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598화 (589/1,590)

# 598

회귀자 사용설명서 598화

루시퍼(1)

찰나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7대 악마?’

72군주,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악마가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벨리알은 물론이거니와 베니고어 역시 언급한 적이 없다. 리무르아나 로노베 역시 마찬가지였고….

정황상 베니고어가 말하는 윗분들과 비슷한 선상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발을 걸쳤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 하는지, 어째서 스스로 소환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는지 그 개연성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문제는 어째서 이분께서 나를 보러왔느냐에 대한 것. 대기업 회장님께서 굳이 여기까지 행차해 주신 이유가 궁금해졌다.

물론 이유야 만들 수 있다.

이쪽은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신입 사원이 아니다. 오히려 임원이나 경영자로의 취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새로운 회사를 경영하게 될 경영자,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혁신 인재, 정체되고 있는 기업에 창조성을 불러일으켜 줄 새로운 바람 둠기영.

만약 지옥으로 행선지를 정한다면 72군단장을 역임할 가능성이 큰 만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위를 받게 된다면 계열사를 하나 맡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룹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루시퍼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게 당연하지 않을까.

심지어 경쟁사에서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자리를 만들어볼 만했다.

물론 딱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지분이 있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리라.

어쩌면.

조만간 베니고어 윗선에서도 접선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추측이 난무하는 도중,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루시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궁금하신 것 같은 표정입니다.]

‘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

‘물론 저 같이 하등한 필멸자를 이런 노고를 겪으시며 찾아주신 것은 감사하고 또 감사드려도 모자랄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이면서까지 만나러 와주신 이유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범할 리가 없겠지.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작은 호기심이라고, 그 정도로만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벨리알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그 아이의 성과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니… 뿐만이 아니라 로노베, 그 아이 역시 군단장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더군요.]

로노베가 군단장이 됐어?

내가 무슨 도움을 줬는데.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싶어도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직접 현세로 발을 들인 것은 오랜만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딱딱하게 계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당신의 팬이니까요.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앞에 놓인 것 좀 함께 드시죠.]

‘네.’

최대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차라리 이런 만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조금 더 좋았을 것 같은 느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타천사가 이쪽에 호의를 보내는 것도, 테이블을 가득 채운 만찬도, 그리고 저 웃음도, 모두 원하는 게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법칙을 모를 리가 있을까.

‘나는 너를 이만큼 대접하고, 심지어 너에게 내릴 것도 있으니, 너 역시 내게 보답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전적이지만 훌륭한 방법이다.

물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생각해 본다면 그녀가 이쪽의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쾌재를 부를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큰 거래는 최대한 지양하는 게 옳다.

[식사가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네요. 물론 실제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입이 짧은 우리 이기영 군단장을 만족시킬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맛있습니다. 제가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더욱더요. 와인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대접해 주시니 이 미천한 사람은 도저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당신의 팬이라고요. 유행하고 있는 소설에 약간 빠지기도 했고… 아니, 솔직히 조금 많이 빠졌습니다. 최근 당신의 모습을 남모르게 바라보며 즐겁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뭐 이건 부수적인 이야기이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죠.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을 테니.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저 타천사가 소설에 빠지는 게, 내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관심이 없는 것은 맞다.

[무엇을 얻어갈 수 있는지, 또 그 대가는 무엇인지가 가장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답.

[드릴 수 있는 건 한정적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대신 해결해 드리고 싶지만, 그건 제 영역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을 수는 없지만, 이런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움직이는 데 제약이 생기는 터라… 이기영 님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이해해 드려야지요. 굳이 그런 사족은 붙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계약서를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제 부탁을 들어주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뭔데.

여러 가지 가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일단은 침묵.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괜스레 목이 타, 잔을 들어 올리자.

반대쪽에서도 잔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는 타천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저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지만,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라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말하기가 어렵다. 조금은 긴장한 내 표정을 읽은 모양.

이윽고 조심스레 움직인 그녀의 입술을 통해 받아들일 수 없는 개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당신과 함께 다니는 이들 중에 또 하나, 격이 높은 인간.]

뭐야, 그건 안 되지. 무슨 개소리야, 미친 까마귀 년이. 뭘 기분 좋다는 듯이 실실 쪼개고 있어.

‘…….’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득이 되면 득이 될 수도 있는 제안입니다.]

‘…….’

[네, 김현성이라는 인간 말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자예요.]

‘정확히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적의를 드러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당신의 사람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그도 저희와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물론 악마들과 뜻을 함께하기에는 성향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당신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런 이야기였나.

혹시나 말도 안 되는 개 같은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것이 사실.

막상 뚜껑을 까보니 조금은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제안이 튀어나왔다.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잠깐 생각해 봤지만 확실히 무리가 있는 주문이다.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악마에 대한 적의는 상상을 초월한다.

녀석들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한때 빛에 속해 있었다고 전해지는 타천사 루시퍼가 김현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건 얘가 우리 현성이를 모르고 하는 소리지.

만약 김현성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한들, 협조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데 내 모든 걸 걸 수 있다.

아마 악마들은 김현성이 상대 진영 쪽으로 가는 걸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이벌 회사에 인재를 빼앗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대충 느끼기에도 김현성과 빛 쪽 진영의 시너지는 꽤 괜찮았으니까.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위쪽이 조금 더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

인재에 열을 올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역시는 역시네.

김현성은 아직 따로 컨택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여 의아해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두 진영이 서로 간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득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뭔가 수를 써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당신이 확실하게 군단장의 자리를 맡아주신다고 한다면 그 역시 따라나설 것이 분명할 테니… 그저 때가 다가왔을 때 그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을 건네주기만 하시면 됩니다.]

‘글쎄요. 그게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는 하다. 만약 정말로 어느 한쪽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김현성과 함께 움직이는 게 이득이지 않은가.

아무리 양쪽 진영에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있다고 한들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이와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좋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정치 감각이 부족한 김현성 역시 나를 원하게 되지 않을까.

만약 함께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이쪽을 빛 쪽으로 잡아당길 것이 분명하리라.

‘원하시는 게 정말로 그것뿐이라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겠습니다. 하지만… 벨리알 님과 베니고어 님의 계약 내용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교섭권은 베니고어 님이 가지고 계시고 저쪽에서 조금 더 좋은 제안이 나온다면 저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는… 편법이기는 하지만, 계약 위반에 해당하고 있는 사안이고요.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저는 지금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루시퍼 님. 듣기 좋으시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는 아마 이쪽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고요.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진지하게 받아주시는 것 같아 기쁘네요.]

‘뭔가 다른 쪽으로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확신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정답.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아마 조금 더 떠보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까. 계약이 파기되면 안 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애써 눈앞에 있는 타천사를 바라본다.

여전히 속을 모르고 싱긋 웃고 있는 얼굴, 올곧은 자세로 서 있는 콧수염 집사들은 아무 말 없이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을 따를 뿐이었다.

[너무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뭐 사실 별로 상관은 없을 것 같군요. 어차피 당신은 그쪽보다는 이쪽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 당신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 지옥으로 갈 확률이 높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변할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구두로도 그렇다고 대충 대답해 드리지 않은 것은 제가 그만큼 지고의 대악마 루시퍼 님을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부디 불편해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뒷일이 걱정된다는 얼굴인데….]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분위기가 망가진 것 같지는 않으니 넉살 좋게 넘겨보자.

[뭐, 오히려 이게 좋겠네요. 이기영 군단장의 말처럼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면 조금 기분이 찜찜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당신 이야기를 같이 해보도록 하죠. 최근 많이 고생하시고 계신 것 같던데….

‘…….’

[이기영 님께서 처한 상황이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힘을 필요로 하고 있으시다는 것 역시 말입니다. 제 힘이라도 직접 내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기영 군단장의 파장은 벨리알과 더 맞는 것 같더군요. 무리하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못해 추천해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당연히 받을 생각이 없다.

[10장의 날개라도 선물로 드리고 싶지만….]

부작용 있으면 사절입니다.

[그 구더기 같은 신체로는 불가능할 것 같군요. 아, 욕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게 아니어도… 제가 지금 무언가를 청할 입장이 아니니, 만약 내려주신다면 감사히, 압도적으로 감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버릇없는 바깥 신과 더러운 비둘기들의 목을 쳐, 이 대륙이 루시퍼 님의 발아래에 움직인다는 것을 천명할 수 있도록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진심은 느껴지진 않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내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 같군요. 이럴 게 아니라 몇 가지를 보여드리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됐다.

정확히 뭐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됐다.

일평생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얼굴로 루시퍼를 바라보자 짧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