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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97화 (588/1,590)

# 597

회귀자 사용설명서 597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4)

‘…….’

[필요한 게 그것뿐이냐고 물었습니다.]

‘…….’

[보았던 그대로였고, 들었던 그대로고, 읽었던 그대로였군요. 딱히 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만, 당신처럼 역겨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정말로 즐겁군요.]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 역시 잠시뿐이었다. 이미 몸에 새겨진 권력자를 향한 아첨 본능이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걸어주시니 영광 또 영광 압도적 영광입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목소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이 하등하고 또 하등한 필멸자를 찾아주셨습니까.’

[하등하다니요. 그대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닙니다. 이미 그 격이 평범한 벌레들과는 다른데, 어떻게 그대를 다른 인간들과 같은 하등한 존재로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벨리알, 그 아이와는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말이 틀렸습니까?]

‘벨리알 님께서 이 하등한 사람을 좋게 봐주신 것뿐입니다. 어찌 제가 지고의 악마분들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굳이 벨리알이 아니더라도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파이몬, 바신, 몰렉, 72군단 중 저와 뜻을 함께하는 악마들 모두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도대체.

누구지?

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게 말을 건 악마가 평범한 악마가 아니라는 것.

악마 계약자 놈들에게 커다란 힘을 줬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시바… 이거 어떻게 해.’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조혜진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내 동태를 살피는 중, 말하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안 그래도 베니고어와 대화를 하는 것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의혹이 생기지 않았던가.

방금까지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조혜진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 위대하고 고결하신 악마분은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친히 납시어 대화를 걸어주셨는지 모르겠다.

내가 곤란해 하는 상황을 즐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악마들은 누구나가 다 짓궂은 면이 있으니까.

“잠, 잠깐만 나가 계세요. 급하게 할 일이… 아무 일도 아니니까 잠깐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통증이 있으신 겁니까? 지금 무슨… 어떻게… 이걸 어떻게… 사제를 불러오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아니, 괜찮으니까 가만히 좀 내버려 둬, 시바. 지금 중요하단 말이야, 혜진아. 진짜 중요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잠깐만… 혼자… 잠깐만 제 몸에 손대지 마시고… 혼자 있게 해주세요. 신성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잠깐 머리가 멍할 뿐이니… 걱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상황은 점점 점입가경으로 흐르는 중.

절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의 얼굴이 계속해서 시야에 들어오니 어떻게 이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던 것보다 오해가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지금 와서 일을 놓을 수는 없다.

얼마 만에 찾아주신 중역이던가.

거래처의 부장도 아니라 대기업 회장님으로 추정되시는 분이 직접 귀하신 몸을 이끌고 행차해 주셨다.

72악마 중에 27군단장이었던 벨리알, 아니, 이제는 10위권 안에 진입했을지도 모르는 벨리알 님을 아이라고 표현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심지어 파이몬, 바신, 몰렉 같은 다른 군주들의 이름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고 있다.

대충 머리를 굴려봐도 무조건 5위 안에 랭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부길드마스터!”

‘제발 그만해, 시바. 혜진아, 지금 바빠.’

[혹시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이고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방해라니요. 전혀 아니 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남아도는 게 시간입니다요. 그러니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확실히 당신은 재미있군요. 그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아주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렇게 다소 무례한 방법을 사용한 것에 대해 먼저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경우에는 대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방법이 한정적인 터라… 다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저 같은 경우에는 정도가 조금 더 심한 편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밖에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점,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을 이 장소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벌레들 몇몇에게 힘을 내려준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이고오… 뭐 그런 걸 다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라도 하등한 필멸자와 만나기를 원하셨다고 하시니, 제가 더 성은이 망극할 지경입니다요. 감사, 또 감사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저나 역겨운 영혼이라는 건 참으로 신기하군요. 이런 종류의 아부에 대해서는 별 자극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묘한 우월감이라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즐겁군요. 네, 즐겁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엘레나 님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엘레… 엘레나 님을….”

아니, 제발 그러지 마, 조 대리. 회장님 즐겁다고 하시잖아.

“괜찮으니까… 괜찮으니까… 잠깐만 혼자 내버려 두세요. 그런 걸로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냥… 잠깐만 혼자 내버려 둬요.”

“…….”

“…….”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안 괜찮아도 괜찮은 상황일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오히려 제가 다 사과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기왕이면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조금 어려워 보이는군요.]

‘아닙니다요. 그렇지 않습니다. 곧바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찰나이지만 현세에서는 정신을 잃게 될 겁니다.]

‘아이고오… 또 뭐 그런 걸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저언혀 상관없습니다요.’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이와 짧게 대화할 시간 정도는 드릴 수 있습니다. 혹여나 정신을 잃은 시간 동안 이 장소를 빠져나가면 저 역시 곤란해지니….]

“일단 모, 모시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도 말고 누구한테 알리지도 마세요. 절대로, 절대로… 부탁드립니다. 혜진 씨. 절대로… 제 말 명심하세요. 이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잠깐입니다, 아주 잠깐 동안만….”

[지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풍경이 곧바로 뒤바뀐 것은 찰나였다.

벨리알 베니고어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함께 올라갔던 것처럼 정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자리하게 된 곳은 고전적인 양식의 가구들이 즐비해 있는 방 안, 커다란 테이블에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호화로운 만찬들이 놓여 있었다.

‘조혜진이 말을 들어야 하는데.’

현세의 일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동안, 이윽고 집사 몇몇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르고 있는 전형적인 미중년들은 내게 그 어떠한 말도 건네지 않고 비어 있는 잔에 조용히 와인을 따른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여기가 정말로 무의식 세계가 맞는지 아니면 내 몸이 실제로 이동됐는지 헷갈리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눈을 잠깐 깜빡인 순간 내 몸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두 손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다.

‘시바, 이게 도대체 뭐야.’

라는 불경한 생각을 잠깐 머릿속에 담기는 했지만, 고개를 흔들어 곧바로 떨쳐 버렸다.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뜨린 흑발, 검은색의 눈동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색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정말로 칠흑 같은 어둠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색과는 거리가 멀다.

별 한 점도 없는 우주를 색으로 옮기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벨리알을 처음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려오던 위압감은 없다. 오히려 사람을 무척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은 느낌.

싱긋 웃고 있는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름다웠다. 도저히 악마라고 부를 수 없는 외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악마가 맞다. 그것도 상당히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악마.

본인의 입으로 본인이 직접 계약자들에게 힘을 내려줬다고 말하기도 했고, 나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악마 계약자 놈들의 불타는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쳐줬었던 이전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저 아름다우신 악마분의 말씀이 전부 맞다면 아마 그들이 원해서 소환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정확히는 저 악마가 소환되기를 원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물론 위 방법 역시 평범한 악마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72군단에 랭크되어 있다고 한들, 본인이 튀어나오고 싶다고 해서, 튀어나왔다는 악마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이런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지위와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까.

정확히 지옥의 구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 5위, 아니, 3위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저 여자가 정말로 서열 3위 이상의 랭크되어 있는 악마가 대륙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가정해 보자.

베니고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 혼자서 수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모르긴 몰라도 베니고어 윗선에 있는 이들이 대륙으로 파견되지 않을까.

대륙이 금방 개판이 될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그건 온건파로 분류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저 악마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추론이군요. 거의 다 정답입니다. 제가 이렇게밖에 당신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도 맞고,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정답입니다.

‘건방졌다면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이를 제대로 직시하고, 파악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어떤 악마라는 건 제대로 파악하신 건가요?

‘솔직히…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시면 더욱더 쉬울 겁니다. 당신 생각처럼 스스로 소환되기를 원해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악마는 흔치 않으니… 한번 맞춰보시겠습니까? 좋은 유흥이 될 것 같은데….

서열 1위 바알 아니면 서열 2위 아가레스? 아니면 서열 3위 바싸고? 그다음 가미긴 혹은 마르바스 일 확률도 없지 않지만, 단언컨대 4위와 5위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바알, 아니면 아가레스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8위권 안에 랭크된 악마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로 평범한 악마라고는 볼 수 없다.

뭐라도 대충 선택해야 하는 타이밍. 일단은 질러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리라.

눈앞에 있는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시며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지고의 대악마님께서는 상당히 너그러워 보였으니까.

-재미있네요.

‘실례지만 혹시 바알 님이 아니신지….’

-하지만 오답이예요. 아가레스는 더욱더 아니고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싱긋 웃고 있는 모습.

-더불어 72군단장에도 제 이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자, 등 뒤에서 칠흑의 날개 12장이 활짝 펴지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그 모습이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맞는지 틀린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은 목구멍에 걸려 있었던 그 이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타천사.’

-…….

‘…….’

-네. 몇몇 차원의 필멸자들이 7대 악마라고 부르는 이들 중 하나입니다.

‘…….’

-이럴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기영 님. 루시퍼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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