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604화 (595/1,590)

# 604

회귀자 사용설명서 604화

일생일대의 고민(2)

애초에 베니고어에게는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루시퍼의 검을 내린다고 말하면 반대할 것 같기도 했고, 이미 확정된 일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공화국과의 마지막 전쟁 때처럼 빛 폭탄 물약 2개를 들이켠 후에 예언을 지껄인 것이 전부.

위쪽의 의견을 완전히 배제한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곧 피드백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시간이 꽤 지난 현시점에서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따로 퀘스트가 내려오지도 않았고 조각상 쪽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제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모든 걸 이쪽에 맡기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하기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무려 루시퍼의 검이 성검으로 둔갑한 상황이 아니던가.

긍정의 표현이든 부정의 표현이든 간에 말이 나오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입장 정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본인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상층부에 연락을 넣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있다.

엘룬 쓰레기가 전체적인 판을 망치기는 했지만 결국 베니고어 사단의 책임이 아니던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현 상황에 대해 따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추측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가는 선택지는 상급자에게 깨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택지였다.

‘제일 그럴듯하지….’

대기업 회장이나 임원이라 한들,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볼 수는 없다.

윗분이 베니고어가 맡은 이 차원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들도 함께 관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내 추측이 조금 더 맞아떨어진다는 거다.

열정적인 회장님이라고 한들 수많은 계열사에 일일이 신경을 다 쓸 수가 있겠는가.

‘당장 루시퍼만 해도 최근에야 이 대륙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루시퍼 쪽보다 상대적으로 할 일이 더 많은 빛 진영은 취미 생활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정도로 바쁠 것이 당연했다.

어쩌면 베니고어를 믿고 대륙을 맡긴 사이 루시퍼의 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닐까.

내부 고발? 그것도 아니면 우연히 감찰하러 온 사이에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 것일 수도 있다.

베니고어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시간이 없었을 테고 결국에는 지금까지 쌓아온 업보들이 모두 드러나며….

‘궁지에 몰리게 된 건가….’

일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전말을 듣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은 베니고어를 믿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조각상 쪽에 한 번 더 가보는 게 좋으려나….”

그래도 같이 일을 오래 한 정이 있는 만큼 한 번 정도는 더 안부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떠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들리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위쪽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통수를 맞을 가능성도 있으니 미리미리 대비하는 것이 옳기도 했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자 나를 맞이한 것은 역시나 바젤 교황이다.

멀리서부터 이쪽을 발견한 직후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에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기영 명예추기경!”

“바젤 교황님! 여기 계셨군요. 안 그래도 인사를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명예추기경이 직접 올 필요가 있는가. 미리 연락을 넣어줬다면 내가 직접 찾아갔을 텐데…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이리 오게. 내가 부축해 주겠네.”

“하하하. 괜찮습니다, 바젤 교황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주 건강합니다.”

“으음…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요즘 명예추기경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내 마음이 편치가 않아.”

“이 모든 게 대륙을 위한 일이고, 베니고어 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까. 지금은 조금 힘들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제 노력을 알아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베니고어 님이 명예추기경의 노력을 모른다면 그 누가 명예추기경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차 한잔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 아쉽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5현장으로 돌아가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며칠 더 있다가 가는 것….”

“저도 베니고어 님과 바젤 교황님이 계시는 이곳에 있고 싶기는 하지만… 아시다시피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베니고어 님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었구만….”

‘아니, 바젤 교황님이 섭섭해하시면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자주 들리게 될 테니… 그리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아, 그랬지… 그럴 수밖에 없겠구만.”

“예,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가 없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말게, 명예추기경. 위원장으로써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정확히 일주일 뒤에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바젤 교황님.”

“아암, 그래야지. 이거 내가 너무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어서 들어가게. 베니고어 님께서도 명예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네.”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얼굴에 아쉬움이 감도는 모습이 보였다.

차 한잔 같이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바젤 교황과의 차 한잔은 그날 하루의 절반을 날리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이런 방법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관리해 준 지도 오래됐으니…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왕이면 제이나 대주교와 헬레나 이단심문관도 함께 말이다.

‘내 일이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이런 건 시간을 내서 해줘야지.

서서히 멀어질 인맥이라고 판단했다면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각상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도중에 바젤교황과 나눈 스몰톡에 내 마음도 편해졌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빛 측에서 아직 이쪽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장 안심이 된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다른 사제들은 몰라도 바젤 교황과 빛기영은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다.

만약 바젤 교황이 하늘 위에서 이기영 명예추기경은 거짓된 자라는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오히려 그 목소리를 악마의 속삭임 취급하지 않을까.

어쩌면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미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대륙의 종교체계 자체가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스카웃 건을 제외하고서라도 대륙의 운명이 빛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번에는 제가 조금 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삐져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경우는 아니겠지만 저지른 게 있는 만큼 밑밥은 깔고 들어가자.

‘우리 사이 문제없는 거 맞지? 아니 그전에 지금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설명 좀 합시다. 피드백이 없으니까 답답하잖아.’

조용히 조각상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이거 뭔가 문제가 터진 게 확실하네.’

모르긴 몰라도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내 가설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는 정황이었다.

결국에는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조각상에서부터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조금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점차 형태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내가 아는 베니고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머리를 땋아 어깨 위에 걸친 여신의 모습은 대륙에 있는 그 어떤 신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면이 없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는 어안이 다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너무 초면인데.’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영 님.]

‘아… 네.’

조금은 뻘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머쓱한 마음보다는 궁금한 마음이 더 크다.

도대체 베니고어나 로렌, 바리안 같은 놈들은 전부 어디로 가고 생전 처음 보는 여신이 여기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호의적인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적어도 뒤통수는 아니고… 이건 상급자인 건가? 윗분이야?’

[이기영 님께서 생각하시는 종류의 상급자는 아닙니다. 아, 제가 실례했군요. 인사가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먼저 찾아주시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해서… 자기소개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저는 베니고어를 대신해 앞으로 이 대륙을 담당하게 될 여신 넬리아라고 합니다.]

‘네?’

[베니고어를 비롯한 로렌, 바리안을 비롯한 기존 신들은 현재 여러 가지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어 조사 중에 있습니다. 위에서는 그동안 대륙을 관리할 여신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어 제가 베니고어의 업무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뭐라고요?’

[그동안 답답하신 면이 많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답답하기는 답답했는데… 그래서 당신이 왔다고요?’

[능력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 실적은 위쪽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으로….]

‘아니, 그건 알겠는데… 당연히 능력 있는 분이 와주셨겠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넬리아 님의 실적이나 월말 평가 때 얼마나 우수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도 아니고요. 베니고어 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조사를 받고 계신 겁니까? 그리고 왜 당신이 튀어나온 거예요? 나는 분명히 베니고어를 찾았는데….’

[복합적으로 연관된 일이 많아 전부 다 자세히 말씀드리기 힘든 사항입니다만… 아마 이기영 님께서 예상하시는 문제에 대해 조사받고 계실 겁니다.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기영 님. 하지만 당장 대륙의 국교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당분간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이 받아들이는 신성은 모두 강제 몰수되어 제가 대륙을 위해서 직접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종교개혁 해야겠네. 베니고어 교단을 비롯한 대륙 위의 모든 교단이 싹 물갈이되는 겁니까? 중간에 종교 물갈이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건 하나 터뜨려 주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베니고어 교단이라는 이름이 사라질 때 즈음에 넬리아 교단이 출범해서 기존 신도들 전부 흡수한다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빠르시군요. 역시나 윗분들에게 들었던 대로입니다. 만약 이기영 님께서 원하신다면 2000년 후에는 이기영 교단을 직접 만들어 이 대륙을 운영하는 방향도…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옵션으로 붙어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조건은 김현성 님의 합류가….]

예상하던 게 현실이 됐다.

‘와….’

그러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제로 현실이 되니 무척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신나서 떠들고 있는 넬리아의 목소리가 잘 들려오지 않을 지경이다.

위쪽으로 올라오면 받을 수 있는 메리트와 혜택 그리고 조건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게 현실이 되었다는 게 조금 더 명확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희 쪽에서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루시퍼 쪽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든 간에….]

당연하지만 루시퍼를 만나고 있었던 것 역시 파악하고 있다.

‘우등생이 맞기는 맞나 봐.’

무능력의 아이콘이었던 베니고어와는 레벨이 다른 합리적인 제안.

명확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발표를 선보이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계약을 따내기 위한 대기업 직원의 프레젠테이션처럼 느껴진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책임감이 깃든 눈빛은 가관이다.

사실 저 여신의 제안도 나쁘지는 않다.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 풀린 이후에 베니고어 교단을 자연스럽게 쇠퇴시키고 넬리아 교단을 박아 넣는다는 것도 실제로 가능하다.

시간이 조금 걸리고 귀찮아지기야 하겠지만, 극단적인 경우에는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도 되고….

어쨌든 수단이야 많다.

문제는 베니고어 대신 넬리아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

뭐가 옳은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물론 베니고어가 무능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이쪽의 비위를 맞춰주며 열심히 해오지 않았던가.

눈앞에 있는 여신은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여러모로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느낌.

마음의 눈으로도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겉모습만 봐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저렇게 떠들고 있는 모습만 봐도 곧 죽어도 원리원칙을 따질 것 같지 않은가.

사실 고민할 건더기도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눈앞으로 선택지 두 가지가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A. 베니고어를 버린다.]

[B. 베니고어를 안고 간다.]

괜스레 허벅지를 두드리게 될 정도였다.

‘아… 이거 생각보다 더 고민되네.’

1