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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96화 (587/1,590)

# 596

회귀자 사용설명서 596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3)

눈치를 보는 게 당연했다.

‘얘가 미안해지게 왜 그래, 진짜….’

슬쩍 고개를 들어 훔쳐본 조혜진의 얼굴은 엉망이다.

얘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 김현성에게 빛의 속도로 차인 이후로 처음이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떨리는 입술과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황급히 얼굴을 가렸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통해 조혜진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왜 울고 그래. 왜 이렇게 다큐멘터리로 받아. 너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대충 지어내 말이었다.

조혜진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얼마 없는 양심이 찔려오는 게 당연하리라.

이쪽에서는 별생각 없이 개연성만 맞춰 집어 던진 거짓부렁에 눈물을 터뜨릴지 누가 알았을까.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민망해진다. 안 그래도 조용한 곳이 더 숙연해지니 이 자리가 불편해졌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가 조혜진이다 보니 점점 더 머쓱해지기 시작.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자 역시나 곧바로 반응해 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울어요?”

“…….”

“진짜 울어?”

“누가 울었다고 그러십니까.”

“아니, 울었잖아요. 지금도 울고 있잖아요.”

“안 울었습니다. 지금도 안 울고 있고요.”

“아니, 우는 것 같은데.”

“안 울었다는데 자꾸 왜 그래요! 진짜 안 울었습니다. 안 울었다고! 안 울었다고요. 안 울었다고!”

“아… 네.”

“그리고… 그리고 정말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중요합니까? 그런 농담이 나와요? 꼭 그렇게 물어봐야겠습니까?”

“아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쓸데없는 장난을 하고 싶습니까?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겁니까. 지금 입꼬리가 올라갑니까? 기억을 잃는다고요? 정신이 침식을 당해? 그걸 알고 있었는데도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도… 그래도 친구라고… 흐윽….”

“…….”

“어떻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냔 말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혼자서 감당하고 있었어요. 어째서… 왜.”

‘분위기 진지하게 만들지 마, 진짜. 어색해지게 왜 그래. 사람 미안해지게.’

어깨라도 한 번 두들겨 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한 번 안아줘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잠깐 고민해 봤지만, 두 가지 선택지 모두 피하도록 하자. 본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일단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두는 게 최선 아닐까. 괜히 이죽거리거나 수습하려다가는 분위기가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예상대로 시간이 조금 지난 직후에 기어코 눈물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조혜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코와 눈이 붉어져 있는 모습,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조금씩 몸이 떨렸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지장이 없다.

본인이 부끄러운 반응을 보였다는 건 알고 있는지 조금 전의 나보다 더 민망해하는 모습.

평소의 조혜진을 생각하면 아마 오늘 일을 두고두고 떠올리며 이불을 발로 차지 않을까.

그만큼 내가 보기에도 익숙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뭐, 사실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키야, 우리 혜진이가 나를 이만큼이나 생각하고 있었네.’

저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세우고 싶어진다.

‘그게 그렇게 슬펐어요? 아구구. 그래서 눈물이 나왔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 표정으로 기분 나쁜 생각을 하는 건 자제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길드마스터.”

“뭘 또 그렇게까지 표현하십니까. 친구가 아프다는 사실에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게 고마워서 그러는 거죠, 뭐.”

“…….”

“…….”

“후우….”

“…….”

“얼마나 된 겁니까.”

예상보다 심각해 보이는 반응에 ‘사실은 농담이었습니다’라고 아까 했던 말을 전부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말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내 낯짝이 두껍지는 않다.

‘이건 그냥 안 들키는 게 낫겠네.’

들키지만 않으면 진실이 아니던가.

모든 곳에서 통용되는 불변의 법칙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려던 찰나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뭐, 딱히 할 말이 없어서요. 아까 들으신 그대로예요. 치료를 위해 베니고어 님을 뵈러 갔을 때 알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요.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사라지기는 했지만… 별일 아니라고,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생각처럼 훈훈하게 진행되지는 않더군요.”

“…….”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이지만 증상이 나타나긴 했습니다. 사실 별건 없습니다. 방금 있었던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든지, 집무실의 위치가 어딘지 기억이 안 나거나… 잠깐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까지는요.”

“그걸 말이라고….”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들, 현시점에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고요.”

“분명히 뭔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희망을 버린 게 아니에요. 정말로 내가 전부 포기한 거로 보였어요? 성격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실까. 현재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솔직히 나도 아예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머릿속에 있는 지식까지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말입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건대, 현재 시점에서 제 머리보다 중요한 게 바로 이곳이에요. 못 막으면 다 뒈지는 건 똑같은데… 지금 와서 몸 사리고 편히 누워서 쉴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알아서 잘 생각할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가 걱정했다고….”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현성 씨나 다른 길드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부탁입니다. 현성 씨한테 언질을 받으신 것 같은데… 혹시 정확히 뭐라고….”

“의심이 가는 정황이 몇 가지 있다고 하셨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상태가 최근 들어서 더 안 좋아지신 것 같다고… 어쩌면 기억을 잃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저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었던 터라….”

“돌아가면 별일 아닌 것 같다고 오해하신 것 같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어째서 숨기시려고 하는 겁니까.”

“뭐 좋은 일이라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답니까. 저 혼자만 알고 있어도 되는 일인데. 제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해요. 쓸데없이 걱정 끼치고 동정받고 싶지 않다, 이 말입니다.”

“그래도 모두가 아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전부 알아야 해요. 그래야만 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야, 몰라도 돼. 너 혼자 알고 있어. 그게 맞아.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거면 내가 이 말을 꺼낸 이유가 사라지잖아.’

“괜히 제가 스트레스 받을 것 같아서 그런 겁니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인데… 지금은 일 외적인 걸로 스트레스 받기 싫으니까. 혼자만 알고 계세요. 정말로 부탁합니다.”

“…….”

“…….”

‘아니, 또 왜 울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얘가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할지 누가 알았을까.

‘그래, 마음껏 울어라, 혜진아. 울어서 네 순수를 마음껏 증명해.’

“일… 단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일단은요. 하지만 부길드마스터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꼭 알리셔야 합니다. 그런 종류의 관심이 달갑지 않으실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전까지는 제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요.”

“감사합니다.”

“별로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네… 감사할 필요 없는 일이죠…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혜진 씨가 죄송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세요. 아 그리고 이쪽 지역 조사 다 끝난 이후에 조금 틀어박힐 테니 그렇게 알고 계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알겠….”

“네.”

다시 한번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조혜진이 눈에 보였다.

왼손으로 눈물을 최대한 훔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기가 무서웠지만, 원활한 연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 아니었나 하는 훈훈한 생각이 들어 꽂힌다.

가슴이 찔리는 것과는 별개로 이성은 앞으로 편해지겠다며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 그래도 진짜 오랜만에 미안해지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저 의혹에 계속해서 침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뭐라도 선택해야 했고,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골랐어야만 했다.

‘아,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 좀 내버려 두세요’라고 말한 들 믿어줄 것 같지가 않다.

조혜진은 물론이거니와 김현성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차라리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직접 전하는 쪽이 더 공신력 있다.

계속해서 변명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안정적으로 시간을 버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지 않은가.

“이제 좀 그만 우세요.”

‘조금 더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어야 돼.’

자꾸만 거리를 벌리는 것 같아 미안하기는 하지만, 김현성이 이 장소를 눈치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이미 얻어갈 것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오피셜이 붙은 만큼 이전보다 더 전문적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무능력한 베니고어와 엘룬 쓰레기에게 아무리 비벼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기댈 곳이 이곳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벨리알이라도 불러오고 싶었지만, 베니고어와 계약한 벨리알이 현세로 소환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채워야 할 조건이 많다.

기껏 베니고어가 틀어막고 있는 구멍이 벨리알로 인해 다시 늘어날 수 있으니, 그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고….

저 위쪽이 복잡하다 보니 아래쪽은 더 복잡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다.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아까 전부 확인하지 못했던 것들을 둘러보자 확실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거 지금부터 파도 나쁘지는 않겠는데.’

물론 호문클루스나 키메라들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나 키메라들은 고작 영웅, 높으면 전설 등급 판정을 받아내는 게 고작 아닐까.

물론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특성상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는 문제가 많기도 했고, 퀄리티 자체에도 차이가 있다.

‘인식에도 문제가 있고….’

애초에 뿌리가 흑마법에 있을뿐더러, 겉모습 자체가 빛과 함께 싸우는 이들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몬스터의 외관을 베이스로 하다 보니 조금 켕기는 것도 있고….

‘아니지, 외관은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써먹을 수 있다면 전부 써먹는 게 맞다. 현재는 똥오줌 가릴 처지가 아니지 않은가. 성검이 없다면 마검이라도 가져와 써먹어도 모자라….

“어?”

벼락처럼 뭔가가 머릿속에 꽂힌 듯한 기분.

기다렸던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필요한 게 그것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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