녀석들이 군단장급의 악마를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사회적 패배자들의 열등감과 분노 같은 마이너스 감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런 감정만으로 군단장급 악마를 소환할 수 있었다면 이미 대륙은 악마 천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재능이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 건가?’
방법이 어떻든 간에 본인들이 목표로 한 걸 이룬 셈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예상보다 더 커다란 부지에 함께 원정에 온 이들 역시 놀랐다는 반응이 대다수.
결국, 참지 못했는지 박덕구가 입을 열어왔다.
“어떤 의미로는 놀랍구만.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더 스케일이 큰 것 같다니까. 1년이면 강산도 변할 세월이라지만, 입이 떡 하고 벌어지는 거 아니요.”
“10년이겠지.”
“1년이나 10년이나 뭐, 시간은 쓰기 나름인 거 아니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지, 형님도 참… 솔직히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한데… 그냥 척 보기에도 이 악마 계약자 놈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 계획을 구상했는지 눈에 딱 보일 정도요. 형님 눈에는 어떻게 보이쇼?”
“내가 보기에도 비슷해.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1년 만에 이 정도라니…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네.”
“아마 그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겁니다. 연구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고, 어느 때를 기점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거, 무녀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역시 내 눈이 틀린 게 아니었구만. 분위기를 보니까 뭐, 엄청 난 게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할 거요? 계속 진입할 거요?”
“응, 혹시 모르니까 경계를 너무 풀지는 말고. 방 하나씩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움직입시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물건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제가 직접 전부 확인할 테니까요. 다른 특이사항 있으면 곧바로 보고해 주시면 되고… 레인저 두 분은 멀지 않은 곳부터 정찰해 주세요. 위험요소가 발견되면 대응하지 않고 곧바로 보고합니다.”
“네.”
“네.”
“뭐 해요. 계속 움직입시다. 정오 전까지는 요 앞 정도는 전부 둘러보고 싶네요. 오른쪽 방부터 시작하죠. 덕구야.”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방패를 몸에 붙인 채로 방 안으로 먼저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빛무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것 같았지만, 문제는 없다.
오히려 전위들이 너무 할 일이 없는 게 문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들어와서 곧바로 작업 시작해도 될 것 같다니까. 빨리 좀 들어와 보쇼. 신기한 물건들이 많으니까. 흑마법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없으니, 뭐가 어디에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봐도 귀해 보이는 것들투성이요.”
“소라 씨.”
“네, 부길드마스터.”
“쓸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 봐요.”
“네.”
“카스가노 유노 님도 떠오르는 게 있으면 곧바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네.”
둘에게 짤막하게 입을 연 후, 나 역시 보물찾기에 본격적으로 합류.
조혜진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딱히 일에 크게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소라는 커다란 눈을 뜨고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중.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정하얀은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27군단 사태 때의 일로 악마들에게 반감을 품게 된 것이 분명하리라.
‘이건 또 깜빡했네.’
본인의 손으로 악마를 현세에 2번이나 소환시킨 주제에,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 성질 같아서는 여기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싶지 않을까.
리무르아나 로노베만 생각하면 여전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할까 싶다.
“조사하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면 곧바로.”
“네, 네. 보, 보고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괜히 폐기 하지마. 이게 다 보물인데….’
물론 당장 쓸 수는 없는 게 대부분이다. 조금 레어해 보이는 서적도 있는 반면에 별 가치 없는 것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중급 악마 계약 이행의 원리-희귀 등급]
[고급 악마 계약 주의사항-희귀 등급]
‘이런 건 별로 쓸모없는 거고.’
[역병군주와 천재검사가 사랑하는 법-전설 등급]
‘아니, 이건 여기 또 왜 있는 거야? 뭐야, 도대체 이건.’
[흑마법학 개론-영웅 등급]
‘이건 조금 챙겨갈 만하네.’
[72군단 설명서-전설 등급]
‘이건 아까 거보다 더 괜찮고.’
“아무래도 여기 있는 건 서적이 대부분이, 인, 인 것 같아요. 자료실로 쓰던 도서관 같은 느낌이었나 봐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기는 하네.”
“자, 자료가 굉장히 많기는 하네요. 전부 다 별반 쓸모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흑마법사를 육성하기에는 나쁘지 않지.’
한번 제대로 육성해 봐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겠는데?’
비둘기들에게 유효타가 될 가능성도 있고, 초반에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흑마법의 이점이 부족한 화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전출을 그렇게나 원해왔던 한소라에게 맡긴다고 운을 띄운다면 전력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성과를 내기 위해서 노력할지도 모른다.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
정하얀이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걸 의식한 행동처럼 보여 마음에 걸렸지만, 말 그대로 마음에만 걸릴 뿐이었다.
아무튼 간에 원정대는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시작.
생체 실험실에서 키메라가 튀어나와 작은 전투가 벌어진 것을 빼면 안전상의 특이사항은 없었다.
근처를 돌아보고 온 레인저들이 다른 위험요소가 없다는 걸 보고한 이후에는 원정대의 경계 레벨이 2단계 정도가 내려갔고, 자연스레 조사에는 탄력이 붙었다.
마법진에 대한 자료가 있는 마법진 실험실도 있었고, 약물이나 흑마법에 의한 신체 강화 실험실도 있었다.
여러 가지 쓸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나 생체 실험실이 아니었을까.
‘키메라.’
흑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인공생명체. 심지어 연금술사도 아닌 것들이 호문클루스에 대한 연구까지 해놓으셨단다.
‘습격 당시에는….’
써먹지 못했던 것을 보니 연구에 성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악마소환이랑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처음에는 가능성이 보여 제법 파본 것처럼 보였지만, 인공적인 생명체를 만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조차도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리는 호문클루스는 물론이거니와, 키메라조차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어느 시점에 노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하다.
반동분자 놈들의 예산이 한정적이었던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연구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돈이 어디로 들어갔나 했더니, 다 여기에 들어가 있었네. 시바, 이 고마운 새끼들.’
나 역시 녀석들과 다르지 않다.
여러 가지 연구를 병행했지만, 사실상 호문클루스는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고, 키메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정과 주력 분야의 연구만으로도 벅찼으니, 어떻게 이걸 다 연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녀석들이 연구해 놓은 성과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충분했다.
“이건 써먹을 수 있겠네.”
“바, 방금 뭐라고….”
“아니야, 하얀아. 혼잣말이었어.”
“아… 네.”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훈훈한 소식.
성과를 내지 못한 연구라고는 하지만, 녀석들이 그동안 쌓아왔던 데이터와 인프라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곧바로 실험에 들어갈 수 있는 설비와 연구 자료들이 즐비해 있다.
관련 직업을 준신화로 가지고 있는 이쪽이라면 가닥이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거 개꿀인데. 아니, 득템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 아닌가.’
심각한 척 표정을 짓고 있지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가 힘에 부친다.
이 방 자체만으로도 내게 있어서는 커다란 성과. 여건만 된다면 6개월 이상 처박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어나간 자금에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녀석들의 세월을 산 거라 생각하면 개이득을 봤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거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아예 이곳에 살림이라도 차리고 싶은 심정. 평소와는 다르게 조혜진이 이쪽을 바라보지만 않았다면 간단한 실험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아니, 얘는 자기 할 일이나 하지, 왜 자꾸 나를 쳐다봐.’
“이쪽도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슬슬 나가죠.”
“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고 싶으니까 하자. 적당한 핑계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다음 방으로 진입하기 진전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 잠깐 생체 실험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깜빡하고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 기억이 나서요. 물건을 두고 오기도 했고, 뒤처리 정도만 하고 따라붙겠습니다.”
“같이 가쇼.”
‘따라오지 마, 이 새끼야.’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근처고… 혜진 씨랑 덕구는 나머지 인원들과 함께 계속해서 진행해 주시면 됩니다. 친위대가 복도에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 직접 확인했잖아.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이미 다녀왔겠다. 빠르게 다녀올 테니 혜진 씨가 파티원 인솔해 주세요.”
대답은 듣지 않는 게 좋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가, 눈치가 보여 확인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뒤적거리자 괜스레 즐거워진다.
연구 자체를 즐기지는 않았고, 스스로도 이런 부분에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리는 거 보면 아무래도 내 정체성이 여기에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금단의 연구 성과를 펼쳤을 때였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뒤에서 조금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느낌.
‘조혜진? 따라오고 있었나?’
혹시나 우리 혜진이가 이쪽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던 찰나 들려온 목소리는 가관.
“언제부터 그렇게 기억을 잃기 시작한 겁니까?”
“…….”
“…….”
‘얘는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도대체 일이 어떤 방향으로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 내가 다 묻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